금요철야예배설교 <지옥과 천국>

Sermon on Friday Night Worship <Hell and Heaven>

 

 


천국과 지옥

누가복음: 16:19-31

 

인생은 선택과 준비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현재가 달라집니다.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뀝니다. 아인슈타인은 “10분 후와 10년 후를 보라”고 말합니다. 나의 10년 후를 상상해보셨습니까?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수많은 보험 상품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노후 준비와 관련된 상품이 많습니다. 노후 준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후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 준비’입니다. 옛 성인 한 분이 “이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일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정한 이치입니다. 성경은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삼하 14:14)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기에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주님 곧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봄으로, 우리 모두 천국에서 하나님과 행복하게 삽시다.

   

첫째, 천국은 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선포한 것이 천국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마 9:35)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천국을 예비하십니다(요 14:2). 천국은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천국은 가난과 질병이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도 없습니다. 죄와 사망도 없습니다. 성경은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더 중요한 사실은 천국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삽니다(계 21:3). 또한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예수님은 이 천국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장차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지금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눅 17:20-21).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우리 모두 천국을 소망하며 삽시다. 예수님을 모심으로 이 땅에서도 마음 천국으로 살아갑시다.

 
 

둘째, 지옥도 있다

 

혹시라도 “진짜 지옥이 있겠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옥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하나님이 설마 지옥에 보내겠어?”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진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반드시 지옥에 보내십니다(벧후 2:4). 우리는 결코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이 가는 곳입니다(마 25:41). 바깥 어두운 곳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고통 받는 곳입니다(막 9:48-49 계 20:15). 영원히 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지옥에 가서 후회하면 이미 늦습니다. 지옥에는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습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지옥은 영원한 사망만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예수님은 이러한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손발을 자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5). 인간은 죄인입니다. 아기들을 보십시오. 가르치지 않아도 미워하고 때립니다. 우리에게는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가 있습니다. 크든, 작든 죄는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냥 이대로 살면 누구도 예외 없이 지옥에 갑니다. 우리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야 합니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갈 길이 있습니다.
 

 

셋째, 천국 갈 준비가 됐나요

 

본문에 두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지옥에 간 부자가 간곡히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물입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부자는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고통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전도입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가족만큼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경험해보니 지옥은 올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방법은 쉽습니다. 회개입니다! 회개란, 세상에서 죄짓고 방황하던 삶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를 지었어도 천국에 갑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고 먹보다 검을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은 용서하시고 천국을 주십니다(눅 23:42-43). 세상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천국에 가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천국 가는 것이 제일 큰 보화입니다. 천국은 세상 그 어떤 곳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문지기로 있어도 좋은 곳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찬양합니다. 천국에 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인생은 내일 일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약속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셔들입시다. 오늘 믿으면 천국은 우리의 것입니다. 성령까지 선물로 받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라고 약속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구원받아, 살아서도 천국을 누리고, 죽어서도 천국을 누립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천국을 주기 원하십니다. 천국을 주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합니다. 천국에 함께 갑시다. 천국에서 함께 삽시다. 천국이 행복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천국 갈 길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죽어서도 천국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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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 (People who go to heaven People who go to hell)

 

 


제목  :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
설경말씀 : 누가16:19-31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은 부자라서 지옥 가고
거지라서 천국간다는 말씀이라기 보다
구원 받아서 영생 천국에 가는 기준과 자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사함을 받은 분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구원 받고 천국

시민권을 받고 천국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으로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저출산 세계1위,
자살 세계1위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에 자살로 생명을 끊는 사람이
13,500여명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내세가 있는 것을 알아도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을 합니다.
성경은 자살은 죄악으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형벌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도 내세를 알고 있지만  저 세상으로 간다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만 저 세상에는 천국과 지옥이란 곳만 있습니다.


자살자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자살자들은
현실의 괴로움과 아픔을 피해보려고 자살을 시도해 목숨을 끊어
남은 가족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기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나인성 과부 여인의 아들은 청년인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지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소녀인데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
주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수넴 여인의 아들은 어릴 때에 죽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렸습니다.


어떻게 태어나느냐 출생도 중요하나 임종을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여러분 무병장수 만수무강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 모두 건강과 구원과 영생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최진실이라는 여배우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도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 하고
성령을 체험하지 못 했기에 자살로 생을 마감해 가족과 모든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삼성 이건희 전회장의 막내 따님도 미국에서 자살하여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전 현대 그룹 정몽헌 회장도
노무현 정부 당시 검찰의 조사를 받던중 압박감을 느껴
계동 사옥 집무실에서 투신 자살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살을 하기 전 자살자들이 잠 못 이루고 괴로워 하다가
난관에 부딪혀 전혀 돌파구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생명을 끊는 어리석은 자살로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지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병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과 정신에 병이 들면
의사 선생님의 진단과 지시를 따라
요양을 하거나 투약을 하거나 수술을 해서라도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서라도 다시 재기하거나
도전해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전문가와 상담을 해서라도
살길을 찾고 피할 길을 모색해야지 최선을 다해 보지도 않고
현실의 괴로움과 문제를 죽음으로 풀려고 하는 것은 현실 도피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성경은 죽음과 생명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엔 신자든 불신자든 육체는 무덤에 장례를 지내 뭍고
믿는 성도의 영혼은 낙원이라는 천국에 가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음부 즉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성령받고 십계명을 지키고
성경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고 실천한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인류에게 구원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나 죽은 후에는 내세가 있는데
하나님을 믿고 선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하고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살자와 불신자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불속에서 괴로움을 당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자세히 분석해 보겠습니다.


1.부자
1)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고 즐겼습니다.
2)거지에 대해서 무관심 했습니다.
3)부자가 죽어 장사되매 불 꽃 가운데서 고민하며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거지 나사로에게 손 가락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으나 갈 수가 없는 곳
  지옥에 있었기에 도울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4)부자에게 오 형제가 있는데 그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부자가 간청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2.거지 나사로
1)거지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소외 계층이지요.
 그러나 나사로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부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2)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고
 상처는 개들이
 핥아 주고 부자와 사람들은 외면 했습니다.
3)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인 천국에 들어 갔습니다.

4)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므로 천국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차잇점은
부자는 나사로에게 무관심 했고 나사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한 천국에 들어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불쌍한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하나님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금생에서도 축복을 받으시고  내세인 천국에 들어가셔서
영생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천국은 마음의 천국이 있습니다.
마음에 먼저 천국이 이뤄져 평안 하셔야 합니다.
성령 받으면 마음에 천국이 이뤄집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신 가정은 가정 천국이 이뤄집니다.
교회가 은혜스러우면 교회가 천국입니다.
나라가 평화스러우면 지상 천국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엔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빛과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인 천국엔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고
구원 받은 성도들도 있고 하나님 보좌로 부터 생명강이 흐르고
생명 나무가 있고 수정 유리 바다가 있고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지요.

 

지옥은 음부, 게헨나(불타는 곳) 하데스, 스올(깊은 곳),이라 칭하는데
사단과 귀신과 적 그리스도 이단과 거짓 선지자가 사람들을 미혹하고
유혹해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나 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부자는 내세에서 영원히 지옥 불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생명과 죽음 어느 것이 귀합니까?
 
당연히
생명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축복과 구원 그리고 생명과 부활을 얻고
천국에 들어 가시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잘 믿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신 성령의 체험을 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행하세요
주님의 인도와 사랑과 가호가 있을 것입니다.


현세에서 행복과 축복과 건강의 복을 받으시고 내세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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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주일 예배 설교 (대강절 예배 설교 )

 

 


제목 :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의미

서    론
부모님들은 자녀를 낳으면, 자기들의 희망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곤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름 중 거의 의미가 없는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와 문화가 비슷하여 자녀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줄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신앙과 관련을 지어 이름을 지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사람이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시고 천사를 통하여 알리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명과 직명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예수님께서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 요셉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의 의미대로 구원자로 오셔서 구원자로 사시면서 구원의 사역을 잘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님은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려고 제물이 되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히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14“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9:28“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었고”
히10: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2)예수 그리스도는 각 가지 환란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8:23-27에 보면,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호수를 항해하다가 큰 풍랑을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셔서 잔잔케 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풍랑은 영적으로 인생의 환란을 의미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는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4:23-25에 보면 예수님께서 백성 중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다 고쳐주셨습니다.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너무 많으므로 일일이 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자로 이미 예언이 되었고 치료목회를 통하여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사29:18“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사35:5-6“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는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사53: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이상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병든 자를 치료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4)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엡2: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5)예수 그리스도는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6)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다 지키시고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마5:17“내가 온 것은 선지자나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롬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2.임마누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7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알려주셨습니다.
사7: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임은 함께, 마누는 우리와 , 엘은 하나님 입니다.
또 천사가 요셉에게 태어나실 예수님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마1:23-2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시청각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해서 육을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마28: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전도자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복을 받고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 큰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라 직명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선지자, 왕이 취임을 할 때 선지자가 기름을 부어 취임을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시는 것은 3직을 다 감당하러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1)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세우고 백성을 보호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하늘나라를 세우시고 세상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려고 오셔서 그 일을 지금까지 하시고 계십니다.

2)선지자이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인데 예수님은 한 생애를 사시면서 이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멈추시는 곳마다 그곳에서 열심히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마4: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마7:28-29“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3)제사장이십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백성들의 죄를 제사를 통하여 해결하여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 제사장으로 오셨고, 제물로 오셔서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마20:28"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히3:1“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7:26“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7:27“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결 론
1.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시고 천사가 알려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불행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십니다.
2.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3직을 감당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실 메시야입니다.
3.과거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메시야 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모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을 힘있게 알리고 전하는 명절로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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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장례식 설교 (입관 예배 설교 )성도가 얻을 안식

 

 

 

말씀 시편 7 : 13-17)

 

성도가 이 땅 위의 삶을 살 때 믿음을 지키고

충성된 삶을 살므로써 받는 복락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이겠지만. 본문에서는 안식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1,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

하나님의 장막 속에 있는 성도는 펀안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가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나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성도는 현생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 가운대서 방황했던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안식의 장악을 두르심으로서 위로와 안식을 공급해 주신다.

여기에서 성도는 영원한 안7과 위로를 얻게 된다.

 

2, 그들의 목자장이 되신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성도들의 대 목자장이 되선서,

그들을 영원한 생명 강가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공급하신다.

이 EKd 위에 있는 지도자는 한결같이 흠이 많고 불완전하지만

주님만은 의로우시고 완전하셔서 결단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는 또한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고통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위로와 안위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분 안에 참 평화와 기쁨이 있다.

 

현생의 삶을 사는 성도는 언제나

찬바람이 휘몰아 치고 흔들리는 불안한 세상 가운데 처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 속떼서도 고인은 믿음을 지키고

천국의 빛나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충성, 헌신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고인이 누릴 천국의 영광과 안위는 지극히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 흙 속에 잠들 무렵 (하관-1) (고전 10 : 1-4) ***


 

하나님은 인간의 시조 아담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빛어 만드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생동안을 흙과 더붙어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다시 흙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

 

1, 슬픔의 시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간은 때가 되면 흙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이를 지켜보는 자들은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

 

2, 부활을 기약함.

주를 믿는 신자으 죽음이 복된 이유는 부활의 새 아침을 기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죽는다'는 표현은 '잠잔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야 온당하다.

불신자들은 육체의 죽음으로 영원한 죽음을 당하고야 말지만,

신자는 육신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오히려 새로운 삶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3, 영원한 생명세계로의 전이

신자의 죽음은 삶의 종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로 들어가는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청산할 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간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라고 찬송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땅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슬픈 일이지만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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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온가족이 함께하는 설날 예배 순서

 

 

 

 

 

오랜만에 온가족이 자리에 함께 앉았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둘러앉아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     송 ---------------- 539장 ----------------- 다함께
기     도 --------------------------------------- 가족중
성     경 --------------- 딤후2:20-21 ------------- 다함께
설     교 --------------------------------------- 가족중 어른

쓰임받는 그릇
한집안에는 여러종류의 그릇이 있듯이 우리 집안에도 여러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다른 그릇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20절에서 우리는 큰 집에 많은 그릇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등. 질그릇보단 나무그릇,나무그릇보단 은그릇,은그릇보단 금그릇이 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가치 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가 차이점이 있는 것은 바로 다양성이 있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성격이 다른 것은 바로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이기에 서로가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어떤 그릇도 주께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각 그릇들은 그 재질에 맞는 용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ꡒ나는 금이다ꡓꡒ 넌 은이다ꡓ식의 싸움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용도에 맞게 창조하셨음을 알고,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존재도 귀하게 쓰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못해][안돼][할수없어]이런 언어는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언어입니다.

오히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힘주시면 할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째,그릇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상하게 말하면 사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셨을 때는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릇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금그릇이라도 그 속에 소변이 있다면 그것은 오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이라도 귀한 보약이 담겨있다면 주인은 그 그릇을 소중히 다룰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들은 올한해 귀중하게 쓰임받는 그릇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그릇들이 되어야 하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하는 인터넷게임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또 못된 것을 배우게하는 친구들의 사귐을 조심하고,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부모님께 늘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격려와 칭찬의 시간----------------------------가족이 돌아가며 참여
서로기도 ------------------------------------서로가 손을 잡고 기도
주기도문-------------------------------------다  같  이

 

 

 

 


* 또하나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함 께
찬      송 / 305장 혹은 460장 ----------------------------------- 다 함 께
시편교독 / 시편 23편 ----------------------------------------- 다 함 께
기      도 ----------------------------------------------- 가족중 맡은이
       가족 중 믿음이 좋은 분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명절을 주시고 가족들이 함께 모이게 된 것을 감사하고,
       조상을 통하여 이땅에 우리를 보내신 것과,
       그 동안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며
       가족의 화목 등을 위하여 기도하되 길지 않게 합니다.
성경봉독 / 시편 112:1 ----------------------------------- 자녀중 맡은이
설      교 / 복받는 비결 ----------------------------------------  인 도 자

        "복이 있도다!" 하면 우리는 "복"이 너무 좋아서 숟가락에도 복, 밥 주발에도 복,  베개에도 복... 복... 하면서

다들 초등학문으로 갑니다. 그렇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식으로 복을 빈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복 받는 조건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 내 존재, 내 신분을 의식하는 것이 복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생각하면 그것이 진짜 복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복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어려서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은 자라서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걸 온 몸으로 가르쳐 놓으면 잠시 빗나갔다가도 멀리 못 가고 돌아옵니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죽지 못하고 돌이키는 것은 부모,  특히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서 라고 합니다.

우리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를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데.. 를 생각하면 차마 죽지 못하고 돌이킨다는 겁니다.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온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용)
         나의 복의 개념은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는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누리는 복을 자각하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받은 복'을 하나하나 기록 하며 세어보시면 어떨까요.

덕      담 / 새해 소망을 나누거나, 가족간에 사랑의 고백을 한다 ------  다 함 께
찬      송 / 28장 혹은 433장--------------------------------------  다 함 께
축복기도 / 온 가족의 소망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기도한다 -------- 가     장
주기도문 ------------------------------------------------------- 다 함 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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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김 수빈 집사 가정의 가정 예배 (Home worship)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 가정의 목자가 되시어 험한 세상 가운데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은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이 가정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평강의 복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주여,저희 가족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희들의 심령에 늘 함께 하여 주셔서 예수님의 사랑이

저희 가족들의 심령에 넘쳐나게 하여 주옵소서.

 

온 식구가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화목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재물을 의지하기 보다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썩어져 갈 육신의 쾌락과 정욕과

헛된 것에 대한 탐욕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저희 가족을 보호하여 주시고,

말씀과 은혜 가운데서 거룩하게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즐거움을 더 사모하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이 가정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찬송이 그치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믿음의 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친척들과 이웃에게 행함으로 본을 보여 복음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내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만일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던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야훼)를 섬기겠노라"(수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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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장례예식설교 (임종,입관,발인,하관,위로 예배 설교)

 

 


 

장례예배란

장례예식을 잘 치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부활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의 중대한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국가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일들이 뒤따르는 인간사의 중대한 장면이다.

성도의 시신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몸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담겨있던 육신을 정중히 다루는 것이 유가족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떠난 육신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겨 우상시할 필요는 없다.

장례의 의의는 무엇보다 유족들을 위로하면서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과 이것을 계기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크게 도모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항상 마음에 두고 봉사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장례예식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신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장례식에는 임종예배,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 위로예배의 다섯 가지 예식이 있다. 이 가운데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은 매우 중요한 예식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장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발인(출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례예배 실제

 

1) 임종예배 설교
사람의 호흡이 끊어져 인생의 종말을 고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때가 곧 임종이다. 세상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구원의 확신이 없이 임종하였다면 그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다시없는 비극이다.

* 어떻게 운명이 임박한 것을 알 수 있는가? 심장이 거의 멎어가는 사람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 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멎어 있으면 곧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때에 손발을 살펴보아서 손톱과 발톱이 새까매지면 운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운명하려 할 때 집례자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도록 권면하고, 마지막 임종 기도를 드리며, 찬송을 계속 부르는 것이 좋다. 또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임종시에 신앙고백을 듣고 유족들에게 “예수님을 잘 믿어라”는 한 마디의 유언을 남길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 운명한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운명한 다음 중요한 것은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이다. 그러므로 임종예배가 끝나면 교회는 즉시 상가와 장례절차를 결정하고 최후의 행사에 대하여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상을 당한 식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고와 행정상 법적 절차를 밟는 일에 협력하도록 한다. 우선 의사의 사망진단서를 받아야 한다. 사망진단서를 가지고 동사무소에 가면 매장 허가서를 뗄 수 있다. 다 준비되어 있으면 매장허가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 장례 일정을 논의하는 것이 좋다. 이때 교회법을 따르도록 다짐을 받아야 하고 시신 앞에서 배례나 곡을 하지 않아야 하며, 조객들은 묵도로 예의를 갖추도록 미리 알려두면 좋다.

 

2) 입관예배설교
입관예배는 고인의 시신을 씻은 후 옷을 입혀서 관에 모시고 드린다. 관에 뚜껑을 덮고 결관하여 관보를 씌우고 드리기도 하고, 관에 뚜껑을 덮지 않고 옆에 두고 드리기도 한다. 입관은 원칙적으로 임종 후 24시간이 지난 후에 한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다시 소생할까 해서 24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앓던 분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별세 후 24시간이 경과되지 않았더라도 유족들의 요구에 따라 서두를 수도 있고 잠시 연장할 수도 있다.

묵도를 마치면 찬송을 부르고 성경봉독을 하고 설교를 하고 기도로 끝낸다. 입관예배를 마치고 나면 발인예배 시간과 장소를 자세히 알리고 폐회한다. 예배 후에 몇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다. 유족이 상을 당해 보지 않았거나 전혀 장지에 관한 일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준비물과 과정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 상주는 입관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상복을 입어야 한다.
* 매장허가서를 받아 놓았는지 확인을 한다.
* 영구차는 준비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 장지까지 따라갈 교인의 인원을 참고로 알려준다.
* 장지에 갈 음식 장만을 확인한다.

 

3) 발인(출관)예배
불신자들은 발인식을 영결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합당치 않다. 그 말의 의미가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없음을 생각할 때, 영결식이란 말 대신에 장례식 혹은 발인식, 출관식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발인예배의 집례자는 축도를 마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구차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예배 후 모든 조객들을 좌우로 질서 있게 세우고 집례자가 사진 든 사람의 왼쪽에 서서 팔을 잡고 앞으로 출발한다. 그 뒤에 꽃이 따라고, 상주가 따르고, 유족들이 따르고, 조객들이 따라 나와 영구차에까지 오면 사진은 집례한 목사님이 탈 선두차 앞에 실어 놓는다. 운구한 다음에 집례자는 영구차의 관을 넣는 쪽에 서고 그 옆에 상주와 유족들을 쭉 서게 하고 장지에 함께 갈 조객들은 먼저 차에 타도록 하고 산에 가지 못할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킨다. 집례자는 인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인사가 끝나면 상주들을 지시하여 차에 태운다.

집례자가 상주들이 탄 차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고 내려와서 선두차에 타고 출발하면 그 뒤에 영구차와 조객들의 차가 따르게 된다.

 

4) 하관예배
영구차가 산에 도착하면 발인식의 행렬과 같은 요령으로 묘지까지 운구한다. 이때 성가대가 있으면 찬송가 543장을 부르는 것이 좋다. 하관예배를 드릴 때에도 집례자는 관머리쪽에 서서 지휘를 하며 관을 내리게 한다. 관이 안장된 다음에 관보, 명정, 횡대를 다 덮고 다시 세 번째 횡대를 열어서 두 번째 횡대 위에 놓고 나서 상주는 집례자의 오른쪽에 서고 조객들은 집례자의 왼쪽에 서게 한다.

찬송은 291장같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을 부르고 설교도 부활에 대한 것이 좋다. 특히 하관예배는 흙으로 된 몸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산 사람끼리 돌아와야 하는 슬픔의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새로운 결심과 부활의 소망을 주는 말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모든 슬픔은 흙속에 묻어 버리고 다시 무덤을 찾아올 때는 기쁜 소식들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축복기도를 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축도를 하고 하관예배가 마쳐지면 복토(覆土)를 한다. 집례자는 복토 순서를 말해야 한다. “복토 순서는 집례자, 상배자(미망인), 유족, 친척, 교역자, 장로님, 친구의 순서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제일 먼저 집례자가 복토를 한다. 복토를 하는 동안 성도들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복토가 끝나면 집례자는 폐회선언을 한다.

 

5) 위로예배
산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상주들을 다 모아 놓고 위로예배를 드림으로써 모든 장례절차는 끝나게 된다. 위로예배는 상주들이 가장 허전해 하는 때이므로 더욱 정성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때 교역자는 다른 급한 심방이 있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하며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끝마쳐야 한다. 이때 상주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다.

장례 때의 가장 많은 질문들

1. 임종시 곡을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별세했을 때 슬픔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연스런 감정이 북받쳐 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다만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계속 곡하는 것과 옛날 유교식 장례에서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을 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2. 상을 당했다고 알리는 등을 다는 것과 촛불 켜는 것, 향을 사용해도 됩니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상가임을 알리고 등을 다는 것은 문상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말하듯 귀신을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촛불은 어두음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향을 피우는 것은 상가의 상징행위로 혹은 분위기나 냄새 제거의 목적으로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3. 위패를 모시거나 지방을 써서 붙여도 됩니까?
이것은 기독교인으로 거부합니다. 유교식 장례법으로 사당이 없는 가정에서 화선지에 ‘누구누구씨 신위’라고 위패를 써서 예식을 가졌었습니다. 지방을 써서 모시는 것도 돌아가신 혼령이 그 자리에 임재한다는 빙의의 신앙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은 조상의 넋을 종이에 써서 붙여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모셔야 합니다. 추모식 때 중심의 상징이 필요한 경우 위패나 지방 대신 아무개 성도의 제 몇 주기 추모제라고 써서 붙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4. 상례시 음식물을 상위에 진설해도 됩니까?
고인의 영정 앞에 음식을 차리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인이 평소에 잘 드시던 음식을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여 차려놓는 것을 말릴 필요는 없습니다. 죽은 자는 음식을 차려 놓아도 먹을 수 없습니다. 불필요하게 유가족들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5. 운명한 후 고인의 옷가지를 지붕으로 던지거나 사잣밥을 준비하는 것은?
귀신들이 황천까지 안내한다는 의식의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하늘에 올라가지 귀신이나 사자들이 안내하는 것이 아니기에 필요 없습니다.

6. 수의와 유가족들의 복장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는 이들 가운데도 고급 수의를 고집하는 경우를 봅니다. 몇 백만원, 혹은 유명한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몇 천만원까지 한다니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수의를 미리 마련하면 장수한다는 속설도 믿을 필요 없습니다. 간소한 수의를 마련하는 것은 좋습니다. 꼭 삼베로 만든 수의가 아니어도 평소에 잘 입던 양복 등을 입혀도 됩니다. 유가족들의 경우 집안의 풍습대로 하되 삼체로 만든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는 흰색, 혹은 검은 색 치마 저고리를 입거나 깨끗한 검은 양장을 입어도 될 것이며, 남자는 검정색 양복에 삼베 상장을 팔에 끼는 것도 무방합니다.

7. 임종시 돌아가는 분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이건 조심해야 합니다. 금방 돌아가실 듯 보여도 나중에 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환자 앞에서는 장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강압적으로 고백을 받아내려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예수님 믿으세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평안하세요” 정도로 말씀드려도 다들 알아듣습니다. 운명시간이 가까워 오면 오히려 가족들보다 환자 분이 마음이 차분하답니다.

8. 비기독교인의 상가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은 괜찮습니까?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조언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할 경우를 위해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종교적인 이유로 거리낌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두어 가지 이유에서 상가에서 음식을 잘 먹지 않습니다. 하나는 유가족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분주하고 슬퍼하는 가족들 앞에서 떠들며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고, 봉사하는 이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음식을 여러 사람들이 먹다보니 위생적으로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멀리 간 경우, 혹은 가족들과 대화가 필요한 경우에 간단하게 떡이나 차를 마시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 문상을 가서 어떤 말을 상주에게 해야 합니까?
정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로 받으세요. 천국 가셨습니다. 힘내세요. 주안에서 큰 위로 있으시기 바랍니다.” 등으로 말씀드리면 됩니다. 저는 특히 큰 며느님이나 둘째 혹은 셋째나 고인을 모시고 살았던 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노라고 혹은 “고인에게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유가족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10. 문상객이 뜸할 때 상주는 휴식을 취해도 됩니까?
본래 예로는 어긋나겠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상주도 쉬어야 합니다. 사람의 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끼리 순번을 정해 쉬고, 혹시 조문하러 갔을 때 내가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조용히 물러 나와야 합니다. 어쩌다 쉬러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와서 불러내면 어찌 쉬겠습니까? 나중에 연락을 드려 그때 갔었는데 뵙지 못했노라고 하면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11. 문상 시에 기독교인이 영정 앞에 절을 해도 됩니까?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사드릴 때와 문상 때는 다릅니다. 제사의 죽은 자를 위해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조상을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표하는 방법으로 절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아까 적은 음식문제처럼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절하기보다 고인을 추모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나아보입니다.

12. 상주와는 어떻게 예를 표해야 하나요? 절을 합니까? 일어서서 인사합니까?
입식인 경우, 가정에서 장례를 치를 때 절을 합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도 무방합니다. 저는 절하기보다 허리를 굽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조문객이 적은 가정은 문제가 아니지만 수천 명, 혹은 수백 명이 찾아오는데 절을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 상주들이 힘들어 견딜 수 없습니다. 상주가 엎드리면 나도 엎드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서서 절을 해도 무례가 아닙니다.

13. 입관 때 반함을 하거나 고인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잘라 넣어도 됩니까?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배격합니다.

14. 추모예배는 장자의 집에서만 드리나요?
옛날 농경사회에서 제사를 드릴 때 장자가 무언가 있어야 제삿밥이라도 먹는다 생각해서 장자에게 유산을 물려주어 제사도 장자가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바뀌어 딸들도 유산을 상속하게 됩니다. 추모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고인을 추모하고, 가족끼리 화목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나 셋째, 혹은 따님의 가정에서 추모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15. 화장을 해도 됩니까?
아직도 몇몇 교회에서는 매장만을 고집하고 가르칩니다만 현재 우리나라 국토는 좁은데 매장만 고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못되어 육신은 먼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먼저 화장의 풍습을 권장해야 합니다. 화장 후 유골을 부수어 강가에 뿌리거나 산기슭에 뿌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여보호에 맞지 않고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보다는 평소에 잘 가는 기도원이나 교회 앞마당에 뿌리는 것이 의미 있고, 요즘엔 납골당이 잘 되어 있어서 화장을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16. 이장을 할 경우 몇 년째에 합니까?
보통 20년이 지난 후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육탈되어 백골만 남아 이장하기 좋습니다. 만약 부득한 경우에 이장할 때는 마음이 약한 이나 여성들은 피하고, 대표가 산 일 하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이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17. 매장 시 지방에 따라 시신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지방에 따라 매장할 때 관에서 유해를 꺼내 따로 매장하는 탈골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풍습에 따르면 되고, 그 때문에 논란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신 간소하게 목관을 사서 써야 경제적입니다.

18. 고인이 사용하던 성경을 관에 넣어도 됩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이장할 때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시신 손가락 유골이 성경책을 파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성경 등은 후손이 잘 보존하면서 신앙 유산으로 남기면 좋습니다.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며, 천국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 예배하므로 성경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19. 묘 앞에 세우는 비석에는 무슨 말을 적어 넣을까요?
아무개 성도, 아무개 집사, 권사, 장로 등으로 쓰되 비석은 간단하고 검소하게 합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세우면 됩니다. 크다고 자랑할 일도 부러워할 것도 아니고 적다고 부끄럽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비석에 아들 이름만 새기거나 아들, 딸, 사위, 후손의 이름을 새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인이 살아 생전의 가족들의 이름은 손자들까지 놓으면 나중에 아이들과 고인과의 연결고리가 되므로 좋습니다. 고인의 이름 생년월일, 간단한 성구들을 넣으실 수 있으면 그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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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통해 바벨탑의 영적인 의미를 기억합니다.

 

 

 
 
찬송 : ‘목마른 내 영혼’ 309장(통 40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창세기 11장 1∼9절

말씀 : 오늘은 바벨탑 사건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흩어지지 않겠다는 인간의 결심과 이들을 흩어지게 해 번성케 하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죄성(罪性)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 이야기에 나오는 노아의 자식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뜻을 더 따랐습니다. 내 생각과 내 입맛에 맞는 것, 사람들이 좋다는 걸 더 따르는 일은 때로 하나님 앞에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좋아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의 반응과 인기를 얻기 위해 하나님 뜻보다 사람 뜻을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과 즐기느라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의 연합된 반역이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큰 홍수의 심판을 경험하고 난 직후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높은 탑을 쌓으려 했을까요. 그들의 교만함은 인간이 스스로 똘똘 뭉쳐서 하나님을 이겨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홍수로도 잠길 수 없는 더 높고 견고한 탑을 쌓아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지 땅에 떨치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단합했던 겁니다.

하나님은 홍수 이후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언약을 확인하셨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 뒤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대신 내가 직접 얻어내겠다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셋째 인간 자신의 의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바벨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해서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내 뜻이 더 중요하고 옳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거스르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알지만 귀찮고, 알지만 지금 상황에선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아 하나님 뜻을 어기거나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인간이 반응하기를 기대하고, 좋은 것을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사랑은 인간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고 먼저 약속하고 다독이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약속을 잘 믿으려 하지 않고 의심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두려움과 불안함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불신과 교만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계획과 은혜 안에 안겨 평안함과 축복을 누리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두려움과 불안함, 고집스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약속하심을 온전히 믿지 못함임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나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맡기고 순종하며 따르는 한 사람 한 사람 되게 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민정 목사(좋은목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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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째주일 대강절 주일예배 설교 (Preaching of the Advent)  


 


 
말씀 : 마22:34-40

제목 : 사랑의 계절

벌써 2003년도의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고, 그 한 장 남은 달력도 절반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우리는 이맘때쯤 되면 웬지모를 숙연함을 느끼며 다시금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실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무상하게 지나간 세월속으로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더듬어 보며 또다시 우리앞에 펼쳐질 시간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성탄절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언제나 그랬듯이 거리에는 웬지모를 흥분감마져도 감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약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오셨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과 가난과 질병과 미움과 저주와 온갖 압제 속에서 시달리는, 그래서 결국은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생명과 평화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정말 무지하고 죄된 인생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모든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셨고 생명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오늘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가운데 주님과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죄되고 무지한 인생들, 저주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생명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참 자유와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은 그저 단순히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물론 그 역사적 사실도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 왜 우리는 그분을 영접해야 하고, 영접했다면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 어떻게 주님의 뜻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는 먼저 주님을 내 심령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 가정과 교회속에 새롭게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나와 내 가정과 내 교회속에 주실 그 생명과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는 일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계신 그 주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으로 이 땅위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에 성탄절의 의미는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구원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땅에 실현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러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생명의 역사와 사랑의 역사를 구체화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관심이나 이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의 현실속에 구체화시킬 때 그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이 있고, 관심이 있고, 이해가 있고, 공감을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체적, 현실적으로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생자 예수께서 현실의 세상속에 오셨고, 또한 그분도 십자가의 처형을 실제적으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체적 현실적으로 부활하셔서 무덤문을 열고 나오셨고, 실제적으로 40일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현실적으로 승천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가 받은 바 은혜와 사랑들을 구체적, 실제적으로 현실에 적용할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말입니다. 관념적인 사랑, 그저 생각으로만 공감하는 사랑, 그저 이해나 하고 있는 사랑,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절은 말할것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와 영광과 축하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기 이전에 주님의 뜻을 살펴야 되는데 그것은 물론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래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주님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물론 사랑입니다. 주님은 인류를 향한 나를 향한 그 애특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랑 때문에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곳에 오셔서 날 위해 죽으셔서 내게 생명을 주신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게 두가지의 중요한 커다란 계명이 있는데 먼저는 우리의 생명을 다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들을 하고 계시지만 결국은 이 두가지로 결론이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론 먼저 첫 번째의 말씀 즉 왜, 어떻게 우리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보아야 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두 번째 주제 즉 우리의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겠습니까? 내 가족입니까? 내 옆집에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 동네 사람입니까? 안동권씨다 진성이씨다 하는 종씨입니까? 아니면 녹전면민입니까? 아니면 대한민국 국민입니까? 물론 좋습니다. 다 나의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이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혈연, 지연, 학연 다 초월해서 여하튼 너와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흑인이든 백인이든, 전라도 사람이든 경상도 사람이든, 안동 권씨든 진성 이씨든, 서울 대학 졸업자든 녹전초등학교 출신이든, 대통령이든 거지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적군이든 아군이든, 원수든 친구든 여하간 너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므로 너 또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네가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모든 대상들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그렇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인줄 압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뜻을 늘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의 이웃을 그가 누구이든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주님앞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정말 엄격히 따지고 보면 주님 앞에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그런 거 다 묻어두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의 심령속에 이러한 사랑의 싹을 틔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그 방법론으로써 네 몸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잘 갈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소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어떤 허물과 죄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늘 이해하고 변명을 하고 용서를 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안하고서는 부득이해서, 너무 피곤해서,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바빠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라고 하면서 이해하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안 할때는 그것도 안한다고 비난을 합니다. 어떤 때는 안 할 말을 해놓고는 상대방이 그렇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같은 말을 할 때는 그래도 그렇지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하여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노하게 만들때는 그 분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를 않습니다. 앙금처럼 남아서 어디한번 두고보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배가 고프면 열심히 먹습니다. 목이 마르면 곧 물을 가져다 마십니다. 추우면 곧 옷을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선풍기를 틀어 줍니다. 피곤하면 곧 자리에 누어 쉬게 하고, 병나면 곧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줍니다. 무언가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그런 관심을 가지지 못합니다. 남이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남이 배고프고, 남이 병이나고, 남이 추울 때 내 몸에게 하는 것의 1/10만 해도 사실 아주 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네 몸을 사랑하고 돌보고 아끼는 그것만큼 남도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고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만큼 너도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평안을 누리고, 네가 사랑을 받고, 네가 즐겁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 그만큼 남에게도 평안을 누리게 하고, 사랑을 받게 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백퍼센트 우리가 다 실천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만 그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다만 애쓰는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다 연말연시다 하여 사회각계각층에서는 이웃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떤 방법이로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실시를 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4월부터 구제성금을 모금하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하여 굶주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매월 약3만여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지역에 있는 식사준비가 곤란한 가정에 매주 한번씩 반찬을 장만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정도의 상황이라면 이 정도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 우리 사회곳곳에는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개인적으로 그러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우리 교회적으로도 좀더 이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개중에는 그러지 않아도 농촌경제가 어려운데 남을 돕는 것이 그리 쉽겠느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도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미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농촌 생활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적으로도 여유도 없고, 미래적으로 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래도 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영적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림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기본적인 것 뿐만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는 문화적인 생활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도시에 돈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문화생활이랄것도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기본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염려할 만큼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휴대폰, 전화기, 텔레비젼, 냉장고, 컴퓨터, 비록 좋은 차는 아니지만 찬 한 대씩 굴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정도면 그래도 복받은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일년에도 수천만명이 되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보건소에 가서 약3일치 지어먹으면 깨끗이 나을 병인데 그런 기본적인 약조차도 없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그 정도만 해도 정말 잘먹고 잘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그 사랑을 정말 다시한번 깊이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놀랍도록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어떻게하면 그 사랑과 은혜를 더 의미있게 하고, 더 가치있게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해볼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말할것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상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일3: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습니다. 사랑은 실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저 공감이나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실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실제적인 사랑을 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실제적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성자를 주셨듯이, 독생성자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우리도 무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지고 나아갈때에만이 주님께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세상속에 적용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주는 곳에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받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는다는 것은 주는 것이 선행될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는 자가 없으면 받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주는 자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그렇습니다. 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주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다시한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되새기면서 주는 자의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주고, 은혜를 주고, 마음을 주고, 용서를 주고, 이해를 주고, 물질을 주고...... 하여튼 받는 자의 입장보다는 주는 자의 입장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실은 바로 내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나와 네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되새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런 주는 자의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우면서 늘 줄 수 있는 자의 입장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이 더욱 여러분 안에 충만하고 여러분을 통한 주님의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이땅위에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그리할대에 여러분 자신도 더욱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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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새해에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지나간 2018년은 정말 다사다난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2018년은 지나갔으니 작년 같은 어둠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원하며 2018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 2019년 첫 시간을 예배하며 맞이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첫 시간 나에게 주신 말씀은 잠언 12장 14절 말씀입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새번역: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복록에 족하다.”란 말은 “좋은 것으로 가득 차 만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좋은 말을 하면 복이 넘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에 말씀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우리 인간의 말에도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씨가 되어 언젠가 그 말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좋은 말을 하면 대개 그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
무심코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때로는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서윤석 목사님은 “언어는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인다. 생각이 밭이라면 언어는 씨앗이다. 좋은 생각에 좋은 말을 심으면 좋은 인생을 거둔다” 했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가 있고, 저주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축복도 들어오고 저주도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나의 입술에는 저주의 말이나 부정적인 말 대신에 긍정의 언어, 축복의 언어, 칭찬의 언어가 넘쳐나는 언어 사용을 생활화 하여야겠습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잠언 12장 14절 하반 절에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는 말씀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손이 심은 대로 거두며 손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손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 선을 행하는 데  쓰여질 수 있도록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시며 그 일을 가지고 축복도, 저주도 하십니다.
의인은 그 입의 진실한 말로 인하여 큰 만족을 얻지만 악인들은 불의한 이를 탐하고 말의 실수로 인하여  자신이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어떠한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언제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언제나 좋은 것으로 심고 좋은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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