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삶]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방법
 

1.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한다.

   세상에 많은 주제들이 있고 마음을 끌고 유혹하는 것들이 많을지라도 다 다루지도 말고 마음이 끌리지도 말려면 먼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제 일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한다.

 

2.  말씀과 기도를 하루에 아침에 한 시간 이상 한다.

  말씀은 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의 임재가 있도록 하는 것을 목 표로 한다. 하나님앞에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성경연구와 간구의 시간은 따로 연장하여 갖도록 한다.

 

3.  말씀충만은 성령충만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 의로운 삶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데 이 삶이 성령충만을 유지하고 다시 받는 최적의 조건이다.

고넬료의 성령받은 사건을 생각할 것. 예수님을 전할 때에 의인이었던 고넬료는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을 받는다.

 

4. 날마다 말씀을 양식으로 먹으라.

먹지 않고 지내는 날이 없도록 하라.

 

5.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회개하고 이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우리는  정결하여지고 그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선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의 대가이다. 선물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6. 언제나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성령의 역사속으로 들어간다.

성령의 다스리심안으로 들어간다.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고 열매맺게 된다.

 

이때에 성령의 주시는 방언을 하게 되는데 계속 방언을 한다.

이는 중보기도로서 마땅히 제사장이 해야하는 기도인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하였다. 이는 제사장으로서는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죄가 되는 것이다.

6.1 몸이 아픈 곳에, 무거운 곳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치유안에 거하라. 우리는 몸과 영과 혼이 다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7. 타인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라.

기도할 때에 타인이 생각나거든 그를 위하여 충분히 기도한다. 마음속에 되었다 할 때까지 기도한다.

 

8.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죄의 종이 되면 즉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를 헌신한다. 재헌신하는 것이다. 이는 죄를 지으면서 나를 죄의 종으로 내가 주었기 때문이다.

 

9. 평안과 기쁨을 확인하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내가 임하여 있다는 증거이다.

 

평안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이며 기쁨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증거이다. 이때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잘 될 것이다.

 

 

10. 시대를 분별하라.

유혹케 하는 것과 귀신의 가르침이 횡행하는 시대이다. 교회의 부정적 운명론에 빠지지 말라.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고 잘못된 것이다.

 

10.1  이제는 전도를 하는 시대가 아닌 닫힌 문의 시대라고 하는 자들도 있다. 개척교회가 너무 어렵기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환란 때에 교회가 고통을 당한다고만 주장하는 이들은 너무 부정적이다. 교회는 승리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10.2  교회의 통합을 말하면서 혼합주의 정책을 쓰는 것은 사단의 전술이다. 1년 전인가 2005년 세계일보에 “내 것 고집버려야 종교갈등 치유“라는 기사의 글이 실렸는데 어떤 신부가 종교혼합정책을 쓰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성당에 봉축 연등을 내걸고 108배 행사를 갖는 등 대거 고산성당 정 홍규 (51세) 신부의 종교간 벽 허물기 노력이 보도된적이 있다. 그는 대구 지하철 참사희생자를 위하여 장승굿을 치르기 위하여 승려와도 만났다고 하는 신부이다.  이것은 귀신들린 행위밖에는 안된다.

 

성경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십계명에 나온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안에서나 하는 이야기지 그런 구태의연한 소리 하지 마쇼“라고 세상은 말한다. 그렇다. 세상은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고 타종교라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임이 분명하지 않는가? 당신이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구분은 당연히 되어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엄청 잘못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신부는 굿까지 하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뒤에 사단과 귀신의 세력이 주장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굿을 하자고 찾아다니는 것은 끌려다니는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는 못하고 오히려 이미 첩자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내 것을 가지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외쳐야 하며 그것으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의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면 목숨을 걸어도 되지만 말씀의 정확한 해석이 없다면 목숨을 걸라고 해도 걸 확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신교 안에서도 이러한 구분이 없고 유야 무야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최근 2005년 8월 옥 한흠 목사님이 승려를 만났다고 한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성경해석이 부족하여 잘못 말한 것이 있다고 하자.(휴거의 시기에 대하여도 말한 바가 있다가 취소함.)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고 올바르게 가르친다는 소문이 난 옥한흠 목사님이 대화를 하기 위하여 승려를 초빙하였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면  옥 목사님은 당연히 구원의 문제부터 짚고 나가야 한다. 사회의 정화나 이런 문제를 같이 논의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혼합주의는 배타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라 정결한 삶의 반대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신 신앙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신앙의 어떤 노력이나 방식으로 취득하지 않는다.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올바로 할 때에 나를 헌신할 때에 종으로 드릴 때에 목숨을 바칠 때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11.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라.

오늘날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주제들이 있다. 배울 것, 볼 것, 구경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하여 그분과의 교제를 가장 중요시하고 실제적으로 교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맛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단순하고 맹목적이라고 사람들이 말할지 몰라도 최소한 맹목적인 것은 아니다. 눈감은 장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한 것은 좋은 것이다. 성령 안에서만 거하라. 그것이 답이다.

 

말씀대로 믿어라. 사단은 이제 세부적으로 이래 저래 말씀을 안 믿고 부정하고 의심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정확히 해석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12. 교회와 사역자는 신앙안에서도 잘못된 것들은 다 구별하고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부흥을 말씀하시는데 해골조차 살리신다.  이때에 하나님은 에스겔 44장에서 제사장들을 다시 세워주시고 교육하시는데 그중에 부과된 것이 다음이다.

 

에스겔

44: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1) 거룩과 속된 것을 구별하라.  : 거룩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속된 것은 피조물의 세계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며 그분을 거룩히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되는 대로 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면 전부라는 생각을 떠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것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위임명령에 포함된 것이다.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으니 세상이 갈 길을 몰라 죄악속에서 헤미이는 것이다.

 

2)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부정하게 사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부정은 정결하지 않은 곧 더러운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씻고나서 그는 정결하게 되어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고 그렇게 하여 그는 성령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모든 부정한 생각을 버리고, 부정한 영(귀신)을 쫓아내고 부정한 영상들을 버리고 부정한 행위와 습관들을 버리고 의롭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13.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삶을 유지하라.

계시록 14장의 144000의 기준이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는데 또한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만을 말하는 것이다.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고 우상숭배의 하나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이 말을 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안에서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진리를 듣게 된다.

다 같이 한 사회, 행복한 나라를 위하여 사는데....... 라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가 아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싸우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회개할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것이다.

 

 

14. 나의 약점을 보강하고 약점 때문에 넘어지지 않게 하라.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 자기가 죄를 짓지 귀신이 원인이 아니다. 귀신과 사단은 유혹을 하지만 사실상 죄를 짓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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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기쁨으로 찬양

제목 : 기쁨으로 찬양합시다.

말씀 : 시47:1-9

1.찬양의 은혜

어떤 목사님이 중국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다. 물론 중국에는 공식적인 선교사로 파송될 수는 없지만 비공식적으로 지하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다.

이 선교사가 중국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준비찬송을 드리는데 놀랍게도 복음성가가 100절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중국 지하교회에는 2단정도의 짧은 찬송으로 몇십절까지 있는 것도 있고 100절까지 있는 것도 있다고 한다. 2단으로 100절이면 총200단이므로 우리 복음송 같으면 약12곡쯤 되는 분량이다.

이 찬송을 부르는데 1절부터 시작해서 10절, 20절, 30절, 50절, 60절, 70절해가면서 모조리 다 부르더란다. 선교사님은 솔직히 자신과 잘 맞지도 않고 너무 길어서 좀 지루했지만 목사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지루하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해서 내색은 못하고 끝까지 다 따라 불렀다. 그렇게 100절까지 부르니까 약35분 정도가 걸렸다.

이렇게 한곡이 끝나자 찬양인도자가 멘트를 시작하는데 약10분정도를 하더란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도하심 등등에 대하여 약10분정도 멘트를 하더니만 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우리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좀전에 불렀던 찬송을 다시한번 뜨겁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정말 다시 100절까지를 부르더란다. 그렇게 2시간동안 찬양을 하더니 겨우 예배를 시작하더란다.

선교사님은 처음에는 지루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들과 함께 뜨겁게 다시 100절까지 부르는 동안 점차 그의 심령이 뜨거워지면서 드디어 위로부터 내려오는 뜨거운 성령의 임재하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 사실 찬송 부를 때 내 심령속에 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지루할 수도 있다. 또 때로는 나와는 잘 맞지 않는 찬양도 있을 수 있다. 때로는 내 기분이 좀 가라앉아 있어서 은혜를 잘 못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뜨거운 은총을 간구하며 더욱 뜨겁게 찬양해야 한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갈급한 심령으로 구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은혜를 주신다. 은혜를 받으면 말씀이 꿀맛처럼 달아지고 찬양하는 시간이 세상의 어떤 시간보다 즐겁고 기쁘다.

시107:9절을 보라.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그러므로 더욱 열심히 그리고 뜨겁게 기도하며 찬양하며 말씀 묵상하며 살아갈때에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은혜의 충만함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찬양의 이유

물론 찬양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아니 우리는 무조건 찬양해야 한다. 찬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43:21절을 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무조건 찬양해야 한다. 찬양을 목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찬양해야 한다. 따라서 열심히 찬양하는 자는 은혜를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에 충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2,4절에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찬양해야 할 마땅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먼저 2절을 보면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온땅의 큰 임군이란 곧 왕중의 왕이라는 말이다. 왕중의 왕으로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절대적인 주권으로 운행하시는 지존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전능의 하나님, 그 신비한 능력으로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어찌 찬양 안하랴! 그 능력과 지혜앞에 어찌 찬양 안하겠는가!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아는 자의 마땅한 태도이다. 그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는 피조물을 올바른 응답인 것이다.

4절에서는 우리가 찬양해야 할 다른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즉 우리를 택하시어 당신의 기업으로 삼아 주셔서 야곱의 영화 곧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누려야 할 영화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찬양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그 권능과 지혜앞에 찬양해야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택하시어서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남들보다 더 잘 난 것도, 똑똑한 것도, 더 잘하는 것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주권과 그 한량없는 사랑하심과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려야 할 그 영화에 참여케 해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 찬양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누가 나를 위하여 죽어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설령 누군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다 한들 누가 나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겠는가? 누가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부랑아를 받아 주겠는가? 그것도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면서......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온 몸이 찢기신 것이다. 왜?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것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러니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정녕 정상적인 감정과 이성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기억할때에 어찌 감격과 기쁨과 감사속에서 찬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3.찬양의 방법

오늘 말씀 1절에서는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며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우리의 온 몸을 동원해서 찬양하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손바닥을 치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손뼉만을 치라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손뼉을 치며, 때로는 춤을 추며, 때로는 정말 애통해하며, 때로는 통곡을 하며 자기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150:4절에서는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7절에서는 지혜의 시로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물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과 은혜와 사랑을 알고 거기에 합당한 영광을 찬양을 통해서 돌리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하나님의 그 권능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하심과 은혜를 안다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우리의 심령속에 사무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정말 때로는 어린아이가 가장 갖고 싶어하던 것을 얻었을 때와 같은 기쁨으로 손뼉을 치며 찬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마땅한 도리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자의 마땅한 태도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마땅한 의무요, 동시에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자. 정말 온몸으로 찬양해보자. 춤을 추어 찬양하고, 손뼉치며 찬양하고, 기뻐하며 찬양하고, 때로는 애통하며, 때로는 정말 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찬양하자. 이러한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돌려 드리자.

그러면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성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위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칠 것이다.

그까짓 노래방가서 노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보약 열재 먹는 것보다도 낫다. 스트레스도 확 달아난다. 마귀도 달아난다. 근심걱정도 달아난다. 속에 맺혀 있던 것도 달아난다.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물리치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오늘 가족찬양대회를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고, 찬양을 통해서 은혜받고, 찬양을 통해서 사랑을 나누고, 찬양을 통해서 힘을 얻고...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힘찬 찬양생활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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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째주일 대강절 주일예배 설교 (Preaching of the Advent)  


 


 
말씀 : 마22:34-40

제목 : 사랑의 계절

벌써 2003년도의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고, 그 한 장 남은 달력도 절반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우리는 이맘때쯤 되면 웬지모를 숙연함을 느끼며 다시금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실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무상하게 지나간 세월속으로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더듬어 보며 또다시 우리앞에 펼쳐질 시간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성탄절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언제나 그랬듯이 거리에는 웬지모를 흥분감마져도 감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약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오셨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과 가난과 질병과 미움과 저주와 온갖 압제 속에서 시달리는, 그래서 결국은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생명과 평화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정말 무지하고 죄된 인생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모든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셨고 생명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오늘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가운데 주님과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죄되고 무지한 인생들, 저주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생명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참 자유와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은 그저 단순히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물론 그 역사적 사실도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 왜 우리는 그분을 영접해야 하고, 영접했다면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 어떻게 주님의 뜻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는 먼저 주님을 내 심령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 가정과 교회속에 새롭게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나와 내 가정과 내 교회속에 주실 그 생명과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는 일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계신 그 주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으로 이 땅위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에 성탄절의 의미는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구원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땅에 실현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러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생명의 역사와 사랑의 역사를 구체화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관심이나 이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의 현실속에 구체화시킬 때 그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이 있고, 관심이 있고, 이해가 있고, 공감을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체적, 현실적으로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생자 예수께서 현실의 세상속에 오셨고, 또한 그분도 십자가의 처형을 실제적으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체적 현실적으로 부활하셔서 무덤문을 열고 나오셨고, 실제적으로 40일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현실적으로 승천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가 받은 바 은혜와 사랑들을 구체적, 실제적으로 현실에 적용할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말입니다. 관념적인 사랑, 그저 생각으로만 공감하는 사랑, 그저 이해나 하고 있는 사랑,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절은 말할것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와 영광과 축하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기 이전에 주님의 뜻을 살펴야 되는데 그것은 물론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래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주님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물론 사랑입니다. 주님은 인류를 향한 나를 향한 그 애특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랑 때문에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곳에 오셔서 날 위해 죽으셔서 내게 생명을 주신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게 두가지의 중요한 커다란 계명이 있는데 먼저는 우리의 생명을 다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들을 하고 계시지만 결국은 이 두가지로 결론이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론 먼저 첫 번째의 말씀 즉 왜, 어떻게 우리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보아야 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두 번째 주제 즉 우리의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겠습니까? 내 가족입니까? 내 옆집에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 동네 사람입니까? 안동권씨다 진성이씨다 하는 종씨입니까? 아니면 녹전면민입니까? 아니면 대한민국 국민입니까? 물론 좋습니다. 다 나의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이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혈연, 지연, 학연 다 초월해서 여하튼 너와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흑인이든 백인이든, 전라도 사람이든 경상도 사람이든, 안동 권씨든 진성 이씨든, 서울 대학 졸업자든 녹전초등학교 출신이든, 대통령이든 거지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적군이든 아군이든, 원수든 친구든 여하간 너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므로 너 또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네가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모든 대상들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그렇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인줄 압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뜻을 늘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의 이웃을 그가 누구이든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주님앞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정말 엄격히 따지고 보면 주님 앞에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그런 거 다 묻어두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의 심령속에 이러한 사랑의 싹을 틔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그 방법론으로써 네 몸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잘 갈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소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어떤 허물과 죄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늘 이해하고 변명을 하고 용서를 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안하고서는 부득이해서, 너무 피곤해서,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바빠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라고 하면서 이해하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안 할때는 그것도 안한다고 비난을 합니다. 어떤 때는 안 할 말을 해놓고는 상대방이 그렇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같은 말을 할 때는 그래도 그렇지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하여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노하게 만들때는 그 분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를 않습니다. 앙금처럼 남아서 어디한번 두고보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배가 고프면 열심히 먹습니다. 목이 마르면 곧 물을 가져다 마십니다. 추우면 곧 옷을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선풍기를 틀어 줍니다. 피곤하면 곧 자리에 누어 쉬게 하고, 병나면 곧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줍니다. 무언가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그런 관심을 가지지 못합니다. 남이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남이 배고프고, 남이 병이나고, 남이 추울 때 내 몸에게 하는 것의 1/10만 해도 사실 아주 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네 몸을 사랑하고 돌보고 아끼는 그것만큼 남도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고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만큼 너도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평안을 누리고, 네가 사랑을 받고, 네가 즐겁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 그만큼 남에게도 평안을 누리게 하고, 사랑을 받게 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백퍼센트 우리가 다 실천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만 그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다만 애쓰는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다 연말연시다 하여 사회각계각층에서는 이웃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떤 방법이로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실시를 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4월부터 구제성금을 모금하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하여 굶주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매월 약3만여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지역에 있는 식사준비가 곤란한 가정에 매주 한번씩 반찬을 장만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정도의 상황이라면 이 정도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 우리 사회곳곳에는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개인적으로 그러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우리 교회적으로도 좀더 이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개중에는 그러지 않아도 농촌경제가 어려운데 남을 돕는 것이 그리 쉽겠느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도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미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농촌 생활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적으로도 여유도 없고, 미래적으로 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래도 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영적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림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기본적인 것 뿐만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는 문화적인 생활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도시에 돈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문화생활이랄것도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기본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염려할 만큼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휴대폰, 전화기, 텔레비젼, 냉장고, 컴퓨터, 비록 좋은 차는 아니지만 찬 한 대씩 굴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정도면 그래도 복받은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일년에도 수천만명이 되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보건소에 가서 약3일치 지어먹으면 깨끗이 나을 병인데 그런 기본적인 약조차도 없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그 정도만 해도 정말 잘먹고 잘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그 사랑을 정말 다시한번 깊이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놀랍도록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어떻게하면 그 사랑과 은혜를 더 의미있게 하고, 더 가치있게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해볼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말할것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상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일3: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습니다. 사랑은 실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저 공감이나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실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실제적인 사랑을 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실제적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성자를 주셨듯이, 독생성자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우리도 무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지고 나아갈때에만이 주님께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세상속에 적용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주는 곳에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받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는다는 것은 주는 것이 선행될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는 자가 없으면 받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주는 자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그렇습니다. 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주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다시한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되새기면서 주는 자의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주고, 은혜를 주고, 마음을 주고, 용서를 주고, 이해를 주고, 물질을 주고...... 하여튼 받는 자의 입장보다는 주는 자의 입장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실은 바로 내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나와 네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되새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런 주는 자의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우면서 늘 줄 수 있는 자의 입장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이 더욱 여러분 안에 충만하고 여러분을 통한 주님의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이땅위에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그리할대에 여러분 자신도 더욱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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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저녁 예배 기도문  주일오후예배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저녁에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항상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아니함으로 성별된 생활을 지속하게 하
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패역해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
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예배를 은혜롭게 하시며, 말씀을 전하
는 목사님과 듣는 자가 다 성령에 이끌리게 하시고, 감화되게 하옵소
서. 마지막 때에 더욱 모이기를 힘쓰게 하여 주사 우리들의 신앙이
더욱 성숙되게 하심으로 세상과 이웃에게 모범적인 삶이 되게 하옵
소서 .

    하나님 아버지! 남의 실수나 허물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비평할줄
알면서,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우리를 용서하옵소서. 이
제는 내 자신의 신앙성숙을 위해 자기 관리에 엄격하고 냉정하게 하
시며, 이웃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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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밤 찬양 예배] 기쁨으로 찬양합시다 (Let's praise with joy)

 

 


제목 : 기쁨으로 찬양합시다.

말씀 : 시47:1-9

1.찬양의 은혜

어떤 목사님이 중국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다. 물론 중국에는 공식적인 선교사로 파송될 수는 없지만 비공식적으로 지하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다.

이 선교사가 중국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준비찬송을 드리는데 놀랍게도 복음성가가 100절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중국 지하교회에는 2단정도의 짧은 찬송으로 몇십절까지 있는 것도 있고 100절까지 있는 것도 있다고 한다. 2단으로 100절이면 총200단이므로 우리 복음송 같으면 약12곡쯤 되는 분량이다.

이 찬송을 부르는데 1절부터 시작해서 10절, 20절, 30절, 50절, 60절, 70절해가면서 모조리 다 부르더란다. 선교사님은 솔직히 자신과 잘 맞지도 않고 너무 길어서 좀 지루했지만 목사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지루하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해서 내색은 못하고 끝까지 다 따라 불렀다. 그렇게 100절까지 부르니까 약35분 정도가 걸렸다.

이렇게 한곡이 끝나자 찬양인도자가 멘트를 시작하는데 약10분정도를 하더란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도하심 등등에 대하여 약10분정도 멘트를 하더니만 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우리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좀전에 불렀던 찬송을 다시한번 뜨겁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정말 다시 100절까지를 부르더란다. 그렇게 2시간동안 찬양을 하더니 겨우 예배를 시작하더란다.

선교사님은 처음에는 지루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들과 함께 뜨겁게 다시 100절까지 부르는 동안 점차 그의 심령이 뜨거워지면서 드디어 위로부터 내려오는 뜨거운 성령의 임재하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 사실 찬송 부를 때 내 심령속에 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지루할 수도 있다. 또 때로는 나와는 잘 맞지 않는 찬양도 있을 수 있다. 때로는 내 기분이 좀 가라앉아 있어서 은혜를 잘 못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뜨거운 은총을 간구하며 더욱 뜨겁게 찬양해야 한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갈급한 심령으로 구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은혜를 주신다. 은혜를 받으면 말씀이 꿀맛처럼 달아지고 찬양하는 시간이 세상의 어떤 시간보다 즐겁고 기쁘다.

시107:9절을 보라.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그러므로 더욱 열심히 그리고 뜨겁게 기도하며 찬양하며 말씀 묵상하며 살아갈때에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은혜의 충만함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찬양의 이유

물론 찬양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아니 우리는 무조건 찬양해야 한다. 찬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43:21절을 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무조건 찬양해야 한다. 찬양을 목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찬양해야 한다. 따라서 열심히 찬양하는 자는 은혜를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에 충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2,4절에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찬양해야 할 마땅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먼저 2절을 보면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온땅의 큰 임군이란 곧 왕중의 왕이라는 말이다. 왕중의 왕으로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절대적인 주권으로 운행하시는 지존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전능의 하나님, 그 신비한 능력으로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어찌 찬양 안하랴! 그 능력과 지혜앞에 어찌 찬양 안하겠는가!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아는 자의 마땅한 태도이다. 그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는 피조물을 올바른 응답인 것이다.

4절에서는 우리가 찬양해야 할 다른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즉 우리를 택하시어 당신의 기업으로 삼아 주셔서 야곱의 영화 곧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누려야 할 영화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찬양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그 권능과 지혜앞에 찬양해야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택하시어서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남들보다 더 잘 난 것도, 똑똑한 것도, 더 잘하는 것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주권과 그 한량없는 사랑하심과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려야 할 그 영화에 참여케 해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 찬양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누가 나를 위하여 죽어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설령 누군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다 한들 누가 나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겠는가? 누가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부랑아를 받아 주겠는가? 그것도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면서......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온 몸이 찢기신 것이다. 왜?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것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러니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정녕 정상적인 감정과 이성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기억할때에 어찌 감격과 기쁨과 감사속에서 찬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3.찬양의 방법

오늘 말씀 1절에서는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며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우리의 온 몸을 동원해서 찬양하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손바닥을 치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손뼉만을 치라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손뼉을 치며, 때로는 춤을 추며, 때로는 정말 애통해하며, 때로는 통곡을 하며 자기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150:4절에서는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7절에서는 지혜의 시로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물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과 은혜와 사랑을 알고 거기에 합당한 영광을 찬양을 통해서 돌리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하나님의 그 권능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하심과 은혜를 안다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우리의 심령속에 사무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정말 때로는 어린아이가 가장 갖고 싶어하던 것을 얻었을 때와 같은 기쁨으로 손뼉을 치며 찬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마땅한 도리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자의 마땅한 태도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마땅한 의무요, 동시에 특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자. 정말 온몸으로 찬양해보자. 춤을 추어 찬양하고, 손뼉치며 찬양하고, 기뻐하며 찬양하고, 때로는 애통하며, 때로는 정말 통곡을 하며 하나님께 찬양하자. 이러한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돌려 드리자.

그러면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성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위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칠 것이다.

그까짓 노래방가서 노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보약 열재 먹는 것보다도 낫다. 스트레스도 확 달아난다. 마귀도 달아난다. 근심걱정도 달아난다. 속에 맺혀 있던 것도 달아난다.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물리치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오늘 가족찬양대회를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고, 찬양을 통해서 은혜받고, 찬양을 통해서 사랑을 나누고, 찬양을 통해서 힘을 얻고...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힘찬 찬양생활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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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주일낮예배설교 ( 보배로운 믿음 )


 

 
 


제목 : 보배로운 믿음

말씀 : 벧후1:1~4

 

베드로 전서

A.D.64년경.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 핍박 시작. 아직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거류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에 대비해 믿음으로 이겨 나갈 것을 권면. 우리는 산 소망이 있는 자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잠깐 근심 할 수 밖에 없지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 오직 주의 말씀만 영원함.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그러기에 거짓 것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해야 함으로 오히려 더 많은 고난과 핍박.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기꺼이 고난 받을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표로써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줘 승리할 것.

그렇다.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세상.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세상. 나도 세상도 다 죄와 무지와 어둠. 끊임없는 죄와 유혹과 핍박과 도전.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도.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이므로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가야.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깨어 근신해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

 

베드로 후서

베드로가 두 번째 보낸 서신. 베드로전서를 보낸 뒤 3,4년 뒤에. 네로의 핍박이 더욱 가중되던 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 발생. 어느 정도 견디다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배교하기도.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 곧 오실 줄 알았던 주님이 오시지는 않고 핍박만 가중되자 낙심하는 사람들.

이에 베드로사도는 다시 서신을 보내어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으니 믿음을 굳게 지킬 것. 믿음으로 인내 할 것.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듯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가지 말라.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기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킬 것을 강조.

우리도 정말 조심해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우리들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왜곡된 가치관에 속지 말아야. 마귀 사탄은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환난과 핍박으로 때로는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거짓된 사상으로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함. 깨어 있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오직 그것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그러려면 참고 기다려야.

오늘 말씀. 송신자와 수신자. 축복 기도. 성도의 정체성 상기.

1.송신자와 수신자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 송신자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소개.

종은 dou'lo"로 노예라는 뜻. 완전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 주인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자. 주인의 뜻을 헤아려 준행하며 그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자.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 동시에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

우리는 완전히 주님께 종속되어 주님의 수족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존재. 종은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생각도 오직 주인의 것. 주인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주님은 완전한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 뜻대로 살아갈 때 최고의 가치, 의미, 복, 은혜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

 

사도는 ajpovstolo"로 ‘보냄을 받은 자’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관리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주어진 자리에서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주신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그 가운데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도록. 그러나 세상 사람은 몰라.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거기다 한가지 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은 자.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자.

2)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 수신자

베드로는 수신자들의 신분 또는 정체성을 상기시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 즉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그들이 얼마나 굉장한 사람들인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상기시킴, 즉 귀한 믿음의 소유자답게, 그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답게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의와 진리와 선 가운데 귀한 삶을 살라는 것.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얻게 됨. 그러므로 이 보배로운 믿음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면 안돼. 환난과 핍박이 와서 설령 육체의 생명은 잃은 망정 이것만은 잃어서는 안돼.

당연하지 않나? 믿음보다 큰 보배가 어디 있는가? 무엇이 믿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겠나?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영광을 가져다주겠나?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것은 다 잃어봤자 별거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잃으면 끝장. 영원히 끔찍한 고통.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또 마13:44절에서 말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큰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가장 큰 보배를 가진 자들임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게 조금이라도 믿음을 팔아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오직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원하고도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2.축복기도

벧후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모든 서신서의 서두와 종결 부분에서 계속 말씀했던 내용. 여기서는 두 가지를 강조. 첫째는 인생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 둘째는 그 복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가? 물론 인생의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이 복의 근원. 그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섬길 때 은혜와 평강. 인생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누리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과 위로와 소망도 오직 하나님이 주실 때 가능. 세상의 돈과 명예와 물질과 지식도 어느 정도 우리 삶에 유익이 되나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은혜는 하나님을 앎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알 때 믿게 되고 믿을 때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구해야. 그러려면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주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주님의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찾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라가기보다 주님을 찾자. 겸손히 엎드리자. 주님을 사모하자.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의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심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여기서 생명이란 하나님이 본래 주셨던 기쁨과 은혜와 복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영원토록 조금도 부족함 없이 완전히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물론 이것은 신기한 능력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이다. 우리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완전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것.

경건이란 그런 완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 생명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본질적인 정체성. 경건은 온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외견적인 모습. 그런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렇게 생명을 가진 자로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모든 은혜들을 주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특혜이고, 외견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삶의 모습. 그러므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답게 특별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과 야합하거나 타협하거나 끌려 다니지 말고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존귀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험하고 혼탁하고 왜곡된 세상에 끌려가지 말자. 이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주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자.

4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됨.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로써’ 라는 것은 3절의 자기 영광과 덕으로써 라는 말씀으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는 말씀. 지극히 큰 약속이란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따라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때문에 그까짓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거나 노예가 되지 않고 신성한 성품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은 자들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았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으면 세상의 것들이 작은 것임을 안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게 된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았는데 그까짓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닐 이유가 뭔가? 세상의 것을 바라볼 이유가 뭔가? 어찌 주님을 바라보지 않겠나? 그러면 성령님이 어찌 함께 하시지 않겠나? 그러면 얼마나 더 주님을 닮아가겠나? 그러면 얼마나 주님의 은총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겠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주님의 종임을 잊지 말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자. 진실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기억하며 세상의 것에 휘둘리거나 낙심 원망 근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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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오후예배설교 / 보배로운 믿음(벧후1:1-4)

 

 

 

제목 : 보배로운 믿음

말씀 : 벧후1:1~4

베드로 전서

A.D.64년경.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 핍박 시작. 아직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거류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에 대비해 믿음으로 이겨 나갈 것을 권면. 우리는 산 소망이 있는 자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잠깐 근심 할 수 밖에 없지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 오직 주의 말씀만 영원함.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그러기에 거짓 것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해야 함으로 오히려 더 많은 고난과 핍박.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기꺼이 고난 받을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표로써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줘 승리할 것.

그렇다.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세상.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세상. 나도 세상도 다 죄와 무지와 어둠. 끊임없는 죄와 유혹과 핍박과 도전.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도.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이므로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가야.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깨어 근신해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

베드로 후서

베드로가 두 번째 보낸 서신. 베드로전서를 보낸 뒤 3,4년 뒤에. 네로의 핍박이 더욱 가중되던 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 발생. 어느 정도 견디다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배교하기도.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 곧 오실 줄 알았던 주님이 오시지는 않고 핍박만 가중되자 낙심하는 사람들.

이에 베드로사도는 다시 서신을 보내어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으니 믿음을 굳게 지킬 것. 믿음으로 인내 할 것.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듯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가지 말라.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기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킬 것을 강조.

우리도 정말 조심해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우리들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왜곡된 가치관에 속지 말아야. 마귀 사탄은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환난과 핍박으로 때로는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거짓된 사상으로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함. 깨어 있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오직 그것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그러려면 참고 기다려야.

오늘 말씀. 송신자와 수신자. 축복 기도. 성도의 정체성 상기.

1.송신자와 수신자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 송신자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소개.

종은 dou'lo"로 노예라는 뜻. 완전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 주인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자. 주인의 뜻을 헤아려 준행하며 그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자.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 동시에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

우리는 완전히 주님께 종속되어 주님의 수족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존재. 종은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생각도 오직 주인의 것. 주인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주님은 완전한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 뜻대로 살아갈 때 최고의 가치, 의미, 복, 은혜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

사도는 ajpovstolo"로 ‘보냄을 받은 자’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관리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주어진 자리에서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주신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그 가운데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도록. 그러나 세상 사람은 몰라.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거기다 한가지 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은 자.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자.

2)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 수신자

베드로는 수신자들의 신분 또는 정체성을 상기시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 즉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그들이 얼마나 굉장한 사람들인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상기시킴, 즉 귀한 믿음의 소유자답게, 그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답게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의와 진리와 선 가운데 귀한 삶을 살라는 것.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얻게 됨. 그러므로 이 보배로운 믿음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면 안돼. 환난과 핍박이 와서 설령 육체의 생명은 잃은 망정 이것만은 잃어서는 안돼.

당연하지 않나? 믿음보다 큰 보배가 어디 있는가? 무엇이 믿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겠나?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영광을 가져다주겠나?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것은 다 잃어봤자 별거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잃으면 끝장. 영원히 끔찍한 고통.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또 마13:44절에서 말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큰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가장 큰 보배를 가진 자들임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게 조금이라도 믿음을 팔아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오직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원하고도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2.축복기도

벧후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모든 서신서의 서두와 종결 부분에서 계속 말씀했던 내용. 여기서는 두 가지를 강조. 첫째는 인생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 둘째는 그 복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가? 물론 인생의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이 복의 근원. 그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섬길 때 은혜와 평강. 인생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누리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과 위로와 소망도 오직 하나님이 주실 때 가능. 세상의 돈과 명예와 물질과 지식도 어느 정도 우리 삶에 유익이 되나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은혜는 하나님을 앎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알 때 믿게 되고 믿을 때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구해야. 그러려면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주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주님의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찾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라가기보다 주님을 찾자. 겸손히 엎드리자. 주님을 사모하자.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의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심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여기서 생명이란 하나님이 본래 주셨던 기쁨과 은혜와 복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영원토록 조금도 부족함 없이 완전히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물론 이것은 신기한 능력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이다. 우리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완전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것.

경건이란 그런 완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 생명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본질적인 정체성. 경건은 온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외견적인 모습. 그런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렇게 생명을 가진 자로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모든 은혜들을 주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특혜이고, 외견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삶의 모습. 그러므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답게 특별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과 야합하거나 타협하거나 끌려 다니지 말고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존귀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험하고 혼탁하고 왜곡된 세상에 끌려가지 말자. 이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주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자.

4.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됨.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로써’ 라는 것은 3절의 자기 영광과 덕으로써 라는 말씀으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는 말씀. 지극히 큰 약속이란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따라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때문에 그까짓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거나 노예가 되지 않고 신성한 성품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은 자들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았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으면 세상의 것들이 작은 것임을 안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게 된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았는데 그까짓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닐 이유가 뭔가? 세상의 것을 바라볼 이유가 뭔가? 어찌 주님을 바라보지 않겠나? 그러면 성령님이 어찌 함께 하시지 않겠나? 그러면 얼마나 더 주님을 닮아가겠나? 그러면 얼마나 주님의 은총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겠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주님의 종임을 잊지 말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자. 진실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기억하며 세상의 것에 휘둘리거나 낙심 원망 근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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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제목 :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

말씀 : 벧전1:18~21

뉴욕의 한 교회에서 아주 오래전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할머니가 예배가 끝내 갈 즈음에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목사님이 허락을 하자 할머니가 앞으로 나가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1860년 9월 19일, 이 교회 바로 옆에 있는 한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팔려가기 위하여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노예를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자 우리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경매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나는 어디로 팔려갈까, 내가 팔려 갈 집 주인들은 좋은 사람일까, 나를 학대하고 나를 짐승처럼 대하는 아닐까,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점잖은 신사분이 오시더니 나를 800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분은 나를 해방시켜주며 이제는 당신은 자유인이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이 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그 날 예배시간에 우리가 지금은 노예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번 주일날 한 사람의 노예라도 해방시켜주자고 의논이 되어 노예 한 사람을 사게 되었는데 거기서 바로 내가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 후로 나는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약 70년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교회도 너무나 감사하고 도무지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한 평생 이 교회를 섬기고 기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나름대로 섬겨왔습니다.

이제 저는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미천한 사람이지만 이제 제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노예에서 해방되어 그 은혜를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서 한평생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해방시켜 준 이 교회에 감사함으로 섬겼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다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잊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 아름답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구속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노예로 있다가 해방되는 것도 이와 같이 감격스럽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평생 잊을 수 없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일진대 죄와 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건짐 받은 이 은혜는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하고 찬양하고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속 받았는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의 그 놀랍고 크고 영광스럽고 고귀함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세상의 헛된 것으로부터 대속 받음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 받았다. ‘헛된’이라는 말은 ‘공허한, 헛된, 효과 없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무익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헛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숭배를 비롯한 세상의 헛된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이나 물질 등의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과 종교를 따라 행하던 모든 행실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헛되고 무익하고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상과 가치가 완전히 무가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상까지도 100% 무가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온전치는 못하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거나 희망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헛된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약간의 유익을 얻는다해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고 나아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음으로 인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가는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인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상과 자신과 육신의 욕망과 돈과 명예와 사람 등의 헛된 것을 섬기며 그걸 인생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죄와 사망과 지옥의 노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사람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도 평생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할 텐데 하물며 마귀에게서 해방되고 영원한 지옥에서 구속되어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이 은혜를 어찌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노예 생활하는 것도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일진대 마귀사탄의 종노릇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얼마나 더 끔찍스러운 일인지를 기억하며 거기서 해방되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격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니 평생 이 은혜를 잊지 말고 다시는 세상의 것에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로써 진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대속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된 것임.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우리가 과거의 모든 헛된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금이나 은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이나 성인군자나 선지자나 능력자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전부터 하나님께 함께 계셨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론 우선은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결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고귀하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우리도 너무나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속 혹은 대속이 뭡니까? 한마디로 값을 지불하고 처벌을 면제받아 구원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노예로 팔린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구속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의 삯을 지불하시고 죄와 마귀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한 1,000억을 주고 산 물건이라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천억 1조 100조가 아닙니다.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대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존재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보다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복되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 보다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리가 고귀한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는 정말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몸값을 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귀한 존재이니까 귀하게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한 몸을 함부로 굴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왕자와 거지와 어울려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아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몇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똥통에서 놀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과 모든 죄와 마귀 사탄으로부터 너무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 너무나 고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래서 영광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우리 소망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온전히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세상의 헛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생명과 생명의 기쁨이 있는 양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죄와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와 사탄의 권세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헛된 것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나라가 있는 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고귀한 존재이니까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땅의 것을 좇아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몰라서 세상의 것을, 헛된 것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는 그걸 알았으니까요.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엄청난 은혜와 기쁨과 영광과 은혜가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걸 안다면 왜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겠습니까? 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인생인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보다 천하보다 세상 모든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그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고 기쁨과 은혜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 찬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놀라운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이 놀라운 신분에 걸맞게 거룩하게 아름답게 존귀하게 살아가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에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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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문 Sunday  representative prayer in July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하사 택함을 주시어 오늘도 주님의 전에 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모두를 주님 사랑 안에서 자유함을 주시고 주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셨음에 감사합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지난 한 주간도 주님의 말씀에 의한 삶으로 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사오니

저희들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사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미혹과 유혹에 승리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을 때가 있었음을 고백하오며

더러워진 우리 모두의 심령을 주님께서 흘리신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씻어 주시어 정결케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저희를 택하사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하셨음을 깨닫게 하시고

저에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잘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어

오직 주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금년 여름은 유난히 덥고 무더위가 우리들의 육신을 괴롭히고 있나이다.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를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들 안에 탐욕이 있는 것들을 제거시키어 오직 순전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되게 하시옵소서.

 


더워서 땀에 젖어 살아가듯이 성령에 젖은 발걸음으로 아픔을 겪는 자와 함께

아파할 수 있는 00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슬픔을 겪는 자와 함께 슬픔을 나눔으로써,

선한 이웃으로 저들의 상처난 심령을 치료하는 00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의 주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좌절하고 고통받는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옵기를 원합니다.

저의 00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는

영혼의 안식처의 자리가 되게 하시옵소서.

캄캄한 인생길에 요셉을 인도하시어 총리까지 오르게 하시도록 힘을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저의 모두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어 믿음과 용기와 확신으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게 하시옵소서.

 

성령의 주님!

저희 교회 형제자매들을 위해 역사하시옵기를 원합니다.

물질로 어려움을 겪는 형제 자매들, 질병으로 힘들어 하는 이웃들을

주님의 손으로 안수하시어 힘을 주시고 치유하여 주시어

오뚜기같이 일어나 소생하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형제 자매, 이웃들에게 새 힘과 지혜를 주시사

믿음의 올바른 길을 따라 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사, 선함을 행하게 하소서.

회개하지 못하는 마음과 중단된 기도, 인색해진 감사의 생활, 그리고 지키지 못한 제자리,

다하지 못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회복시켜 주시옵기를 원합니다.

 

흑암과 어지러운 이 시대에 소망의 말씀을 들고 단위에 서시는

사자 목사님을 기억하사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히시어 갈급한

우리 모두의 심령에 단비를 부어주시는 능력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며 봉사하는 손길들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으로 영광을 올리는 성가대원들에 한없는 축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형제자매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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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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