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예배 설교 부모님의 참된 사랑

 

 

 


제목 : 참된 부모님 사랑
말씀 : 출20:12


충북 제천 출신으로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로 판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곱사등이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술과 도박에서 벗어나려고 손가락까지 절단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노름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가정 형편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오더니 또다시 어머니에게 노름 밑천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어디서 노름 밑천을 가져오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가 홧김에 어린 아들을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척추를 크게 다쳐 곱사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면 철없는 아이들이 놀려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에 열중하며 그나마 자신을 반겨주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결국 명문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였고, 판사가 된 이후에는 다른 여러 형제들도 있었지만 자기 집에 모시며 극진히 섬겨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정말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부모가 무지해서 제대로 못해 주었어도, 심지어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그래도 부모니까, 그래도 날 낳아주신 분이니까 섬기고 공경하고 모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하셨는데 하물며 부모님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길러 주신 부모님, 설령 만에 하나 그렇지 못했을지라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잘 공경하고 섬김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

1)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셨느냐와 관계없이 생명을 주신 것 그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공경하며 섬겨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아름다운 땅위에 태어나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행위를 비롯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열심히 수고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이 모든 생명의 활동이 얼마나 귀하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생명이 누구에게로부터 왔습니까? 물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이 위대한 생명체가 태어나게 하시고 대대로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대대로 전수시켜주는 위대한 생명의 창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낳아 주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을지라도 이 너무나 소중하고 위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인생길 살다가 어렵고 힘들고 답답하고 낙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 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공경하며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때에 부모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여러분에게도 더욱 은혜가 충만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며 공경해야 하는데 더더구나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25사변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피난민 대열의 제일 후미에 쳐져 피난을 가다가 그만 가슴에 작은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지만 엄마의 가슴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사람들은 아기 엄마가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저마다 살기 위하여 도망을 가고 결국 다 죽어가는 엄마와 아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는 엄마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젖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엄마는 출혈이 너무 심하여 의식이 몽롱해져 가면서도 피범벅이 된 젖꼭지를 아이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엄마의 가슴에서 나오는 피를 빨아먹게 되었고, 결국 몇 시간 후에 엄마는 과다 출혈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군인들이 지나가다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아기를 구해 주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피를 먹고 이틀 동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좀 덜할지 모르지만 저와 같은 세대만해도 가히 부모의 피를 먹고 살았다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정말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하며 자녀만큼은 조금이라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던져서 수고하고 헌신했던 분들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셨듯이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 주신 그런 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삼하18:33절 하반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것은 다윗이 셋째아들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며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압살롬이 누구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했던 패역무도한 자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궁에서 쫓겨나 도망가게 되었는데 이를 뒤쫓다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던 이 패역무도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더라면 하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던져서,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며, 자식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이 굶은 것은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멸시천대를 당해도 자식이 멸시천대를 당하는 꼴은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어찌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자녀 여러분, 이와같이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나아가 그야말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공경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해야 합니까?

 

1)힘에 겹도록 섬겨야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출20:12절을 보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공경하라는 말 db'K;(카바드)는 ‘무겁다, 힘겹다, 짐이 되다, 존경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공경은 힘에 겹도록 즉 최선을 다해서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섬기며 영화롭게 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힘에 겹도록 해야 그게 진정한 공경이고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형편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안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으면 하고 안 남으면 안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쓰고 남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기 전에 먼저 따로 떼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볼일 다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볼 일을 보기 전에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볼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공경이고 그게 섬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시간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돈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물론 시간이 남아도, 돈이 남아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섬김이나 헌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님이 정말로 나에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요, 나아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분이요, 그래서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이나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다하고 나머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하고 그리고 그 나머지로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섬김이요 공경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 이 원리를 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래서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을 제어하는 근거가 되어 먼저 공경하고 섬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부모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럴 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님 공경의 또 다른 자세는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 곧 공경한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고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상대방이 부모님이건 하나님이건 그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혹은 그 지혜와 그 능력을 인정한다면 그 분을 높여 드리고 영화롭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어찌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엡6: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문에서 옳다는 말은 ‘준수하다, 의롭다, 법을 지킨다, 의무를 이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고, 도리이고 그래서 그것이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시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 주신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보면 한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일까지 순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일을 하는 것은 결국 우주만물의 최정점에 계신 최상의 어른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뜻에는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기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교회를 가야하는데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셔서 못 가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 교회에 가야하는지를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설령 부모님이 노를 발하셔도, 심지어 매를 든다고 해도 끝까지 참고 공손하게 말씀을 드리고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는 백배 천배 더 순종하고 더 공경하고 더 섬겨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부모님도 그 자녀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또 꼭 신앙문제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님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때로는 적절치 못한 말씀이나 행동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일단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공손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항변하고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면 안 됩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일단은 공손하고 겸손한 자세로 경청한 다음에 말씀이 다 끝나고 나면 공손하게 자신의 뜻을 밝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이 좁혀지지 않으면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정말 공경하고 섬기면서 기다리다가 기회를 보아가며 공손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부모님도 자녀의 뜻을 받아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모님의 권위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정상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물론 이려니와 혹시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지 않거나 일상생활에서 불합리한 말씀을 하신다 할지라도 결코 대항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언제나 존중히 여기며 공손한 태도로 최선을 다함으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축복도 함께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모님들은 뭔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는 자녀를 위하여 온갖 헌신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점점 작아집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워집니다. 바로 이럴 때 모든 자녀들은 이제 거꾸로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으니 부모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힘들 때는 이제 거꾸로 자녀가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어떤 설문조사에 의하면 2002년에는 노후에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67% 정도였는데 10년이 지난 2012년 그러니까 작년에는 35%정도만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은 아무리 대세라고 할지라도 결코 올바른 가치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며,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입니다.

여러분, 오늘 정말 얼마나 왜곡된 가치가 판을 치고 있는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분별해야 합니다. 요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그게 정말로 옳으냐 그르냐보다는 대세가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대법관 아홉명 중 여섯명이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도 적극적으로 간통제 폐지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좀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간통죄는 사람들의 범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거예요. 법감정이란 쉽게 말해 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즉 옛날 사람들은 간통을 큰 죄로 생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별로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없애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놈의 법입니까? 잘못된 가치관이나 왜곡된 생각들을 바르게 잡아주는 게 법이지, 선이든 악이든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법입니까? 그럼 다수의 사람들이 도둑질을 죄로 느끼지 않으면 도적질도 처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까? 여러분, 다수가 선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대세가 진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진리는 오직 1%만 따라가도, 아니 아무도 안 따라가도 진리이고, 99%아니라 100%가 따라가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우리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잣대로 삼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안강에 나갔더니 길가에 현수막이 하나 붙어 있는데 거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 떡하니 ‘안강성당’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안강성당에서 석가모니가 온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세상의 대세입니다. 불교에서 ‘축 성탄’하면서 성당에 축하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성당에서 ‘축 불탄’하면서 화답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멋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다가오는 사탄의 장난입니다. 성경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신 우상에 불과한 것이요, 사람을 속이는 사탄의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다수의 사람들이 자녀들이 부모님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엡6:2절을 보십시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은 ‘평가하다,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상을 주다, 가치를 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생명을 주시고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헌신을 인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경의를 표하며 몸과 마음과 물질까지 드려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자녀들의 본분이요, 책임이요,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부모님을 평상시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힘없고 약할 때에 더욱 봉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양육해주신 부모님께 정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나머지 찌꺼기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모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상시에도 그래야 되지만 특히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약하고 힘들 때 부모님을 잘 봉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도 풍성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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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Passion Week Worship preaching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 중 열심있는 수제자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실 때도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통해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롬 5:6) -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과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승리의 주님,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②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넘어집니다(롬 8:24,25) -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받지만 기쁭으로 인내하여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도안 겪게 될 수많은 고난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고후 12:9,10)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이 사실을 더 절 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함으로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시 회개하고 일어나 사도직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을 향해 가다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넘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승리의 주님이 연약한 당신을 이끌어 승리하는 삶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실패자 가룟 유다(마 27:3-8)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① 육신이 비참하게 주었습니다(5절) -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한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은 삼십은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를 사는데 쓰여졌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세상적인 욕심의 결국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② 명예가 죽었습니다(6-8절)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된 이름은 그의 명예를 죽일 뿐입니다. 기룟 유다의 이름은 그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영원히 저주의 대명사로 불려질 것입니다.

  ③ 영혼이 죽었습니다(약 1:15) -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는 진정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그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다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에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잠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가다 돌이키지도 못할 인생의 영원한 실패자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잘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갑시다. 혹 세상적인 유혹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노선에서 잠시 빗나갔을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시다. 승리의 삶을 주시는 주님께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사 53:4-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고난 주간을 맞이해 이땅에 오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① 고난 받은 예수님(4절) -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② 버림 받은 예수님(5절) -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오히려 욕하며 배척했습니다. 똫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처절한 배반을 경험하셨습니다.

  ③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6절) - 죽음은 범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아무 흠도, 죄도 없는 깨끗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의 사역을 믿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전화 위복(행 9:4; 고후 12:7; 빌 1:13)  

 

  예수님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신 후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했던 바울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소경됨을 인해 영적 눈을 떳습니다(행 9:4) -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잠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울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육체의 한 지체를 잃음으로 그는 영혼을 얻었습니다.

  ② 육체의 가시로 겸손을 배웠습니다(고후 12:7) -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③ 감옥에 갇힘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빌 1:13) -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복음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는 또다른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혼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감추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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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인생의 황금비율

 

 


제목 : 인생의 황금비율

말씀 : 요삼1:2~4

 

1.인생의 황금비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모든 성도 여러분과 고향을 찾은 모든 성도여러분의 가족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온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혈육 간에도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마음껏 나누는 복된 설 명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먼저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자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다섯 개의 사각형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약간 다를 수 있지만 십중팔구는 5번을 꼽는다고 합니다. 이 사각형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약1.6:1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집을 지을 때나 텔레비전을 비롯한 모든 공산품을 만들 때도 적용되고, 사람도 배꼽을 기준으로 하체와 상체의 비율이 1.6:1에 가장 가까울 때 가장 균형이 잡히고 아름답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6:1이라는 이 비율을 황금비율이라고 합니다. 황금비율이란 수학, 기하학, 미술, 건축학, 과학 등에서 두루 통용되는 법칙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해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비율을 말합니다. 이 비율이 대략 1.6:1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인생은 어떨까요? 우리 인생에게도 분명히 이런 황금비율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외형적으로도 가장 어울리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안정적인 비율이 있는 것처럼 내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가장 아름답고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비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황금비율은 꼭 1.6:1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상적인 조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비율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럼 인생의 황금비율이 뭡니까? 그건 영과 육과 혼이라고 하는 인간의 전인격체의 가장 이상적인 조합을 이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영적인 영역과 육적 혹은 물적인 영역,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비율대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고 따라서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만약에 돈은 엄청나게 많은데 인격이 엉망이거나 반대로 인격은 좋은데 돈이 너~무 없어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어찌 생명력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혹은 지식은 많은데 인품이 엉망이거나 반대로 인품은 괜찮은데 아는 게 너~무 없다면 과연 풍요로운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혹은 육체는 건강하고 잘생기고 좋은데 정신이 온전치 못하거나 반대로 정신은 온전한데 육신이 병들거나 하면 어떻겠습니까? 혹은 지식도 돈도 인품도 건강도 좋은데 신앙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과 육과 혼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멋있고 신비롭게 조화를 이룬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영역이 골고루 발달하여 잘 조화를 이룰 때 그 인생은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비롯한 짐승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짐승들에게도 본능적인 욕망이 있고 약간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무슨 윤리니 도덕이니 품격이니 가치니 영성이니 이런 거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그저 먹을 것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야말로 전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윤리와 도덕과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문화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을 만날 준비도 해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어느 한쪽이 탈나면 그 인생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보십시오, 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범사에 잘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그대로 모든 게 잘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경제가 잘되고, 타인과의 관계가 잘 되고, 육신이 건강하고 그래서 살아가는 데 문제거리가 없이 일이 잘 풀려 나가는 것입니다. 강건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이나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림이 없이 굳건하게 서있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적으로도 건강하여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황금비율인 것입니다. 몇 대 몇 대 몇이라고 딱히 정해진 비율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영역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영과 육과 혼이 균형있게 발달될 수 있도록 힘쓰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죽어라고 일만하시는 분도 계신데 여러분,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반대로 어떤 분은 죽어라고 일하기 싫어하고 편하게 놀고 먹고 살려고 하는데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어떤 분은 죽어라고 육신의 건강을 챙기느라고 시간을 거기에 다 투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몸 가꾸는데 정열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또 너~무 몸을 안 가꾸고 소홀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바보같은 일입니다. 또 어떤 분은 세상의 것은 무가치하고 속되고 심지어 악하다고 하면서 그저 도만 닦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송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면 장땡인줄 아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과 혼과 육을 균형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균형있게 발달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생활과 말씀 생활과 기도생활에도 힘써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영과 육과 정신이 균형있게 발달될 때 그 인생은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풍요롭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정말 영혼을 풍성케하는 일과 물질적인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일과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 골고루 균형있게 사용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영과 육과 혼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대로 황금비율을 이룸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안정되고 편안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됩니까?

2.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황금비율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우주만물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대로 잘 유지될 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게 깨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황금비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연계도 보십시오. 태양과 지구 사이에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거리가 있고, 공전 시간과 자전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만약 그게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게 되면 지구는 멸망합니다. 지구 내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다와 육지가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지구의 온도와 습도가 적정 수준이 유지되어 지구가 유지됩니다. 또한 공기 중의 여러 원소들이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땅과 물이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합니다. 땅과 숲과 강과 바다와 동물과 식물과 사람이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생명력이 넘치는 지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물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말 풍요롭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살도록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유지해야 할 황금비율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잘 유지하면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 되지만 이 비율이 깨지면 생기를 잃게 되어 이 세상에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가장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정해주신 황금비율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7:1, 10:1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7:1의 법칙이 뭐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주일성수와 관련된 것으로 적어도 우리 시간의 1/7은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은 하나님께서 순전히 우리를 위하여 정해 놓으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의 양식과 평안과 은혜를 공급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과 육과 혼이 안식을 누리며 풍요로움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주님 존전에 나와 예배드리며 영의 양식과 은혜를 공급받아야 우리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바르게 지키면 영과 육이 균형을 이루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이 날을 범하면 이 황금비율이 깨져 뒤뚱거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실상은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주일을 바르게 성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우리의 심령을 채우면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점점 영적인 생명력을 잃게 되고, 그러면 더욱 세상의 물결에 떠내려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서양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원인이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10:1의 법칙이란 뭐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일조 헌금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물질의 황금비율을 말합니다. 십일조 헌금은 물질적으로 균형잡힌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최소한의 비율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최소한의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는 신앙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원하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릴 부분은 드리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사용할 것은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이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존중과 신뢰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할 때에 정말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이웃에게도 기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그래서 자신의 삶도 아름답고 뿌듯하고 가치있고 의미있고 또 그렇게 할때에 세상은 정말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0: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사람에게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것입니다. 또 눅6:38절 전반부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줄 것을 주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과 사랑의 고백을 보시고 복을 내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산다고 풍요롭고 가치있고 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과 사람앞에 볼품없는 인생이 됩니다. 오히려 드리는 삶, 줄줄 아는 삶이 넉넉하고 풍요롭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 올바르게 분할하여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사랑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며, 자신의 삶도 더욱 멋있고 아름답고 귀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사람과의 관계에서 황금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선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황금비율을 잘 지켜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황금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과의 사이에서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를 주고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황금비율 못지않게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황금비율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사이에서의 황금비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인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진정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적정한 수준에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극단적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 덫에 걸려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생각하고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왜곡된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도 다 번거롭다고 하며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 말하기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유인즉 차라리 자식이 없으면 정부에서 먹여 살려 주는데 자식이 있어서 생활보호대상자도 안되어 정부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자식도 돌보지 않아서 생계가 곤란하신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딱 잘라 이런 비율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는 가족과 이웃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황금비율을 적용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돈과 명예가 있다해도 그 인생은 절름발이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아니 그냥 인정받지 못할 뿐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명절이 대단히 의미있고 좋은 날이라고 봅니다. 물론 민족이 이렇게 대이동을 하며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기름값도 많이 들고, 또 특히 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다 설거지다 하여 힘든 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기를 통하여 평소에 바빠서 혹은 너무 멀어서 찾아보지 못했던 사랑하는 가족들을 찾아 서로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오랜만에 만나 사랑과 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고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고 어려움을 이기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습니까? 또 좀더 시야를 넓혀서 이럴 때 쓸쓸하고 외롭게 지내시는 이웃을 돌아볼 수 있다면 이 명절이 얼마나 훈훈하고 아름답고 복된 날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막12:31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또 딤전5: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모든 이웃을 사랑하되 가족은 특별히 더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 가족의 사랑과 희생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인류 사회의 핵으로 가족 간에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잘 형성되면 결국 인류사회 전체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설명절을 맞이하여 정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더욱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간에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복된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오늘 설 명절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 전체가 오늘 명절과 같이 늘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황금비율을 잘 지키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어느 한쪽만 발달하고 다른 한쪽은 퇴화되어 있는 절름발이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아름답게 잘 발달하여 황금비율을 이루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나와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께 드릴 것은 드리고, 이웃을 위하여 사용할 것은 사용하고, 자신을 위하여 사용할 것은 합리적으로 사용함으로 진정 가장 아름다고 균형잡힌 황금비율을 이루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강건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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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마음을 옥토로 

 

 

 

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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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주일 오전예배 설교 거듭남의 의미

 

 


말씀 : 요1:9-14

제목 : 거듭남의 의미

오늘부터 오후예배 시간에는 어떤 주제를 택하여 시리즈로 설교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주일오후에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의 말씀들은 수요밤예배로 옮겨 계속 강해를 실시할 것이다. 왜 이런 결정을 하였느냐하면 우리가 전도에 대하여 살펴보며, 또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하여 늘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은 거듭남에 대한 체험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전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거듭남을 체험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지만 그러나 몇분의 초신자들도 계시고, 교회생활 오래하였지만 아직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신 것 같아 거듭남에 대하여 몇시간 동안 말씀드릴 때 아직 체험하지 못한 분들을 이번 계기를 통하여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기를 바라고, 이미 체험하신 분들은 더욱 확실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논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그 중에서 어떤 곳에 보니까 개신교인들은 그래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천주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얼마 안된다는 것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답변은 자신들이 선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천국에 간다고 장담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보내고 안보내고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들은 그저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신교를 비판하기를 개신교인들은 행동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쉽게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행동은 하지않고 자기 나름대로 믿으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여 구원얻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교만이라고 반박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물론 천주교인들이 말하는 것에도 일리는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은 아주 그럴듯한 반박이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것이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자기가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소리에 현혹되지 말라. 오히려 천주교의 주장이 교만이고 불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겸손인 것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이요, 동시에 불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내 생각대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확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100% 완벽하게 그대로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신이고, 교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거듭남이란 물론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물론 육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났다고하는 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에 대하여 보다 확실한 의미를 살펴보려면 요3:3절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a[nwqen(아노덴)은「위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새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났다는 말은 위로부터 났다. 처음부터 새로 났다. 새롭게 태어났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의미는 위로부터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라는 것은 물론 하늘을 가르키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므로 결국은 위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듭이라는 말속에 이미 위로부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났다는 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사람의 지혜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도덕적 삶이나 종교적 철학적 사색이나 탐구나 수양이나 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 기여나 혈통적 계승에 의해서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필요없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은 너무나 많다.

요1:12,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보라!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혈통으로 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육체적 혈통적 관계에 의하여 거듭남이 계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욕망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말은 이성에 대한 것이든 물질에 대한 것이든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든 여하튼 어떤 것이라도 세상적인 욕망에 의하여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사람의 뜻으로나 나지 않는다는 말은 말그대로 종교적이든 아니면 철학적이든 아니면 윤리적이든 그 어떤 것이라해도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하여 구원의 은총이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거듭나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물질적, 학문적, 지식적, 도덕적, 윤리적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엡2: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거듭남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의 역사이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것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과 철학적, 종교적 수양으로 되어질 수도 없고 되어져서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보면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해석할만한 구절들이 몇구절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야고보서 2장이다. 예를 들면, 약2: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마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은 일견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행위구원 혹은 공로구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야고보 2장에 대해서 보자. 야고보서 2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배경을 보아야 한다. 이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1:1절에 있는 바와같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로마제국내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외적으로 많은 핍박에 직면해 있었고, 내적으로는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저 형식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믿는다고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유대교의 형식주의, 율법주의, 외식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그런 형식적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다면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거기서 말하는 행위가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100% 완벽하게 선하게 옳게 바르게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 말씀은 진실로 믿음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다운 행위를 위해 힘써야 하고 또 그 결과로써 어느정동의 믿음의 행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씀이 100% 완벽한 행위가 없다면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면 이건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태초부터 세말까지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기에 심각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더 심각한 것은 만약 그런 의미로 씌였다면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100% 완전한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완전히 성화가 되어 완전한 행동을 행해야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천국 갈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믿으며 구원받는다는 말씀들도 공수표가 되고 말지 않는가?

그러니까 오해해서는 안된다. 야고보서에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하였다하여 이것이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정말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가능한 최대한 실천하며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때에 어느정도의 믿음의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마7:21-23절의 말씀도 잘 읽어보라. 이것이 정말 100%행함이 없는 자들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이 주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마7:15절 말씀의 연속선상에서 주신 말씀이다. 거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시면서 겉으로는 믿는 자인체하고 더 나아가 선지자 노릇까지 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뒤로는 불법을 자행하며 다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2절에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기서 말하는 것도 역시 거짓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불법이란 우리가 나름대로 잘 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주님뜻대로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그래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진실로 살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잘못하고 또 때로는 죄를 짓기도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며 행하는 불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설령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도 실제로는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그 주님의 뜻을 따를 의사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진정 주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으니 설령 겉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니 결국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고해서 이 말씀을 곡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100%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석한다면 역시 천국에 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번복하는 것이 되게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무효하게 만드는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라. 예수님께서는 분명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는가? 더구나 100%믿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물론 진짜 믿음에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함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100%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얻는 믿음은 100%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대속의 죽음, 그분의 부활을 통한 구속의 은총, 그리고 그분의 다시오심, 그로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가운데서 하나님앞에 엎드리며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듭남의 의미와 그 방법을 되새겨보며 진정 구원의 확신가운데 살자. 우리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나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믿고,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그래서 그를 믿는 자엑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주어졌음을 믿고, 그래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 혹은 우리가 그분앞에 갈때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것을 믿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든 믿음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약속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온전히 믿으며, 믿는 자은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더욱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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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생명의말씀 


 

 

 

제목 : 참된 종교(宗敎)

말씀 : 요3:10-17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왜일까? 그것은 두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심각한 죄와 무지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누구에게나 절대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든 모르든 어떤 절대자에 대한 갈급함으로 절대자를 찾게되고 그것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영적인 부분이 없다면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인간에게 도덕적인 관념이 전혀 없다면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영적 관념이 있기에 신을 생각하고, 도덕적 관념이 있기에 도덕적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지고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와 같이 영적인 존재이므로 무언가 절대자를 찾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참으로 올바른 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나름대로 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 섬기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둠과 무지 가운데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이다. 영적인 요소가 있어서 무언가 신을 찾기는 찾는데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엉뚱한 것을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 이것을 저것을 찾다보니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난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을 올바르게 만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우리에게 참 생명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1.참된 종교의 조건

1)인간을 찾아와 자신을 계시해주고 구원해주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바와같이 인간은 죄와 무지로 인하여 스스로는 참신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 신과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줄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신을 만난다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는 신은 무궁무진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히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이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어두워지고 캄캄해져서 도저히 인간 자신으로서는 참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무지하고 연약하고 한계가 있고 죄가 있는 인간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를 닦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이다. 백날 연구해도 모른다. 인간이 아무리 궁리해봐야 도로 그 자리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기나 능력이나 지혜나 의나 선이 우리보다 더 작은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훨씬 큰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갓난아기가 어떻게 인간이 달나라에 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본래부터 인간은 지혜나 능력이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작은 존재였는데 거기다가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까지 어두워졌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스스로 알겠는가? 그러므로 신을 알려면 신이 우리를 찾아와서 신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구원도 동일하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하여 백날 연구하고 도를 닦아도 헛수고다.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나 혼자 그 길로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란 신이 직접 인간을 찾아와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종교이다.

2)우주만물의 기원을 분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참 종교라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작을 알지 못하면 돌아갈 곳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처음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원위치로 돌아가겠는가?

종교란 결국 근원에 관한 문제이고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현재의 문제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세상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우주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이끌어갈 수가 있겠는가?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인격적 만남과 올바른 윤리관이 있어야 한다.

신은 선을 전제로 한다. 물론 악신도 신은 신이겠지만 진짜 신은 절대 선과 절대 의와 절대 거룩과 절대 진실과 전능과 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신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이라면 선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류에게 진정한 선과 의와 거룩과 진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해주어야 한다.

또한 신은 인격적이어야 한다. 인격적이라 함은 영성과 지성과 감성 등을 말한다. 인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교제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인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통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이라는 인격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이 교제하기 위해서는 신도 인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성과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인간과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고 하면서 교제할 때에 비로소 인간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격적인 신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4)인간의 실상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시작과 더불어 현재의 상태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그 진단을 바탕으로 한 처방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병에 걸렸을때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일단은 그 시작점 즉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또 예방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는 현재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한다. 그래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단순히 약물로 할 것인지, 수술을 받아야 할 것인지, 입원을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원인과 상태를 알아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도 동일하다. 인간 자체나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의 기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현재의 상태는 어떤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이것을 알아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인간의 실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5)인간 생명에 관한 분명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 있어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다.

따라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냐하면 결국 인간에게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의 문제, 육체의 한계의 문제 등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진짜 생명을 얻게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진짜 종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윤리적인 종교라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면 참종교라할수 없다. 아무리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천하보다도 귀한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종교가 아닌 것이다.

6)내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영은 죽지 않는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선하다고 해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을 해주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가짜이거나 불완전한 종교이다.

2.참된 종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다.

그렇다. 이 모든 조건을 100%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뿐이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참종교의 조건중의 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핵심인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 13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또한 16절에서는 예수님이 내려오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생명을 구원할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말씀하신다.

그밖에 오늘 기독교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이 찾아오신 종교이다. 인간의 연구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을 계시해주셔서 알게 하셨으며,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신 종교다.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만남과 윤리관이 있다. 인간의 실상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법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감히 타종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방법으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분명한 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

다른 종교들은 비록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건전하다고 해도 이러한 조건들 중 일부는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또 미신이나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거나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행위는 이러한 참 종교의 조건들을 거의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교들은 결코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며 오직 참된 생명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그 은총가운데 살게 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라. 누가 어떤 말로 미혹한다해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말라.

인간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은 다 부족하고 완전치 못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말씀위에 서라. 아무리 건전하고 윤리적인 고상한 종교라해도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종교, 이런 종교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거기에 순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때에 진정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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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복된 새해를 위하여

 

 


말씀 : 잠3:1~10

제목 : 축복받는 새해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자,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네,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네,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네,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

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욥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너,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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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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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말씀과 삶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경험이나 훈련이 필요치 않은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십계명중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레20:10) 이러한 내용들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안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에 나타난 ‘말씀’에 대한 표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절의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간직하며, 2절에서는 내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지혜'에게 누이라하고, '명철'에게 친족이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말이나 명령이나 법이나 지혜나 명철은 모두가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니까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기능을 말해준다. 즉 말씀을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말씀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말씀, 오직 예수,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지혜가 되는 것이다.

또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절에는 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경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하는 것이다. 어쩌긴 어쩌겠는가? 그것이 법이고 지혜라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하지. 지키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1-4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말씀을 간직하고(1절) 지키고(2절) 가까이하라(3절 上) 새기라(3절下) 친근히 여기라(4절)는 것이다. 여기서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또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가까이한다는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며, 또 ‘새기라’는 것은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또 친근히 한다는 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특히 지키라는 말씀속에서 2절 후반부에서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눈동자처럼 지켜라.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를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서 4절에서는 말씀한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경계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씀을 지켜 살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시련들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그것은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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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오직 바른 교훈을 따르라

 

 

 

제목 : 오직 바른 교훈을 따릅시다

말씀 : 딤전6:3-5

1.유일한 완전한 진리인 성경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크게 보면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없이는 우주도 나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이다.

안 그런가? 어떻게 우주만물이 존재하는가? 자연발생설, 진화론 모두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연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생길 수도 없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저절로 될 수 있다는 것은 20만개나 되는 비행기 부품을 다 흩어 놓았더니 어느 날 저절로 조립이 되어 비행기가 나왔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만에 하나 20만개의 부품이 저절로 조립되어 비행기가 된다해도 우주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우주의 부품이 20만개만 되겠는가? 20만개가 아니라 2,000만 조도 넘는다. 아니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저절로 생겨서 저절로 조립되어 이 신묘막측한 질서가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즉 저절로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어찌어찌 해서 생긴다해도 그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 원리와 생명이 이 엄청나고 신비하고 복잡미묘한 존재로 진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한 그대로 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이 정답이고 이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속된 말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걸 바르게 믿으라. 분명히 알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한 것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완전한 선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런 사랑과 선와 의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다. 이걸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경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다. 오직 말씀만이 기준이며, 규범이며, 준거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따를 때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가게 된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결코 다른 교훈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한 자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장 무식한 자이며 거기서부터 모든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만이 바른 말이요, 올바른 교훈이라는 걸 기억하고 이것만을 받아들이고 따라 살아야 한다. 안 그런가? 정말 옳은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무슨 말씀이 옳고 선하고 완전하며 무슨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정말로 귀 기울이지 않고 자꾸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려고 한다. 당장에 뭔가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한다. 당장 편하고 물질적 육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도 안 오면서 하나님은 믿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믿는다면서 성경대로 믿지 못한다. 이런 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도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내가 만든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오긴 나오는데 자기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 교회 생활한다. 주일날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바쁘면 밭에 가서 앉아 있다. 십일조도 형편에 따라 자기 기준에 맞추어 하게 되면 하고 못하게 되면 그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교훈을 바르게 따르지 않는 것으로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과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다른 교훈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라. 조금도 가감하지 말고 말씀그대로 믿으라. 이해가 되건 안되건, 내 생각과 같건 다르건 말씀 그대로 믿으라.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리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고 진정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리라.

2.성경을 믿지 않으면 가장 교만한 것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거부하면 가장 교만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인생이다. 당연하지 않나?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있다고 그걸 거부하겠나? 태초부터 있었는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는가? 그런데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

가장 유식한 것은 성경을 바로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한 지식이 뭔가?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지식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나? 진정 인생이 가야할 길과 목적과 방향과 의미와 가치를 누가 알려주나? 오직 성경 밖에 더 있나?

그런데 요즘에 정말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 많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가 그렇다고 하고, 성경이 그렇다고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계22:18,19절을 보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말씀이 우습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라.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라. 그리하여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

3.성경을 따르지 않으면 문제 발생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이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인데 그걸 믿지 않으면 결국 생명과 진리를 버리는 것인데 문제가 안 발생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결국 거짓 것을 따라가는 것인데, 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도 모르고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서 캄캄한 길을 더듬고 다니는 것인데 어찌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왜 날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된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시기와 분쟁과 싸움과 비방과 악한 생각들이 물러가는 것이다. 도리어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악을 행하겠는가?

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위로하며 살게 된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교만한 가운데서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방하고 불화하겠는가? 심지어는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하든지 성경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라.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넣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영혼이 소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남에게도 생명의 은총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지 말라.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폐단이다.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조차도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는 것은 경건을 물질적, 육체적 유익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일 경우에는 삯군 목사요, 성도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세상 행복의 도구로 부려먹으려는 거짓 성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참 목자와 참 신자라도 경건을 올바른 이익의 방도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올바른 이익이란 정신적으로는 경건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참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또한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강건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과 사랑에게 귀히 여김 받게 된다. 그러면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풍성함을 누리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잠3:3,4절에서는 말씀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또 잠3:9,10절에서도 말씀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이런 은혜도 누려야 한다.

그러나 경건을 잘못된 이익의 방도로 사용하면 안 된다.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출세하고 자식이 잘되는 등 그저 세상의 복을 위하여 경건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왜곡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모습들이 있다. 삯군 목자도 있고, 그저 세상적인 복이나 바라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분별해야 한다. 사탄마귀가 그럴듯하게 미혹해서 우리를 자꾸 그쪽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물론 돈이나 건강이 평안함과 기쁨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만을 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그런 것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는 행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오직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르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바른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하자. 경건을 세상적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은혜를 구함으로 진정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서 그 은혜를 세상에 끼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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