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절기예배 설교

 

 

 

제목 : 십자가의 도

말씀 : 고전1:18-25

1.가장 큰 능력인 십자가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와 지식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요, 지혜요, 지식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제 아무리 큰 능력이라도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겠습니까? 제 아무리 고상한 학문이라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온 천하를 다 얻는다해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억만금이 있어도, 지상 최고의 권세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잖아요? 결국 돈도 지식도 권세도 과학도 문화도 스포츠도 예술도 다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인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살리지도 못하고 풍성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전한 의미의 지식과 능력과 은혜는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지혜와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을 풍요롭게하는 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러나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과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살리겠어요? 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겠어요? 아무도 그 아무것도 못합니다. 정치도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고, 예술도 달나라 별나라 가는 과학도 못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요10:10절 보세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요14:6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믿은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걸 모르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모르는 거 하나도 없다해도 생명의 도를 모르면 헛 똑똑이요, 헛 지식인이요, 헛 박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왜 표정들이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생명을 영원히 풍성하게 하는 지식과 믿음을 가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가장 똑똑한 사람, 가장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지옥과 마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똑똑하고 능력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하며 사세요. 이 시대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자부심과 삶의 양식도 가지고 사세요. 최고의 지식인이요, 최고의 지혜자로써 거기에 걸맞게 그 가장 고상한 지식을 바탕으로 거룩함과 의와 진리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며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여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때에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주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 대한 지식이 최고의 지혜이며 능력인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식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주님의 대속함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는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초죽음이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어 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습니다. 생명이 질긴 사람은 열흘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고 때로는 독수리들이 몰려와 산채로 살을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고통이 그 십자가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서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를 위하여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당해야 할 그 끔찍한 죄의 대가를,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처참한 지옥의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평화와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대안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없습니다. 돈으로도 안됩니다. 지식으로도 안됩니다. 과학으로도 안됩니다. 무슨 고상할 철학으로도 안됩니다. 천년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밖에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과 대신하여 받으신 멸시와 천대와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처절하고 끔찍한 참혹한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총이 찾아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찾아 들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날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생명이며, 소망이며, 가장 큰 힘이며 지혜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특별히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며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기적이고, 편협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못난 자아랑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십자가만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고 흠없으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우리의 죄과가 도말됨으로 비로소 새생명의 은총을 덧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된 인생을 살리는 유일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 엡 2: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을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화목한 관계로 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 장벽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려 버린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가장 한 무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강력한 가장 지혜로운 힘은 생명을 살리는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요, 힘이요, 가장 큰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총알 하나면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막대기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늘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터트리면 한꺼번에 수십만의 생명이 희생당합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지진과 해일과 테러와 화재와 전쟁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살리는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생명체에 생긴 조그만 상처하나도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에 조그마한 상처를 내기는 쉽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손가락 하나가 절단되기는 쉬우나 그것을 원상복구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더더구나 죽은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과연 무엇이 가장 큰 능력이겠습니까? 원자폭탄을 수없이 만들어서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여차하면 터뜨려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엄청난 군대를 훈련시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제력을 쌓고, 돈을 벌고, 엄청난 기술력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지식과 지혜와 기술을 쌓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능력 맞습니다. 그런 것들도 어느 정도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병을 보다 잘 치료하고,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윤리와 도덕과 종교와 철학도 어느 정도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감동을 주기도 하며 어느 정도 선한 길로 이끌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의 가치도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나 과학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하는 등의 세상적인 지혜와 힘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좀더 향상 시키고, 좀더 풍요롭게 하고, 좀더 가치있게 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을 건져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 여러분의 삶의 기초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주님께 삶의 근거를 두고 목적을 두고 그 바탕 위에서 다른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 안에 있는 그 힘과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주님의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가장 큰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무엇이 참된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생명에 관한 지식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지식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지혜가 진짜 지혜입니다. 온천하를 얻어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면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도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면 가장 무식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기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냐, 그렇게 무기력하게 붙잡혀서 어떻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 받은 십자가는 필요없으니 뭔가 좀 대단한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먹을 것 입을 것 실컷 먹고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거기서 내려오라, 거기서 뛰어 내려서 너를 구원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이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멸시합니다. 무시합니다. 그게 무슨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냐고, 그게 무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느냐고, 우리는 그 따위는 필요 없으니 돈이나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실상은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련한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재물과 권력과 인간의 이성이 무기력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헛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 20절과 25절 보세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20절)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절)

여러분, 지혜자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가 어디 있습니까? 참된 변사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지혜롭게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강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똑똑하겠습니까? 누가 우주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미래를 알겠습니까?

오직 참된 지혜하는 하나님 뿐입니다. 진짜 진짜 진진짜 선비는 주님 뿐입니다. 참된 변사는 주님뿐입니다. 참으로 강한 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참으로 참된 지식을 가진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 하나님 택하신 인류구원의 방법인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인류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도를 따르십시오. 누가 어떻게 세상없는 소리해도 십자가의 도가 지혜이고 능력이고 복음이고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도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생명얻는 지혜가 없습니다. 생명얻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얻는 도가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도만이 생명의 도요, 지혜의 도요, 능력의 도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때에 정말 큰 능력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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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생명의말씀]  


 


 


제목 : 영광스러운 흔적

말씀 : 갈6:14-18

1.영광스러운 흔적

캐나다에 메리라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메리의 엄마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어 보기가 매우 흉했습니다. 그래서 메리는 다른 아이들은 예쁜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데 자기는 얼굴이 너무 흉한 엄마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친구들도 네 엄마는 얼굴이 왜 그렇게 보기 싫으냐고 놀려대며 메리와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리가 울면서 유치원에서 돌아왔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또 메리를 놀린 것이었습니다. 메리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싫어. 엄마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놀린단 말야. 엄마가 창피해.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유치원에 오지 마.’

그러자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사진첩을 꺼내어 어린 딸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메리야, 자, 보렴. 엄마도 누구 못지않게 예뻤단다. 이게 불과 몇 년 전의 엄마의 얼굴이란다.” 거기에는 그녀의 꿈 많던 대학시절, 눈부시게 아름다운 결혼 때의 모습, 갓 난 메리를 안고 있는 예쁜 엄마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의 흉터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메리야, 네가 두 살 때란다. 엄마는 너를 재워 놓고 잠깐 시장에 다녀오려고 나왔단다. 그런데 한참을 가고 있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와 돌아다보니 우리 집 쪽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단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집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갔어. 그런데 정말 우리 집에 불이 붙어 있었단다. 나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집 안에 잠들어 있는 네 모습만이 눈에 선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 들어갔어. 사람들이 나를 붙들었지만 막무가내로 불타는 집속으로 뛰어 들어 갔어. 그리고 너를 이불로 싸서 끌어 앉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출구를 찾았다. 천만다행히 겨우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단다.

몇시간이 지난 뒤 내가 깨어났을 때는 내 몸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나는 너를 불렀다. 메리야, 메리야. 그 때 누군가가 말해 주었단다. 아기는 무사하다고, 메리는 다치지 않았다고....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너무나 감사해서 기도를 드렸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어도, 우리 집은 다 타버렸어도, 우리 메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 나의 모습은 이렇게 흉측한 모습이 되었지.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모습이 자랑스럽단다. 왜냐하면 이 흉한 얼굴은 너를 구한 자랑스러운 흔적이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메리는 엄마의 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메리 엄마의 얼굴의 흔적은 참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흔적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영광스러운 훈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얼굴은 다 일그러졌어도 그 얼굴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얼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의 흉터는 너무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상처요, 흔적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상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생의 가치나 고귀함이나 의미는 그저 혼자 평안하고 잘 먹고 잘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하나 편안하게 잘먹고 치장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도 아니고 영광스러운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얼마나 귀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와 의미와 행복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2:10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서 때로는 아픔이 될 때도 있겠지만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에게 진정한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대로 달려가다가 마음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상처를 입는다해도 그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고귀한 상처라는 것을 기억하며, 또 그렇게 할때에 진정한 행복도 영광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주님뜻대로 아름답게 사용하면 살아갈때에 진정 고귀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오늘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17절을 보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내 몸에 흔적이 있다. 영광스러운 상처, 영광스러운 훈장이 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을 말씀을 따랐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많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겪었다. 나에게는 그런 상처와 흔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부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최선을 다해 달려왔기에 그래서 영광스러운 흔적까지 가졌기에 그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할 자격은 없다.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주인의 소유물로서 낙인이 찍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낙인 이라는 말은 본래 종은 말은 아닙니다. 종이니까. 노예니까. 여러분, 안 그래요? 노예라는 낙인이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습니까? 아니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본래는 수치스러운 것이지요. 그런데 왜 바울은 종의 낙인이 찍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은 종인데 예수님의 종이니까. 낙인은 낙인인데 예수님의 낙인이니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생복락을 누릴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 아닙니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입니까? 세상에서 대통령 종노릇하는 사람도 얼마나 목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대통령 비서실장, 그게 결국 대통령의 종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도 얼마나 목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까? 무슨 대기업 총수 비서만 되어도 얼마나 대단하게 여깁니까? 물론 그래서 그들이 받아 누리는 것도 상당히 있습니다. 명예와 물질도 생깁니다. 속된 말로 끝 발도 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종입니까?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종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누가 예수님의 권세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도전할 자가 있습니까? 누가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영광과 그 생명과 그 은혜를 줄 주인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의 종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종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또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예수님께 어떻게 우리가 순종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설령 그렇게 종노릇하는 것이 때로 힘들기도 하고,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있다 해도 그래서 몸과 마음과 물질적으로 상처를 당한다 해도 그 받은 상처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자식을 위해서 혹은 그 밖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받은 고난과 상처와 아픈 흔적도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일진대 하물며 주님을 위하여 받은 상처와 아픔이라면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자녀와 이웃과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드린 것들도 아름다운 것일진대 하물며 주님을 위하여 드려진 것들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과 상처를 받는다면 장차 주님께 잘했다 칭찬받고 세상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될터이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어떤 주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주님이시며 생명의 주님이시며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주인이시라는 것을, 그래서 나에게 영원하고도 완전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실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자랑스럽게 여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런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런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움이 있더라고 혹시 상처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상처요 흔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의 삶에도 더욱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충성스러운 흔적

여러분, 바울이 가졌던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충성의 흔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기에 숱한 어려움과 고통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섬긴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몸과 마음에는 그로 인한 많은 상처와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짐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로마에서 여러번 감옥데 갇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태장으로 세번 맞았고,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내기도 하였고, 여러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의 위험을 당했고, 잠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얼마든지 편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문벌과 학벌과 돈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들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과정에서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오직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낙인이 찍혀 충성스럽게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삶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는 죽었다. 즉 나는 이제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필요하고 세상에 대하여 관계할 것을 오직 그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정녕 주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고난이긴 하였지만 영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흔적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큰 상급이 되는 흔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확실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떤 흔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이든 모두 흔적을 가지고 혹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향락의 흔적, 거짓의 흔적, 미움의 흔적, 도적질의 흔적, 술과 마약의 흔적, 시기와 질투의 흔적 등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그저 자신의 육신 평안함만을 추구하는 흔적을 남기며 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나름대로 사랑과 선행과 의로움을 흔적 등 나름대로 아름답고 훌륭한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상처와 흔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상처입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상처와 흔적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진정한 기쁨과 안식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상처와 흔적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상처와 흔적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험한 길이라도 이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흔적이요, 가장 자랑스러운 상처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이요,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에 우리는 각자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나 사명이나 직분이나 직책대로 거기에 걸맞는 흔적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에 다른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삶도 보다 기쁨이 은혜가 있고 아름답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그 아름다운 흔적, 그 생명의 흔적, 그 영광의 흔적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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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영의 눈을 활짝 뜹시다

 


제목:영의 눈을 활짝 뜹시다.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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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성령의 능력

 

 

 

제목 : 성령의 능력

말씀 : 창3:1-7

1.죄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여러분, 식충식물 아세요? 곤충 잡아먹는 식물 말입니다. 식충식물들은 잎이나 꽃으로 곤충을 잡아먹는데 이들은 먼저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여 곤충을 유인합니다. 곤충이 이 향기를 맡고 꽃으로 접근하여 앉으면 미끄럽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게 있습니다. 그 웅덩이 속에는 곤충을 녹여버리는 강력한 소화액이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은 그것도 모르고 향기에 취해 웅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들어가면 꽃잎이 닫혀 버리고 곤충은 그 안에서 녹아버려 식물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마귀가 인간을 사냥할 때 쓰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뭔가 향기로운 냄새를 보냅니다. 아름답고 편하고 즐겁고 향기롭고 기쁘게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뭔가 맛있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호기심이 발동되어 자꾸 가까이 가게 됩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가다가 그만 풍덩 빠져 들어가서 허우적거리다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귀의 수작에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에 속습니다. 성과 향락과 쾌락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넘어갑니다. 술과 담배와 마약과 놀음의 유혹에 속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안일함과 편안함의 달콤함 유혹에 속습니다. 그런 달콤한 유혹의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일날 일하면 그 만큼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행복할거라는 유혹의 덫에 걸려 주일날 교회도 못나오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 안하면 더 부자가 되어 더 행복할 줄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십일조 생활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니나노 먹고 마시자 하면 무슨 기쁨이나 행복이 있는 알고 거기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뭔가 한 방에 될 것 같은 달콤한 유혹에 빠져 노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뭔가 황홀하고 쾌감이 느껴지는 기분의 유혹에 빠져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행복할 줄 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남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세요. 거기는 혹시 죄된 육신과 생각으로 맛있고 재밌고 넉넉한 삶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안과 행복과 안식과 자유가 없습니다. 참된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존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는 고통과 상처와 죽음뿐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상) 보세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먹어도 괜찮다.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좋아진다. 하나님처럼 된다. 그러니까 먹어라. 그래서 나무의 실과를 보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에 탐스러웠습니다.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덜커덕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하고 지혜롭고 평안과 기쁨과 가치와 의미와 보람이 넘치는 삶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축복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종신토록 수고해야 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질병과 수고속에 살다가 마침내 죽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혹에 속으면 안됩니다. 사기꾼에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가짜에 속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먹이에도 진짜가 있고, 가까가 있습니다. 진짜는 양식이 있고, 가짜는 미끼입니다. 양식은 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만 미끼는 똑같이 먹는 것이지만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마귀가 던져놓은 아주 맛있게 생긴 미끼가 너무 많습니다. 돈의 미끼, 권력의 미끼, 향락의 미끼, 명예의 미끼, 편안함의 미끼, 자기 중심의 미끼, 지식의 미끼 등 수많은 미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언가 우리 앞에 그럴듯한 것이 있으면 이것이 양식인지 미끼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병들게 하고 고통받게 하고 마침내 죽게 하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인지 우리를 죽게 만드는 미끼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게 유혹인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음성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아무리 달콤하고 그럴듯하고 보기 좋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면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달콤한 마귀의 소리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에게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보람과 의미와 가치와 존귀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하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교묘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미끼를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유혹의 장소를 멀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먼저 마귀가 주는 미끼가 널려 있는 곳을 피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지뢰 전문가라도 지뢰가 널려 있는 지뢰밭으로 들어갔다가는 까딱하면 죽습니다. 세상에는 마귀가 묻어놓은 지뢰가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미끼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다니다가는 어느 순간에 낚시 바늘에 코를 꿸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유혹의 마수에 걸려들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지뢰가 터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장소와 시간 속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유혹을 당합니까?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으로 봄으로써 욕망이 발동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제 보게 됩니까? 죄의 장소에 가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서 보게 되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죄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꾸 보고 듣게 되면 그게 점점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죄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양식을 공급하지 않으면 죄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죄가 성장하고, 생명 양식을 공급하면 생명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죄의 양식이 뭡니까? 왜곡되고 악하고 죄된 것들을 가까이 하며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폭력, 절도, 강도, 간음, 향락, 도박, 술, 담배, 마약, 거짓, 미움, 증오, 원망, 불평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양식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까이하여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죄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죄의 욕망들이 점점 자라나 마침내 활활 타오르고, 그래서 결국 자신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와가 어떻게 유혹에 빠졌습니까? 그것은 그녀가 선악과나무 근처에 간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선악과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였으면 그 근처에도 가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 나무 근처에 갔고, 게다가 마귀와 다정하게 대화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습니까?

6절 상반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러니까 하와는 마귀가 유혹할 때 벌써 그 나무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 나무 아래 있으니까 마귀가 작전을 개시한 것입니다. 정말 저 열매를 먹으면 죽느냐고 했느냐? 그러자 하와는 친절하게 답변해 줍니다. 먹는 것은 물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무슨 말이냐,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 같이 된다. 그러니까 마음놓고 먹어라. 그럽니다. 이 말에 솔깃해진 하와가 나무를 보자 정말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너무나 탐스러운 열매여서 그만 덜커덕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나무아래 간 것도 잘못이고 게다가 마귀의 유혹에 친절하게 대답한 것도 잘못입니다. 아니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위험한 장소에 가기는 왜가며, 게다가 그런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마귀의 말장난에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뭡니까?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다윗도 보세요.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삼하11:2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러분, 이 때는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 중이어서 온 군대가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여 여유가 있었던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쉬며 낮잠을 즐기다가 한가롭게 지붕 위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만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만치 하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의 권한으로 그를 데리고 오라 하여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고 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은 있지 말아야 곳에 있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고, 결국 크나큰 죄를 짓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긴 그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에서 목욕을 합니까? 일부터 유혹이라도 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하긴 세상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다윗은 그곳에 있지 말아야 했습니다. 설령 눈에 보여도 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게 보이면 빨리 집안으로 도망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었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 바라보다가 결국 큰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근처에 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눈에 띄어도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공연히 근처에 얼씬 거리다가 못 볼 꼴 보고 영혼을 도둑질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잠23:31에서는 말씀합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포도주는 아름답습니다. 달콤합니다. 기분을 알딸딸하게 만듭니다. 찰랑찰랑대면서 사람을 유혹합니다. 더구나 오색불이 휘황찬란하게 번쩍번쩍 거리며 빛나는 불빛 아래서 보면 더욱 아름답게 반짝이며 유혹합니다. 그러면 침이 꼴꺽 넘어가고 그러면 결국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곳에 가까지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시고 싫어하시는 곳에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마십시오.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싸우고 죽이고 하는 그런 장소나 시간에는 근처에도 기웃거리지 마세요.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마세요. 향락과 오락과 도박과 음주가무가 있는 그런 곳에는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가면 자칫하면 그 유혹의 웅덩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맨날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려도 유혹에 빠지는 판에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어떻게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유혹에 빠집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상황이 문제입니다. 죄의 장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의 장소에서 죄와 무지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속에서 죄와 무지와 교제하고 그런 것들을 들으며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인생인양, 그것이 행복인양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식어집니까? 왜 강단에서 선포하는 말씀들이 오래가지 못합니까? 왜 천국과 지옥이 자꾸 의심이 갑니까? 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까? 세상에 발을 딛고 세상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 나라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소리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들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을 몇 십배 몇 백배 더 많이 말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그러면서 산속으로 들어가 살라는 것입니다. 빨리 천국으로 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들에 물들고 끌려다니지 않도록 주님을 가까이 하고, 거룩한 장소를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은 절대로 세상의 죄되고 악하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유혹의 장소를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전에서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수고하며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진리의 길, 생명의 길,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는 곳, 주님과의 교제가 있는 곳, 성실하게 진실하고 열심히 그런 곳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유혹의 장소를 피한다해도 그래도 유혹은 다가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몸담고 살고 있는 한 죄된 세상과의 접촉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있는 장소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안하고 승리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는 해야 합니다. 적이 공격해 오는데 변변한 무기하나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서만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분별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로마 공화정시대의 안토니우스는 황금의 혀를 가진 웅변가였고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최고의 장수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절세미인이었다고 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먼저 안토니우스와 함께 가장 유능한 장수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저를 유혹하여 결혼하여 케사리온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저가 암살 당하게 되고 그러자 어떻게든지 케사리온을 유리한 위치에 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결혼을 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클레오파트라도 더 이상 자신이 설 곳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이어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당대 최고의 장수도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능력과 용기와 의지와 지성 이런 것들 결코 유혹 앞에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오직 한가지 우리가 믿을만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여 말씀의 칼날로 물리쳐 버리는 길 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더럽고 추하고 죄된 장소와 시간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곳을 혐오하여 멀리하게 됩니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엡6:13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즉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경의 검 이런 것들로 무장하고 있어야 마귀사탄의 흉계와 유혹과 도전을 깨트려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유혹의 장소를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장소에 서성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은혜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와 섬김이 있는 곳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죄되고 추한 곳에는 가지도 말고, 달콤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들을 바르게 분별하여 물리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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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 주일저녁예배설교 :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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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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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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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행복한 인생

 

 


제 목 : 행복한 인생

말 씀 : 시103:1-5

1.너무나 큰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우총사진 보여주기) 주일날 아침부터 그것도 감사주일 아침부터 웬 무덤이냐고 하시겠지만 이게 무슨 무덤인지 아세요. 의우총이라고 소의 무덤과 묘비입니다. 이 의우총은 상주에 있는데 이 의우총이 세워진 유래는 이렇습니다.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의 서상모라는 분이 암송아지 한 마리를 사다 기르게 되었는데 이웃에 사는 김보배라는 할머니가 이 소를 너무 예뻐해서 오고가며 늘 쓰다듬어 주고 배추나 고구마나 옥수수 등 먹을 것을 종종 갖다 주곤 했답니다. 그렇게 송아지때부터 어미소가 될 때까지 아니 그 후로 약10년간 그렇게 이 소를 사랑해주다가 8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장례를 마친 다음날 이 소가 없어져 동네 사람들이 나서 찾았는데 글쎄 이 소가 김보배 할머니의 무덤에 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무덤은 외양간에서 2km 정도 떨어진 산 중에 있었는데 어떻게 찾아갔는지 거기에 가 있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소가 할머니의 산소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아들이 이 소가 하도 기특하고 고마워서 막걸리와 두부와 배추 등을 접대하며 조문객으로 예우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이 소가 19살의 나이로 늙어 죽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소를 극진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주었고, 상주시에서는 그 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로운 소의 무덤 ‘의우총’을 만들어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약간은 과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를 통해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됩니까? 사실 이 소뿐만 아니라 우리는 은혜 갚은 동물 특히 은혜 갚은 개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동물도 이와같이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하겠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안 그래요?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동물만 못해서야 어떻게 체면이 서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은혜를 안다면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이차적으로는 사람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누리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생명은 어디서 왔습니까? 물론 부모님이 주셨지요. 그럼 그 부모님은 어디서부터 오셨습니까? 물론 조부모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진화론을 사실로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찌해서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점점 진화해서 무슨 벌레 같은 것이 되고 좀더 진화해서 어류도 되고 파충류도 조류가 되고 그러다가 짐승이 되고 그 중 하나인 원숭이가 점점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학의 법칙에 의해서도 생명체는 결코 저절로 생겨날 수 없습니다. 설령 만에 하나 단세포 생명체가 생겼다해도 그 단세포 생명체가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사람까지 진화가 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안 그래요? 벌레의 어디에 인간의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유전자가 있기에 그게 사람까지 진화가 됩니까? 우주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빅뱅론이니 뭐니 어쩌구하는데그것도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생명이든 자연이든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이든 인간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물질, 생명, 육체는 물론 이성, 지성, 감성, 능력, 지혜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숨쉬고 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태양과 공기와 물과 양식을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1분 1초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상29:14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부모님의 은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부모님만 아닙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알고 생명을 얻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것은 물론 자동차, 스마트폰, 텔레비전, 냉장고, 문화시설, 체육시설, 이 부요함, 평화, 자유, 질서 이 모든 것들에 이웃이 함께 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우리가 누리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오로지 혼자만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맥추감사주일인데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물론 매일 매순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걸 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제 잘나서 저 혼자 사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알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또 최선을 다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의 삶속에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늘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너무나 많은 은혜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안다면 언제나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당연하고 그게 내가 네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습니까? 여러분, 지금 한번 눈을 감고 감사거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있습니다. 몸이 온전치 못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하고 편히 쉴 집이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와 질서가 있습니다. 태양이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그 태양아래서 온갖 식물과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마실 물이 있고,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있고,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동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고 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스마트폰도 있고,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고..... 여하간 있고 있고 있고 계속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자꾸만 없는 것, 부족한 것만 생각하며 가난뱅이처럼 삽니다. 자꾸만 남의 탓, 환경 탓, 상황 탓하며 불평불만을 터트립니다. 세상을 향해 에이 망할 놈의 세상, 에이 도적놈들 하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못난 것, 잘 못하는 것만 생각하며 부모 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미련할데가 어디 있습니까?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면 도대체 어쩔 셈입니까? 그런 사람은 암만 많이 줘봐야 소용없습니다.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줘도 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상황이나 소유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이고 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똑같이 믿음 생활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미 주신 것,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저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없는 것만 생각하며 맨날 달라고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아시는 살전5:16~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고, 또한 감사하는 자가 은혜를 아는 자요, 또한 그렇게 감사할 때에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더구나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와 무지로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3,4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그러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인생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심히 연약하고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르고 그저 제 잘난 멋에 살다가 그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만다행히도 우리가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할렐루야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엊그제 우리 교회 가까이에 계신 이웃분이 위암으로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고해서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할 만큼 엄중한 상황이었는데도 그래서 자칫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천만다행히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지 않아 수술이 잘 되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육체적인 생명도 너무나 귀한 것이니까 너무나 기쁜 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암을 고침 받은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조금 연장시킨 것일 뿐 얼마 있으면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도 또 죄와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야 한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릴 영생복락의 세상은 그야말로 고통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아픈 것이나 죽음의 그림자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라입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행복과 사랑과 은혜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인정을 하든 말든 그건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결론에 불과하고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의 은총을 입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혜택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생명과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도 늘 서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잘났건 못났건 능력이 많건 적건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가 최곱니다. 예수님이외는 이보다 소중한 존재가 없습니다. 세상의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나를 더 아껴주고 더 사랑해 주겠습니까? 어떤 다른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가 나를 위해서 그토록 수고해 주고 아껴주고 하겠습니까?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더 의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최곱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양육해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렇게 애타게 기도해 주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맨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해서 전해 드리겠습니까?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 있든지 감사하며 일해야 합니다. 직장이 있어 일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일 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직장을 통하여 내 가정의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농촌 환경이 많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농사지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농사를 통하여 가정을 꾸려오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아가 농사를 경영하여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나 교회에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나 우리가 정말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과 교우들과 직장동료들과 심지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표하며 어떤 형태로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삶의 자리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천국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축복이 오고, 감사하는 마음 속에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 그러겠습니가? 줘도줘도 감사는커녕 투덜거리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불만하면 줬던 것도 빼앗아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그 은혜와 사랑을 알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5절을 보십시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가까이하는데 어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어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사는 자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들로 충만케 채워주십니다.

 

또한 그렇게 감사하여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여 찬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어 창공의 지배자인 독수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나 염려없이 창공을 누비듯이 그 삶이 힘차고 능력이 있고 자유와 평안이 넘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히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삶에 힘이 있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게 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욕심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둔 것들이 대들지 못하고 설령 대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넉넉히 이겨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충만하게 덧입어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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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풍성한 은혜

 

 


제목 : 은혜를 풍성하게 합시다.

말씀 : 고후8:1~7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안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에서 헌금을 은근히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헌금 때문에 교회 오기를 꺼려하기도 하고 성도들 중에도 헌금으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거나 때론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 돈에 관한 문제는 교회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상당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친구나 이웃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간이나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돈 문제는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헌금에 관한 문제는 가능한 회피하고 싶고 가급적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함도 돌리지 않고, 강단에서 헌금하신 분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이름을 부르면 헌금한 것을 광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리지 못한 분은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하신 분을 확인해 드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보에는 싣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은 이래저래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속 침묵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계속 덮고 간다면 직무유기이기 때문에 부득불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일조나 기타 헌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순종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신14:22에서는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고, 레27:32절에서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고 하셨고, 눅11:42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모셨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종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요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복의 근원이십니다. 분명히 진리이시고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 안에 우리가 살길이 있습니다. 복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 따라서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릴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2.헌금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두 번째 의미는 헌금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요, 믿음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6:21절을 보겠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는 몸도 물질도 시간도 열정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 큰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오실 거라고 여겼던 분들 중에 못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물론 다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왠지 좀 서운했습니다. 왜 서운했을까요? 축의금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분들의 저에 대한 마음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면 다른 이유를 일단 접어놓고 왔을 터인데 나라는 존재가 그들이 다른 것을 포기할 만큼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못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농사일이나 기타 다른 모든 일을 젖혀 놓고 가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가 농사일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이 가장 크고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라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 젖혀두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몸과 물질과 시간과 열정이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유행가에 보면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넘어 무조건 달려가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이 부르면 열일 젖혀 놓고 그곳이 어디든 저 땅 끝까지라도 달려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별도 달도 다따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까지 따라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결코 지옥까지는 따라가면 안됩니다.

여하튼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마음과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져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 믿음과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몸과 물질과 시간이 그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지 않겠습니까? 정녕 모든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 없어지는 것이고 저 하늘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그래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그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 주신 주님,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앞에 드리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여러분도 진정 자유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헌금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 마음과 믿음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고린도교회도 이 은혜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헌금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은혜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또 4절에서는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라는 말씀이 있고, 6절에서는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7절에서는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베풀어주신 혜택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조건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총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구원받은 것 뿐 아니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할렐루야 찬송이 나오고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을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귀히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힘들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힘껏 헌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보십시오. 극심한 가난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도리어 힘에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들도 어려운데 힘에 넘치도록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받은 바 너무나 큰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이 없겠습니까? 이런 감사가 있다면 어찌 응답이 없겠으며 어찌 섬김과 헌신과 드림이 없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받으면 세상의 것들은 실상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 숨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의 지식 권세 명예 물질 없어도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감사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래서 물질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고 어찌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그런 삶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여기서 앞당겨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난 속에서도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힘에 겹도록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인들이 받았던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은헤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믿게 된 것이 은혜중의 은혜요, 예수님 믿고 보니 내 맘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많이 얻은 것이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장 부요한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사용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영혼속으로 온전히 깊이 깨닫고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심령이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그래서 심령이 더욱 부요해져서 정말 감사 충만, 은혜 충만, 기쁨 충만한 인생이 되시고 나아가 주님께나 이웃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헌금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마음을 드리는 것이요,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나아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드리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에 우리를 위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음의 문제요, 은혜에 대한 응답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더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께 자신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드렸고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드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물질도 능력도 지혜도 이성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걸 알고 인정한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과 헌금과 섬김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이나 헌신이 왜 힘이 듭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내가 번 돈이기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상29:14절을 보십시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생명, 지혜, 능력, 의지, 육신, 땅, 하늘, 공기, 물 다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사실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면서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날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가 기분이 너무 좋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소가 기특하게도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어. 그래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릴 거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내는 기분이 너무 좋아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믿음이 좀 들었나 봅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남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송아지 한 마리가 죽었어.’ 그래서 부인이 누구 송아지가 죽었느냐고 묻자 남편은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을까요?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 않을까요? 뭔가 무슨 변명거리를 만들어 일단 내 몫을 먼저 떼어 놓고 주님의 몫에서 제해 버리는 거지요.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생명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의 몫은 그대로 놔두고 내 몫에서 제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조금 무거운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냥 회피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요,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지,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면, 우리가 누릴 저 영광의 나라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굉장한 것이라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은혜로운 마음, 넉넉한 마음, 풍성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주의 역사 이루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부요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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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포기와 행복

 

 

 


말씀 : 마5:1-12

제목 : 행복과 포기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부딪치는 문제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있으나 막상 교회에 가려고 해도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희생해야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일종의 취미생활이나 계모임 혹은 인격수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투자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것에 비하여 잃는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겨져 잘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은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갖는 생각인지 모른다. 처음에야 어차피 영적인 생명의 진리,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알지 못하고 있음으로 단순히 인격수양이나 혹은 질병의 고침이나 혹은 마음의 위안 등등의 목적으로 나오기가 십중팔구인데 그것을 위한 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솔직히 나도 그랬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전에는 취미생활로 서예와 바둑을 주로 했었다. 이 취미생활은 둘 다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때는 먹 갈기를 배우고, 그 다음에는 수직 긋기와 수평 긋기, 사선 긋기 등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그냥 쭉쭉 긋는 것이 아니다. 붓 끝에 힘이 들어가야 힘 있는 글씨가 되기 때문에 붓 끝에 힘을 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먹을 갈고, 줄긋기 연습하고 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물론 모방이다. 남의 글씨를 계속 반복해서 쓰는 것이다. 한 글자를 제법 비슷하게 흉내를 내려면 천 번을 써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만번을 쓰면 그 글씨에 통달하여 자신의 글씨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엄청난 시간과 정열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서예이다.

바둑도 그렇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도 있듯이 바둑을 두다보면 지면 열이 받아서 또 두어야 하고, 이기면 기분이 좋아서 또 두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너 시간은 언제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밥 먹으러 빨리 안온다고 잔소리도 제법 들었다. 또 낚시도 제법 다녔고, 볼링도 좀 쳤다.

그래서 이러한 취미생활을 즐기다보면 신앙생활을 잘하기가 어렵다. 때로는 교회가 너무 사람을 옭아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평안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도리어 속박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헌금 생활도 그렇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다. 회사생활하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기타 다른 헌금 계산해 보면 그것을 계속해서 적금을 붓는다면 노후대책이 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 먼저 들어 올바른 헌금생활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사실은 처음 믿음 생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갈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교회에 다니려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일까?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그것은 더 좋고, 더 유익하고, 더 기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인간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즐겁고 더 평안하고 더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확실하고, 유일한 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생활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고 구속당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세상 살다보면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즐기고 싶은 일도 많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입고 싶은 것도 많다. 이것 저것 눈치보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런데 사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러한 생활가운데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아마도 남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술, 담배의 문제일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좀 바뀌어 있지만 옛날에는 술 담배를 못하면 사회생활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술 담배를 못하면 사람이 째째해지고 좁쌀 영감처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화투놀이도 그렇다. 일반인들 사이에 화투놀이로 재미거리를 삼는 사람도 많다.

회사에 다닐때도 끄떡하면 회식이다, 무슨 경조사다 하여 회사 동료들이 모일 기회가 많았고, 모였다하면 의례히 술⋅담배와 함께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또 어느 곳에 모여 앉아서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처음에 남자들이 교회에 올 때 많이 느끼는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 재미로 살았는데 그런 것 다 포기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낙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런 낙을 포기하면 도대체 인생의 낙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취미생활이 아니더라도 아까 말했다시피 바둑이나 서예나 낚시나 등산, 가족 나들이 등등의 건전한 취미 생활도 그렇다. 사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신앙생활하지 않을 때는 주일날을 잡아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가족간에 나들이도 가고 마음놓고 앉아서 바둑도 두고 글씨도 쓰고 하는데 주일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면 도대체 내 생활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좀더 넓고 높은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좀더 나은 것을 위한, 좀더 가치있는 것을 위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위한 가장 현명한 투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투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라. 우리는 분명 무언가 나은 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도둑질이나 강도짓이나 간음이나 이런 적극적인 악을 행하는 사람도 무언가 나름대로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무언가 자신에게 유익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되고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될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잠시잠깐이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유익한 것들도 그렇다.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언가 희생과 투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농사도 그렇다.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봄부터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해주고, 거름과 물을 주고, 병충해를 방제해주면서 뙤약볕 아래서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 다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못먹고 열심히 힘써야 하는 것이다.

박사도 그렇다. 정말 제대로 된 박사노릇하려면 정말 힘들다. 심지어는 가정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벌 사장도 그렇다. 물론 호의호식하며 대접받으며 사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직장의 중역만되어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어 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수많은 투자와 인내와 자기포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더 많은 투자와 더 많은 자기포기와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다면 신앙생활은 어떨까? 물론 동일하다. 신앙생활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어서 보다 행복하게 보다 기쁘게 보다 소망가운데 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익하고 좋은 것을 위해서 무언가를 투자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위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앙생활의 유익은 세상에서 얻는 다른 어떤 유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돈과도 명예와도 권력과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유익을 준다. 기쁨을 준다. 은혜를 준다. 생명의 풍성함을 준다.

그러므로 사실상 잃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 더 좋은 것을 위하여 보다 덜 좋은 것은 당연히 포기함이 현명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치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12:24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져 썩으면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희생당하여 없어지는 것 같지만 더 많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원문의 의미는 「재산을 상실하고 불행속에서 방황하는 거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이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래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 것 이것저것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인데 왜냐? 이런 사람은 세상의 것 대신에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잃어버린 대신에 더 나은 천국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정말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4절도 그렇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무슨 말씀인가?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죄와 부족함과 미련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 진정한 위로가 그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안식과 위로와 소망이 그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10절에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복된 사람인데 왜냐, 바로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역설의 진리다. 진정 세상 것 욕심 부리지 않고 오직 진리 때문에, 생명의 역사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을 받는 자 그 사람이 부유하고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 천국을 소유하게 되니까,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저 천국에 가서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14:27에서 또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수없이 자기부인과 포기와 희생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말씀들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고통스럽게 어렵게 무엇인가에 얽매어서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평안을 주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또 요8:32에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누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너무 잃는 것이 많지 않느냐고 묻거든 그것은 더 나은, 더 보람있는, 더 가치있는, 더 자유로운, 더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현명하고도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사실을 말해주자.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바르게 알자. 정말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구속이 아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물론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다. 진정한 평안을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해서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포기해야 할 부분은 포기하고 드려야 할 것은 드리고 헌신해야 할 부분은 헌신하면서 그 안에서 정말이지 세상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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