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지옥과 천국>

Sermon on Friday Night Worship <Hell and Heaven>

 

 


천국과 지옥

누가복음: 16:19-31

 

인생은 선택과 준비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현재가 달라집니다.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뀝니다. 아인슈타인은 “10분 후와 10년 후를 보라”고 말합니다. 나의 10년 후를 상상해보셨습니까?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수많은 보험 상품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노후 준비와 관련된 상품이 많습니다. 노후 준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후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 준비’입니다. 옛 성인 한 분이 “이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일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정한 이치입니다. 성경은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삼하 14:14)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기에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주님 곧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봄으로, 우리 모두 천국에서 하나님과 행복하게 삽시다.

   

첫째, 천국은 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선포한 것이 천국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마 9:35)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천국을 예비하십니다(요 14:2). 천국은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천국은 가난과 질병이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도 없습니다. 죄와 사망도 없습니다. 성경은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더 중요한 사실은 천국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삽니다(계 21:3). 또한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예수님은 이 천국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장차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지금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눅 17:20-21).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우리 모두 천국을 소망하며 삽시다. 예수님을 모심으로 이 땅에서도 마음 천국으로 살아갑시다.

 
 

둘째, 지옥도 있다

 

혹시라도 “진짜 지옥이 있겠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옥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하나님이 설마 지옥에 보내겠어?”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진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반드시 지옥에 보내십니다(벧후 2:4). 우리는 결코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이 가는 곳입니다(마 25:41). 바깥 어두운 곳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고통 받는 곳입니다(막 9:48-49 계 20:15). 영원히 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지옥에 가서 후회하면 이미 늦습니다. 지옥에는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습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지옥은 영원한 사망만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예수님은 이러한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손발을 자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5). 인간은 죄인입니다. 아기들을 보십시오. 가르치지 않아도 미워하고 때립니다. 우리에게는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가 있습니다. 크든, 작든 죄는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냥 이대로 살면 누구도 예외 없이 지옥에 갑니다. 우리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야 합니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갈 길이 있습니다.
 

 

셋째, 천국 갈 준비가 됐나요

 

본문에 두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지옥에 간 부자가 간곡히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물입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부자는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고통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전도입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 가족만큼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경험해보니 지옥은 올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방법은 쉽습니다. 회개입니다! 회개란, 세상에서 죄짓고 방황하던 삶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를 지었어도 천국에 갑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고 먹보다 검을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은 용서하시고 천국을 주십니다(눅 23:42-43). 세상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천국에 가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천국 가는 것이 제일 큰 보화입니다. 천국은 세상 그 어떤 곳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문지기로 있어도 좋은 곳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찬양합니다. 천국에 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인생은 내일 일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약속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셔들입시다. 오늘 믿으면 천국은 우리의 것입니다. 성령까지 선물로 받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라고 약속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구원받아, 살아서도 천국을 누리고, 죽어서도 천국을 누립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천국을 주기 원하십니다. 천국을 주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합니다. 천국에 함께 갑시다. 천국에서 함께 삽시다. 천국이 행복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천국 갈 길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죽어서도 천국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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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금요저녁예배설교 /금요철야예배설교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로마서 3:1-2)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루려면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의 사명이란 밝은 세상을 만드는 것, 한 마디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착하고 의롭고 정직한 세상입니다. 빛의 열매가 그대로 나타나는 세상이 제일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물질문명이 발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이 되고 기름이 펑펑 나며 억대 부자가 되는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도시인 뉴욕을 멀리서 보면 백층 넘는 빌딩들이 있고 자유의 여신상 등이 보이는 등 참 멋집니다. 제가 뉴욕에 79년도에 처음에 가서 혼자 돌아다니고 UN본부, 자유의 여신상을 꼭대기까지 돌아다녔는데 참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서 제가 혼자 계신 백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제일 놀란 것은 멋지게 봤던 뉴욕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서울, 부산보다 더 지저분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지저분함에 너무 실망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뉴욕에 가난한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백인들은 뉴욕에서 1,2시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폭력, 마약 등 너무 죄악이 관영해서 아파트 값도 뉴욕에서 멀수록 비싼 것입니다. 세계적인 제일 첨단을 걷는다는 도시, 죄악이 관영하는 그런 곳이어서 불심판이 임하면 제일 먼저 임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세계의 돈이 다 모이고 예술가가 모여도 그런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뉴욕을 부러워할 것이 없이 부산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유명한 교회 목사님들도 우리 교회에 오시면 반해서 또 오시겠다고 하시고 참 좋아하십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경제, 물질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요새 잘 사는 사람은 잘 살아도 얼마나 사회가 부패했습니까! 얼마나 청소년들이 타락하기 쉽습니까! 지구상에 우리나라처럼 아파트마다 위성방송이 들어오는 곳은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다 타락시키려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도 특별히 돈을 줘야 위성파를 볼 수 있어서 웬만한 집은 볼 수 없습니다. 일본 역시 돈을 집어넣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수출이 11위정도 하는 대단한 나라인데도 더 잘 살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물질이 없어서 망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 백성이 어떤 국민이 되느냐 입니다. 거짓이 가득한 국민이 되는지 어떤 국민이 되느냐에 따라 살기 좋을 수도 지옥 같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되려면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려면 하나 더 교훈을 주는 것이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죄를 정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심으면 선을, 악을 심으면 악을, 의를 심으면 의를, 불의를 심으면 불의를, 정직을 심으면 정직을,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증오를 심으면 증오를, 남을 비판하면 비판받게 되고, 남을 정죄하면 정죄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왜냐하면 자신도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다 보면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 세상의 누가 남을 판단할 자격이 있고 남을 정죄할 자격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경에도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도 허물이 많았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믿음이 부족했겠지만 아내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해서 두 번이나 빼앗기는 것입니다. 부인은 두 번이나 남의 품에 안겨도 자신은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겁합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된다고 해도 하갈을 붙여주니까 못 이기는 척 이스마엘을 얻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도 허물이 많은 것입니다.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그렇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 임신시키고 그 남편은 죽이는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죄악 중 극악한 것은 다 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물론 주님을 몰랐던 때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때리는 등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하여튼 성경에 모든 인물을 봐도 저와 여러분을 봐도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죄와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을 받아야 마땅한 그런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이 어떻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까!

[교만한 사람이 남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양, 나는 마치 죄가 없는 의인인 것처럼 남을 판단하면 그 사람은 양심에 화인을 맞던지 교만함에 영안이 어두워진 사람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영안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면 자신의 죄와 허물은 안 보입니다. 왜 이 세상이 서로 욕하고 판단합니까?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어떻든지 남 흉보고 욕하고 판단하므로 세상이 골치 아픈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판단하면 그 사람은 입이 없습니까? 그 사람 역시 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교만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습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16:5)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시면 겸손하십시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잠 6:16-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의 첫 번째가 교만한 사람의 눈인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세상에서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내가 남보다 신앙생활 잘 할 때입니다. 남보다 기도 많이 할 때, 헌금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더 헌신할 때, 남보다 공부 잘하고 부자 됐을 때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조심하십시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가난하게 하셔서 지렁이 밟듯이 계속 밟으셨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밟으셔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렇게 밟으셨으니까 이만하지 안 그러셨으면 나같이 교만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교만한 줄 아시고 나를 짓밟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그 교만의 뿌리가 남아서 사람을 볼 때 판단합니다. 사람들을 볼 때 점수로 봅니다. 이게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내가 사람을 보는 것이 하나님이 보는 것과 같습니까? 제가 목사님을 볼 때도 평가를 하면서 고생 꽤나 하겠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게 미우셨겠습니까? 저는 그냥 사람을 보는 대로 판단한 것뿐인데 그것이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판단을 해서 그대로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바르게 올바르게 기도도 많이 하고 목회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를 판단하고 욕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참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어느 날 제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판단만하고 울어주지 않고 품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사랑이 없는 교만한 인간인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 때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어디로 가든지 욕을 먹는다고 합니다. 내가 교만한 순간에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욕을 먹는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교만한지 생각해보십시오. 교만이 있으면 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일을 잘 해도 좋은 일을 해도 욕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 16:18)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잠 15:25) 하나님이 하시면 다 망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벧전 5:5) 왜 교만한 자를 원수처럼 대적하시느냐?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려 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잠 14:3)

[교만한 자는 충고를 받지 않기 때문에 망합니다.]

교만한 자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망과 충고를 잘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잠 15:10-12)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망하고 죽는 길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누가 충고해주는 것을 잘 듣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칭찬해주는 사람만 좋아하지 않고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화가 나고 기분 나빠도 잘 참고 받아주는 것은 보약 중 보약이고 축복 중 축복입니다.
어떤 목사님을 헐뜯는 사람들이 그분의 여러 죄를 폭로하면서 괴롭혔는데 그 목사님은 반항도 싸우지도 않고 ‘나는 그것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하셨습니다. 그런 목사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의롭다고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그 어려움을 조금도 눈을 껌벅이지 않고 이기시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도 듣지 않아서 망합니다.]

교만한 자가 망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도 듣지 않아서입니다. 사람의 책망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도 망하고 하나님을 경고를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교만한 자가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들을찌어다, 귀를 기울일찌어다, 교만하지 말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5-17) 교만한 마음이 사람을 완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 줄 알고, 하나님이 없어도 살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백성이 그렇게 교만하게 살다가 나중에 사로잡혀서 죽을 것을 알고 괴로워하시는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항상 겸손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아니면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내가 죄인이라고 감사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압니다. 예를 들어서 병이 들었다가 나으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다가 나은 것이 감사합니까, 병이 안 드는 것이 감사합니까? 평소에 감사하십시오. 병에 걸려 수술하면서 아팠다가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겠습니까? 아예 병들지 않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도 많지만 기도하지 않고도 건강하고 밥 잘 먹고 소화하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소화가 안 돼서 약을 먹으면서 ‘건강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것보다 약 먹지 않고도 건강한 것을 감사하십시오. 손가락이 여섯 개가 아닌 것을 감사하십시오. 감사할 것이 정말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몸이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주일에 다섯 번씩 설교하는 것이 참 대단한데 저에게 사인이 옵니다. 그러면 저는 준비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고 내가 언제 천국 갈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합니다. 가슴이 아프고 할 때 ‘앗, 사인을 주시는구나.’ 하며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면 모든 욕심이 없어집니다.
자기 건강을 믿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보는 것, 귀가 들리는 것, 듣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듣게 해주신 것, 거저 주신 은혜와 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해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압니다. 자신이 제일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남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고백은 문학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 은혜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져서 자신의 약함을 알게 됩니다. 은혜 받으면 겸손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5:33)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이 세상에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시집가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너 없으면 못 사는 줄 알아?’하는 태도는 미련하고 가정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여자는 세상에 무엇이든 집에서는 겸손해야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어딜 가든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남자가 목숨 걸고 사랑해줄 것입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죄가 많고 허물이 많고 과거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내 죄와 허물을 알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만복의 근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항상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둘째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항상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 그래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보면 참 기쁘실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긍휼을 더 원한다는 것은 죄인끼리 싸우며 제사를 지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긍휼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5-37) 37절을 조금 바꾸면 비판하면 비판받고 정죄하면 정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너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원수 노릇하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원수에게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즉 좋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한 것처럼 우리도 자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같이 못된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판단, 정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과 그의 후손에게 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인데 친 아들같이 여겨서 늘 같이 한자리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다윗이 큰 죄를 범한 적이 있음에도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은 곧 주님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늘 죽이려고 따라다니던 그 원수.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던 원수가 죽었을 때, 통곡하며 크게 장사를 지내주고 그 자손들에게 선대했었습니다. 다윗이 한 번 실수를 해도 그의 죽을 때까지 삶은 너무 자비하고 인자하며 주님이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시 18:25) 사무엘하 22:26절에도 이 시편 내용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하신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도 문제가 있거나 직장에 문제가 있거나 여러분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시고 내 원수라도 사랑하고 선대하며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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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성공적인 기도생활  금요철야예배설교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3-24절)

 

[일평생 성공적인 기도의 생활을 하기는 힘듭니다.]

 

은혜 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마나 복되며 중요한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일평생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한 사람들을 참 찾기 힘듭니다.
사무엘과 같은 경우도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일평생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니엘도 매일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는 창문을 열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기도의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평생 성공적인 기도의 생활을 한 사람들을 찾기는 힘듭니다.
특별한 때에 특별히 기도해서 은혜받은 사람들은 많습니다. 야곱같은 경우도, 형 에서를 피해 얍복 강가를 지나가기 전, 특별히 기도해서 응답받지만 늘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했는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모세 역시 기도의 사람이지만 그가 일평생 기도생활을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그가 범죄하고 타락한 그때는 기도생활을 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다 응답받고 14만 4천명의 앗수르 군사가 다 죽어 전쟁도 하지 않고 이기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죽을 고비에서는 하나님께서 15년 생명을 연장해주시는 응답도 받지만 일평생 기도생활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므낫세와 같이 타락한, 가장 우상 숭배를 많이 한 왕도 특별한 때에 기도해서 응답받습니다. 그러나 일평생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엘리야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지만 낙심되어서 도망간 적도 있습니다. 에스더 역시 자신의 민족이 죽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기도해서 응답받지만 일평생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평생 기도생활을 성공하지 않아도 특별한 때에 기도해서 응답받은 사람은 이 자리에 많습니다. 그러나 일평생 기도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확실한 것은 첫째로, 기도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하려면 우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적이든 아니든 우선 기도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듯 날마다 자기 아버지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놀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믿고 했던 기도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아침 식사시간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점심 먹을 때 기도했는데 눈을 뜨니까 도시락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은 아주 기념이 되어서 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자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는 너무 겨울이 추운데 판자로 만든 집이어서 바람이 불면 얼마나 추운지 몰랐습니다. 우리 집만 따로 서있어서 사방에서 바람이 들어와서 큰 솜이불을 덥고 잤습니다. 자기 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을 모으고 기도하면 몸에 땀이 날 정도로 열이 났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좀 더 기도가 발전하고 성장해서 아침과 식사 때와 잘 때에 기도하지만 특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학교 갈 때도 기도하고, 학교 다녀와서 저녁 먹고 다시 가서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기도해야 할 것이 생기면 철야기도도 했습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졸곤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1. 기도 중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도가 길든지 짧든지, 잘했든지 못했든지, 계속 기도하는 중에 종종 은혜를 받았습니다. 항상 기도를 잘 하고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무릎을 꿇고 잠깐 기도하고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올 땐 여유가 있으니깐 좀 더 기도를 오래했습니다. 그렇게 짧게 혹은 길게 항상 기도생활을 하니까 어느 날에는 눈물이 나면서 기도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한 시간, 두 시간도 기도했습니다.

 

2. 기도 중에 기도생활이 성숙해집니다.
두 번째로는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내 기도생활이 성숙해졌습니다.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 역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3. 기도 중에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를 너무 기뻐하신다는 깨닫습니다.
세 번째로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은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죄인이라도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0-20)
우리가 너무 죄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이 기도해도 듣지 않고 손의 피가 가득한 것을 회개해야 듣겠다고 하시면서도 18절에 죄인들을 향해서 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4. 기도 중에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계속 기도하는 중에 깨달은 것은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받는 하나님의 축복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의 우편강도입니다. 그 사람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몇 시간 동안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나를 기억해주옵소서.’라고 제대로 한 기도도 아니었지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하는 자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은혜를 받게 되면 막 죄악이 떠오르고 마음을 쑤십니다. 그래서 진짜 회개는 성령의 은혜 중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회개는 생각나는 대로 하지만, 진짜 회개는 성령의 은혜 가운데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밤새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중에 고향에 왔는데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회개가 되고 기도가 터져나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부흥회를 한 주씩 했습니다. 같이 밥도 먹고 교회에서 자곤 했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끝날 때까지 변소 가는 것을 빼고는 울면서 몸부림치면서 회개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개할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기도하면 소망이 있고 살 길이 있고 회복이 됩니다. 그리고 오뚝이와 같이 일어나고 결국 은혜 받게 되고 축복받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에 있어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체면도 염치도 차리지 말고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성공하는 비결은, 첫째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고 구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도생활에 성공하는 비결은 믿고 구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1. 하나님은 지금 계시며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하는 믿음의 첫째는 하나님은 지금 계시며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시고 기도하고 부르십시오.

2.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왕의 자녀가 되도 굉장한 권세가 있습니다. 옛날 왕의 자녀라는 것은 대신들도 벌벌 떠는 그런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권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세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믿지도 않아서 우리가 나약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막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3.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받는다는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해서 기도하면 다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살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당당히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저주에서 속량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사함 받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절대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받아야 하는 심판을 예수님이 다 십자가에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 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천국시민이 됐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공로를 의지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응답받는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1:13-14)

4.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언약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언약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불가능한 것이 없고 언약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약속대로 된다는 믿음과 능히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5.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했을 때 예수님께서 시행하시는 목적은 아들로 인하여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짖으면 위기에서 구해주시고, 환난에서 구해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간증합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대로 되든지 더 잘 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기도생활에 성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 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만큼 희생하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원해서 순종하고 하나님 뜻대로만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주일학교 봉사를 해달라고 했더니 회사가 너무 바쁘다면서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고 핑계를 대고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주일 예배 1시간 드리는 청년이 애인이 생기자 그렇게 바쁘다는 청년이 밤12시까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교회 가는 것은 바쁘고 피곤해서 교회를 잘 안 나가고 봉사도 안 하는데 애인이 생기니까 피곤이고 바쁜 게 다 없어지고 정신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 중직자 중에도 예배 한 번만 드리고 예배시간도 힘들어하고 기도도 형식적이며 봉사도 바빠서 안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하나님 앞에 열심히 봉사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사랑의 상처가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4번째 딸인데 집안에서 딸만 자꾸 낳으니까 그 딸이 태어나자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 나던지 젖을 안 주고 차가운 방 한구석으로 밀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애가 며칠을 젖을 안 줘도 죽지 않고 질기게 살아있어서 할 수 없이 젖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밀로 해야 하는데 누가 이야기를 해서 그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왜 엄마가 나를 낳았는지, 그 엄마는 자신의 원수가 되어서 독을 품기 시작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가집니다. 학비도 안 주고 밤낮 술먹고 때려 부수기 때문입니다. 또 여자들 중에는 남편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지만 남편들 역시 아내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또 연로하신 분들은 자식으로부터 상처가 있는 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키웠는데 부모님에게는 용돈도 전혀 없어서 섭섭하고 상처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너무 거리를 두고 다른 것에 몰두해서 하나님도 사랑의 상처를 가지고 계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세상 것에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최대의 관심이 우리 마음 중심인데 도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밤에 기도하실 때 이 문제를 놓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그래서 그 상처를 싸매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성숙할수록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집니다. 그 사람의 기도가 얼마나 성숙한가는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세게 오래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으로 변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지가 문제가 아니고, 유창하게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느냐 얼마나 오래 금식기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기도시간이 길어지고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닮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죽게 된다 해도 다니엘같이 순교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기도하게 될 줄 미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받는 축복]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큰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새 사람으로 변하고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거룩한 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시간이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어떤 문제로 기도하든지 중요한 것은 내 중심에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성공적인 기도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성공적인 기도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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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금요저녁예배설교 - 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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