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뜻이 있다

 

 

 

 

 

프랭클린 그래함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 ⓒ게이트웨이 교회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믿는 자들을 부르실 때,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예외없이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텍사스 사우스레이크에 소재한 게이트웨이교회 주일 예배 설교에서 그래함 목사는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씨름하고 있는 많은 신자들이 있다. ‘너무 어리진 않은지, 너무 늙진 않은지, 준비가 안 된 건 아닌지’ 너무 많은 고민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함 목사가 전한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세부적인 가르침’은 △비용 지불 △우선 순위 △순종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비용 지불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께 초점을 맞춰야 하고, 다른 무엇보다 심지어 자신보다 그분께 헌신돼 있어야 한다. 그분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비용을 반드시 고려한 후,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14:25).

 

우선 순위 세우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길을 가시다가 한 사람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는 ‘먼저 아버지 장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남성은 예수님께 그분을 따르겠다고 했으나 먼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해야한다고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고 말씀하셨다.

순종 

순종을 드리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시몬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라고 대답하고 이에 순종했다.​

 

순종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6~7)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시몬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깊은 회개를 하게 된다.

그래함 목사는 “예수님은 이들을 넘치게 축복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초청하셨다. 이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예수를 따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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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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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주부들을 위한 기도

 

 

 

 

저희들을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

매순간 순간마다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인으로서 환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참고 견디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말씀대로 살게 하시고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기 원합니다.

저희들이 악한 사람들의 죄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며,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맏겨주신 일에 충실하고 이웃의 아픔을 싸매어 주는 성숙한 그리스도 인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이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서도 양심을 속이지 않으며 선하고 거룩하게 살게하여 주십시오. 

 

이 시간에는 가정에서 수고하는 주부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가족의 건강을 지키고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주부들과 함께 하여 주십시오.

가정의 건강과 화목은 그 가정의 주부에게 달려있음을 압니다.

먼저는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가 되도록 인도 하시고, 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훈육으로 영육을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부지런함과 자상함과 사랑으로 가족들을 돌아보게 해주십시오.

부모님을 공양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사랑의 실천자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매일 매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바른 모습을 보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가정에 주님의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우리 가정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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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기도문 Wednesday worship prayer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성육신이 없었다면 우리가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음을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에 감사할 줄을 모르고 죄인의 속성을 벗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늘 체험하면서도 주님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아온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맺히게 하시고 주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강권적인 간섭하심에 순종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사람이 보기에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사랑의 열매, 봉사의 열매, 섬김의 열매도 가득히 맺히게 하시고 충성의 열매, 헌신의 열매도 가득히 맺히게 하셔서, 주님의 오심을 진정으로 축하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 안에서만 주님의 뜻을 본받아 산다고 외치고 다짐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진정한 이웃으로 다가갈 수 있는 주님의 귀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번 성탄절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죄에 고통 받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주님의 사랑이 곳곳에 스며드는 기쁜 성탄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 끼의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여 주린 배를 물로 채워야 하는 슬픔에 잠긴 자들을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때일수록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많아지게 하시고 소망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하여 단 위에 서신 목사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주님의 축복이 넘치는 말씀을 전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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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순종하는 청지기

 

 

 

찬송 : ‘내 평생 소원 이것뿐’ 450장(통 376)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44장 1∼6절 
 
 말씀 :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고 하자 청지기는 ‘요셉의 명령대로’ 했습니다(2절). 그뿐 아니라 형제들을 쫒아가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며 형제들의 짐 속에서 은잔을 찾아 추궁해 다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그대로 따라 행합니다. 이 청지기 정말 탐납니다. 43장에도 이 청지기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요셉의 명대로 하여’(43:17)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청지기는 아무런 능력이나 힘이 없는 자일까요.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43:23) 이 말씀에서처럼 형제들이 두려워 재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재정의 문제가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므온을 그들에게 내어줍니다. 물론 요셉의 지시가 있었겠지만 한 나라의 총리 집 청지기라면 어느 정도 권력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요셉의 지시에 단 한 번도 토를 단다거나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재물을 주는 것도, 양식을 그것도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주는 것도, 은잔을 자루에 넣으라는 것은 무엇이며 또 쫓아가서 도둑으로 몰아 다시 잡아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요셉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조건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자가 청지기입니다.

 

베냐민에게서 은잔이 나오자 요셉은 베냐민만 내버려두고 다른 형제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명합니다. 그러자 유다는 요셉에게 호소합니다. 가족 이야기며 아버지 이야기, 지금까지의 사연들과 베냐민이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말하고 차라리 자기가 대신 머물겠노라고 요청합니다. 요셉은 눈물이 났습니다. 원망과 함께 고마웠습니다.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삶도 내어 주는 형의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유다가 노년에 얻은 아들을 다시 잃을까, 아버지의 죽음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형의 마음이 요셉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요셉은 이제 확신합니다.

 

형들의 마음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말입니다. 어떻게 요셉에게 확신을 주었습니까. 유다의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면 꾸밈이 없습니다. 그냥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합니다. 솔직함이 방법입니다. 그 솔직함이 요셉의 마음에 확신을 준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청지기로 부르시고 삼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는데 있어 때로는 미련하리만큼 철저하게 순종하는 청지기가 되게 하시고, 그로 인해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문제 가운데 솔직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방일섭 목사(서울 두모갓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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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 유월절과 성찬식

 

 


유월절과 성찬식!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월절이 마지막으로 행해졌다. 그 후 유월절은 주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양고기와 쓴 나물, 무교병의 유월절 음식은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성찬식으로 바꾸셨을까. 유월절은 애굽에서 출애굽 직전 급박했던 그 밤에 행해졌던 일이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셨다.

 

그 밤 어린양의 피는 죽음을 넘어가게(PASS over)하는 능력의 피였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위대한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 유월절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는 일에 대해 결코 타협하시지 않으셨다. 히스기야와 요시아 왕은 유월절을 잘 지킨 왕으로 높이 평가하셨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명절이었다. 출애굽 후에는 시내 산에서, 그리고 법궤가 만들어진 후에는 법궤가 있는 곳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법궤는 어깨에 메어 옮겨 다니다가 드디어 다윗의 소원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후 예루살렘에 머물게 된다. 그 후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된다. 예수님께서도 12세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신 기록이 나와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 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 하에서 신음하던 유대 백성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부른다. 예수님 당시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비롯한 유대인의 명절에 1년에 3번 혹은 최소한 한 번이라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때 그들은 1년분의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고 약 한 달 정도씩 머무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유월절과 오순절, 장막절에 예루살렘은 매우 번화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1000년 된 도시 예루살렘에서 1400년 된 명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를 지시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며 어린양의 피를 당신께서 대신하시기로 선언하셨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들어 축사하신 후 이것은 우리를 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니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주의 성찬식이다.

유월절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순종이 필요했다. 그리고 성찬식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기념하고,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다. 어제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림을 일컬어 기억상실증이라 말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한 책 성경을 주심을 올 추수감사절에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조병호 목사(성경통독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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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의 자세  / The attitude of prayer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감람산에서의 기도는 응답되는 기도의 해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 특징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구했습니다(눅22:42).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22장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두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오셨지만 감람산에서의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워지기를 원하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이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소원하셨습니다.
실로 오늘날 보통의 기도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하나님뜻대로 되기를 원하시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주기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워 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실 때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응답받는 기도를 알기 원하십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2. .간절한 기도이셨습니다(눅22:44).
예수님의 감람산에서의 기도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간절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22:44)고 증거합니다.
 "힘쓰고 애쓰셨다"는 표현에서 "힘쓰고"란 단어는 헬라어 "아고니아"입니다.
이것은 신약에 단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는 "온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임박한 결정이나 위험을 앞두고
 온 힘을 최상으로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핏방울"이란 말은 "약간의 핏방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양의 응고된 핏덩어리를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전쟁을 치루시는 모습으로
 온 힘을 기도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엄청나게 많은 땀을 비오듯이 땅에 흘리셨고,
땀이 응고된 핏덩어리처럼 땅에 계속적으로 떨어지고 계셨습니다.
전투적인 자세로 온 힘을 집중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모습으로 기도하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셨기에 예수님은 결국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응답받는 기도를 원하십니까?

간절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은 전투적인 자세 곧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입니다(약5:17;눅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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