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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금요저녁예배설교 /금요철야예배설교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로마서 3:1-2)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루려면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의 사명이란 밝은 세상을 만드는 것, 한 마디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착하고 의롭고 정직한 세상입니다. 빛의 열매가 그대로 나타나는 세상이 제일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물질문명이 발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이 되고 기름이 펑펑 나며 억대 부자가 되는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도시인 뉴욕을 멀리서 보면 백층 넘는 빌딩들이 있고 자유의 여신상 등이 보이는 등 참 멋집니다. 제가 뉴욕에 79년도에 처음에 가서 혼자 돌아다니고 UN본부, 자유의 여신상을 꼭대기까지 돌아다녔는데 참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서 제가 혼자 계신 백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제일 놀란 것은 멋지게 봤던 뉴욕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서울, 부산보다 더 지저분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지저분함에 너무 실망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뉴욕에 가난한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백인들은 뉴욕에서 1,2시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폭력, 마약 등 너무 죄악이 관영해서 아파트 값도 뉴욕에서 멀수록 비싼 것입니다. 세계적인 제일 첨단을 걷는다는 도시, 죄악이 관영하는 그런 곳이어서 불심판이 임하면 제일 먼저 임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세계의 돈이 다 모이고 예술가가 모여도 그런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뉴욕을 부러워할 것이 없이 부산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유명한 교회 목사님들도 우리 교회에 오시면 반해서 또 오시겠다고 하시고 참 좋아하십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경제, 물질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요새 잘 사는 사람은 잘 살아도 얼마나 사회가 부패했습니까! 얼마나 청소년들이 타락하기 쉽습니까! 지구상에 우리나라처럼 아파트마다 위성방송이 들어오는 곳은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다 타락시키려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도 특별히 돈을 줘야 위성파를 볼 수 있어서 웬만한 집은 볼 수 없습니다. 일본 역시 돈을 집어넣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수출이 11위정도 하는 대단한 나라인데도 더 잘 살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물질이 없어서 망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나라 백성이 어떤 국민이 되느냐 입니다. 거짓이 가득한 국민이 되는지 어떤 국민이 되느냐에 따라 살기 좋을 수도 지옥 같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되려면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려면 하나 더 교훈을 주는 것이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죄를 정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심으면 선을, 악을 심으면 악을, 의를 심으면 의를, 불의를 심으면 불의를, 정직을 심으면 정직을,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증오를 심으면 증오를, 남을 비판하면 비판받게 되고, 남을 정죄하면 정죄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왜냐하면 자신도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다 보면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 세상의 누가 남을 판단할 자격이 있고 남을 정죄할 자격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경에도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도 허물이 많았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믿음이 부족했겠지만 아내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해서 두 번이나 빼앗기는 것입니다. 부인은 두 번이나 남의 품에 안겨도 자신은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겁합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된다고 해도 하갈을 붙여주니까 못 이기는 척 이스마엘을 얻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도 허물이 많은 것입니다.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그렇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 임신시키고 그 남편은 죽이는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죄악 중 극악한 것은 다 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물론 주님을 몰랐던 때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때리는 등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하여튼 성경에 모든 인물을 봐도 저와 여러분을 봐도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죄와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을 받아야 마땅한 그런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이 어떻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까!

[교만한 사람이 남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양, 나는 마치 죄가 없는 의인인 것처럼 남을 판단하면 그 사람은 양심에 화인을 맞던지 교만함에 영안이 어두워진 사람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영안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면 자신의 죄와 허물은 안 보입니다. 왜 이 세상이 서로 욕하고 판단합니까?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어떻든지 남 흉보고 욕하고 판단하므로 세상이 골치 아픈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판단하면 그 사람은 입이 없습니까? 그 사람 역시 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교만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습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16:5)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시면 겸손하십시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잠 6:16-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의 첫 번째가 교만한 사람의 눈인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세상에서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내가 남보다 신앙생활 잘 할 때입니다. 남보다 기도 많이 할 때, 헌금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더 헌신할 때, 남보다 공부 잘하고 부자 됐을 때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조심하십시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가난하게 하셔서 지렁이 밟듯이 계속 밟으셨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밟으셔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렇게 밟으셨으니까 이만하지 안 그러셨으면 나같이 교만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교만한 줄 아시고 나를 짓밟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그 교만의 뿌리가 남아서 사람을 볼 때 판단합니다. 사람들을 볼 때 점수로 봅니다. 이게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내가 사람을 보는 것이 하나님이 보는 것과 같습니까? 제가 목사님을 볼 때도 평가를 하면서 고생 꽤나 하겠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게 미우셨겠습니까? 저는 그냥 사람을 보는 대로 판단한 것뿐인데 그것이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판단을 해서 그대로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바르게 올바르게 기도도 많이 하고 목회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를 판단하고 욕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참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어느 날 제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판단만하고 울어주지 않고 품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사랑이 없는 교만한 인간인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 때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어디로 가든지 욕을 먹는다고 합니다. 내가 교만한 순간에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욕을 먹는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교만한지 생각해보십시오. 교만이 있으면 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일을 잘 해도 좋은 일을 해도 욕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 16:18)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잠 15:25) 하나님이 하시면 다 망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벧전 5:5) 왜 교만한 자를 원수처럼 대적하시느냐?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려 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잠 14:3)

[교만한 자는 충고를 받지 않기 때문에 망합니다.]

교만한 자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망과 충고를 잘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잠 15:10-12)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망하고 죽는 길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누가 충고해주는 것을 잘 듣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칭찬해주는 사람만 좋아하지 않고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화가 나고 기분 나빠도 잘 참고 받아주는 것은 보약 중 보약이고 축복 중 축복입니다.
어떤 목사님을 헐뜯는 사람들이 그분의 여러 죄를 폭로하면서 괴롭혔는데 그 목사님은 반항도 싸우지도 않고 ‘나는 그것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하셨습니다. 그런 목사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의롭다고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그 어려움을 조금도 눈을 껌벅이지 않고 이기시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도 듣지 않아서 망합니다.]

교만한 자가 망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도 듣지 않아서입니다. 사람의 책망하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도 망하고 하나님을 경고를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교만한 자가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들을찌어다, 귀를 기울일찌어다, 교만하지 말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5-17) 교만한 마음이 사람을 완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 줄 알고, 하나님이 없어도 살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백성이 그렇게 교만하게 살다가 나중에 사로잡혀서 죽을 것을 알고 괴로워하시는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항상 겸손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아니면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내가 죄인이라고 감사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압니다. 예를 들어서 병이 들었다가 나으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다가 나은 것이 감사합니까, 병이 안 드는 것이 감사합니까? 평소에 감사하십시오. 병에 걸려 수술하면서 아팠다가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겠습니까? 아예 병들지 않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도 많지만 기도하지 않고도 건강하고 밥 잘 먹고 소화하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소화가 안 돼서 약을 먹으면서 ‘건강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것보다 약 먹지 않고도 건강한 것을 감사하십시오. 손가락이 여섯 개가 아닌 것을 감사하십시오. 감사할 것이 정말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몸이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주일에 다섯 번씩 설교하는 것이 참 대단한데 저에게 사인이 옵니다. 그러면 저는 준비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고 내가 언제 천국 갈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합니다. 가슴이 아프고 할 때 ‘앗, 사인을 주시는구나.’ 하며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면 모든 욕심이 없어집니다.
자기 건강을 믿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보는 것, 귀가 들리는 것, 듣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듣게 해주신 것, 거저 주신 은혜와 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해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압니다. 자신이 제일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남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고백은 문학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 은혜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져서 자신의 약함을 알게 됩니다. 은혜 받으면 겸손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5:33)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이 세상에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시집가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너 없으면 못 사는 줄 알아?’하는 태도는 미련하고 가정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여자는 세상에 무엇이든 집에서는 겸손해야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어딜 가든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남자가 목숨 걸고 사랑해줄 것입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죄가 많고 허물이 많고 과거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내 죄와 허물을 알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만복의 근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항상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둘째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은 항상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 그래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보면 참 기쁘실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긍휼을 더 원한다는 것은 죄인끼리 싸우며 제사를 지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긍휼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5-37) 37절을 조금 바꾸면 비판하면 비판받고 정죄하면 정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너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원수 노릇하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원수에게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즉 좋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한 것처럼 우리도 자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같이 못된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판단, 정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과 그의 후손에게 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인데 친 아들같이 여겨서 늘 같이 한자리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다윗이 큰 죄를 범한 적이 있음에도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은 곧 주님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늘 죽이려고 따라다니던 그 원수.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던 원수가 죽었을 때, 통곡하며 크게 장사를 지내주고 그 자손들에게 선대했었습니다. 다윗이 한 번 실수를 해도 그의 죽을 때까지 삶은 너무 자비하고 인자하며 주님이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시 18:25) 사무엘하 22:26절에도 이 시편 내용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하신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도 문제가 있거나 직장에 문제가 있거나 여러분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시고 내 원수라도 사랑하고 선대하며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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