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을 위한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어느덧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서 다가오는 겨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실로 나무들의 잎이 무성했던 여름철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고 우리들의 완악한 모습만이 남지않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저희들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함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또한 저희들의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음을 확신케 해주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오직 하나님 만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저희들로 늘 구원의 확신 속에 감격하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특별히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간구합니다.

먼저 저들에게 하나님의 맡기신 막중한 소임을 감당하기에 부적합 함이 없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저들의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고 저들의 수고가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나라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살찌게 하시고 나아가 이민족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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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은 왜 이단인가?

 

 

   

유일한 참 교회? 교황은 페트로의 후예?  


김삼
ssvc02@gmail.com



교회의 진리 전달력이 약화되면서 종교 문제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얼마전 필자에게 온 한 편지는 혼기가 찬 젊은 아들이 천주교 여성과 사귀는 데 대한 한 신자 어머니의 고민 내용이었다. 드물지 않은 사례들이다. 나름대로 해결하기란 수월치 않은 문제다.

이런 현상은 신교회가 카톨릭의 문제점에 대한 적절히 대처하지않고 있는 탓이다. 마치 한국이 친북 좌경 세력들에게 이렇다할 대처를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진리의 바위 위에 굳건히 서있지 않고 모래 위에 선 교회들은 언젠가 무너질 날이 올 것이며 그 날은 결코 멀지 않다.


▲바티칸 교황청 산 피에트로 광장에 서있는 \'초대교황\' 페트로 상.     © 김삼  

대다수 이단비평가들은 한국의 소규모 이단들을 열렬히 비판하면서 정작 카톨릭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경우가 흔하다. 일부 기독교단체나 신학자/목회자들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감히 함부로 카톨릭을 이단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카톨릭은 이단비평의 마지막 수순인지도 모른다.명심할 것은 카톨릭은 중세 종교개혁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이단'시 한다는 사실이다. 적반하장 격이지만 말이다.  

오해 말라. 필자는 천주교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잘 아는 친지들도 있다. 여느 신자와 비신자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다. 필자가 이단시하는 대상은 비성서적인 바티칸 교황청과 카톨릭교회의 교리다. 약10억 된다는 세계 카톨릭 신도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이 교황청의 교리와 제도에 매인 노예들이나 다름없다.  

이단은 별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방향이면 이단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에 버금가게 말씀을 높이셨다. 성경은 성령이 친히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기록하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더 나아가 예수 크리스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추호라도, 파리똥 만큼이라도 가감하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승복하기보다 자기 뜻대로 맘대로 '자유자재'로 가감해온 바티칸 신학자들과 역대 교황들도 저주 받아 마땅한 대상이다. 이건 필자자신의 생각과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의 증언이다(계22:18,19). 할렐루야, 심판주 야훼 하나님과 재판장 예수 크리스토, 분별하시는 성령님께 영원히 영광!

카톨릭이 '이단'으로 규정받기엔 조건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다. 알고보면 카톨릭은 그 어느 기독교 계열 종파보다도 이단시비 여지가 있는 대표적 '문제집단'의 하나다.
그런데도 신교 일각에서, 특히 교계단체들이 카톨릭교회를 마치 험한 세상 길에 다정한 길벗이라도 되는 양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뭘까? 몇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우선 카톨릭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단순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기독교계의 어느 이단종파보다도 더 규모가 큰 집단이다. 그래서 "10억이나 되는 카톨릭이 다 이단일까?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차 논할 것이다.

둘째로 개신교가 카톨릭으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전통을 '공통요소'로 지닌다. 예를 들면 일부 예배의식의 유형, 사도신경, 사도신경/주기도의 의례적 사용, 물방울 세례, 어린이 세례, 일부 교파의 '사제' 제도 등이다. 또 성삼위일체 개념과 용언도 카톨릭과 공유한다. 그러기에 많은 교회들이 카톨릭과 '공통점'을 느끼는지 모른다.

셋째로 신교는 카톨릭에서 배태되어 갈려나온 존재로 자처하면서 카톨릭을 '모교회'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하기야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이 본래 카톨릭 사제였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인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로마에서 배태돼 나온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왔다. 교회의 근원은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임을 우린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루살렘교회는 하늘에서 오신 성령으로 태동됐기에 교회의 뿌리는 하늘이지 로마가 아닌 것이다.

  카톨릭은 유일한 참 교회?

로마교황 보니파체 8세는 바티칸 칙서 'Unam Sanctam'(1302년)에서 "..하나의 거룩한 카톨릭, 사도적 교회가 있을 뿐..이 교회 밖엔 구원이나 죄의 보속이 없다.." 라며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인류가 절대로 로마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니파체 자신이 교회의 머리 즉 크리스토가 된 셈이다. 카톨릭 유일주의의 이 기본원칙은 현재까지 변함 없다.  


▲교황 보니파체 8세 무덤 앞 석상.     ©김삼  

자고로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우리 교회밖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경우 이단이다. 바꿔말하면 "어떤 교회건 다른 교회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지상교회는 이단이다. 그런 이단이 어디 한둘인가. 구원이 있는 교회는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명실공히 크리스토를 머리로 하며 그의 몸된,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교회 즉 거듭난 신자들의 연결체일 뿐이다.

바티칸 카톨릭은 제도적, 가시적 교회에 불과한데도 짐짓 우주에 단하나뿐인 공교회, 유일한 교회로 행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 [카톨릭교회=거듭난 신자집단], [가시적 교회제도=비가시적 우주교회], [카톨릭교회=천국교회] 같은 주장은 카톨릭 신학자들과 교황들만 할 수 있는 황당한 헛소리고 망언중 망언이다!  

이런데도 교황에게 조아리며 아부하는 신복음주의자들은 "당신은 우리를 이단으로 보셔도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받드나이다"라며 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으랴! 마치 상어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며 "우리는 당신의 것이니 제발 잡숴주시옵소서" 하는 물고기들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제대로 된 대응방식이 아니다. 상어(카톨릭신학)엔 범고래(말씀중심 신학)로 대처해야 한다.

   교황은 '페트로의 후예'?

카톨릭 교회는 페트로를 '초대교황'으로 받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역대 교황을 페트로의 후예로 믿어왔다. 성경은 물론 교회사적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헛소리다.
먼저 페트로가 바티칸의 주장처럼 과연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나 쉽게 알아보자. [이 부분은 헨리 헛슨, 데이빗 클라웃의 연구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성구엔 원어발음에 더 가까운 성경 각권 약호를 쓴다. 즉 '페a'은 페트로알파(베드로전서), '페b'는 페트로베타(베드로후서)를 뜻한다. 기타 이름도 이에 준한다. 그 이유는 필자의 딴 글들을 참조해주기 바란다.]  

성경엔 페트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로마서 16장 참조). 또 신약성경 전체에 로마교회의 특수성/우위성 따위를 내비친 구석이 단 한군데도 없고 로마에서 교황이 다스린다거나 '모교회'라고 한 부분이 눈 씻고 봐도 없다.


▲페트로를 \'초대 교황\'으로 묘사한 독일 \'뉘렘베르크 역대기\' 속 삽화.     © 김삼  

페트로의 첫 편지 페트로알파(벧전)는 로마가 아닌 바빌론에서 쓰여진 것이다(페a 5:13). 페트로 당시의 '바빌론'은 로마를 의미한다는 교황들의 주장은 정말 웃기면서도 딴엔 자가당착이랄까 의미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사실 로마교회는 계시록의 음녀 바빌론에 종종 비유되기 때문이다.

   파울은 '로마의 페트로'를 언급한 적 없어

사도 파울은 당대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로마서)를 보내면서 페트로를 언급한 흔적조차 없다. 당시는 주후 58년쯤이다. 그는 로마에서 특별한 은사를 나누길 원했고(롬1:11) 거기서 말씀 전하기를 원했다(1:15). 그러면서 그곳 성도중 27명에게 일일이 문안한다. 그러나 페트로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주후 61년 파울이 로마 죄수로 갇힌 중 몇몇 형제들을 만나지만 그 가운데 페트로는 없다.

이런 사실만 봐도 페트로는 로마 교황이나 로마교구의 감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로마교구란 제도 자체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파울이 돌보던 로마의 가정 교회만이 있었을 뿐이다.

로마에서 파울은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페트로에 관해 언급한다. 그러나 페트로가 로마에 있다거나 [바티칸 주장처럼] 그곳에서 20년간 교황 직위에 있던 페트로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에페소/필리포/콜로사이/필레몬 등의 서신서는 모두 로마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 서신서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페트로에 관한 언질은 단 한건(!)도 없다. 로마에서 파울이 보낸 마지막 서신서인 티모테 베타에서 파울은 "나의 첫 답변 때 아무도 나와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모두 나를 버렸다"(티b 4:16)고 밝힌다. 만일 페트로가 로마감독이었다면 왜 파울과 함께 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그가 있었는데도 딴 사람들처럼 파울을 버렸다면 그 엄청난 죄책을 어찌 면하겠는가!

순교 직전인 당시 파울은 이 편지(티모테 베타)에서 "오직 루카스(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티b 4:11)고 했지, "페트로도 나와 함께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페트로가 로마감독/교황이었을 수 있겠는가? 이것만 봐도 바티칸이 얼마나 거짓말덩어리인지 알수있다. 성경을 제멋대로 가감수정하는 것, 그것이 이단이다.

  페트로와 교황, 어느 쪽이 맞나?
-역대 교황들의 거짓


▲스승 크리스토께 \'열쇠\'를 받는 것으로 잘못 묘사된 카톨릭 그림. 주님은 \'초대 교황\' 페트로가 아닌 교회에 열쇠를 주셨다.     © 김삼  

페트로는 기혼자였다(마테오 8:14). 예수님과 모든 사도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장모도 있었고 사역 때 아내를 대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교황들은 모두 미혼자/독신자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특히 코린토알파(고전) 9:5은 카톨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도무지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한번 잘 살펴보자.
"우리는 딴 사도들, 주님의 동생들, 케파(페트로)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이오?"(코a 9;5)
파울이 쓴 편지의 이 부분이 확실히 밝혀주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사도들 다수가 결혼했다.
2. 주님의 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도 결혼했다.
3. 케파도 아내가 있어 사역 시 대동했다.  

위 세가지중 그 어느 것에도 카톨릭은 해당되지 않는다. 카톨릭은 결혼하지 않은 사제/수녀들만이 일반 평신도보다 거룩하고 제대로 사목을 할 자격이 있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과는 반대다! 또 카톨릭은 주님의 친동생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리아를 영원한 처녀/정녀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란 근거가 성경에 전혀전혀전혀(!) 없다는 것은 카톨릭 신도들에게 충격을 주는 놀라운 진리다.

이 구절 딱 하나만으로도 카톨릭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황청은 자기네 나름의 '성서' 또는 '성서해석'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티칸 교황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계22:18,19). 성경을 맘대로 가감하니 말이다.
결혼한 페트로가 264명이라는 미혼자 교황들의 선배요 '초대 교황'이라니 얼마나 모순된 주장인가? 그러고도 페트로의 올바른 계승자/후계자/후예일 수 있는가? 카톨릭의 거짓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페트로는 성경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주목해야한다고 가르친다(페b 1:19~21). 그러나 교황들은 바티칸의 영감 없는 전통도 주목해야 한다고 보태어 주장한다.

페트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품화 하는 거짓교사들을 경계한다(페b 2:1~3). 그러나 교황들은 미사/기도/면죄부 등을 팔아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돼온 사실이다.

페트로는 침례/세례가 상징적일 뿐 성령과 예수 크리스토의 부활이 곁들여져야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일러준다(페a 3:21. 이 구절의 한글번역은 개역이 제일 낫다). 그러나 교황들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주는 세례(영세) 자체가 구원을 갖다주며 세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숭상을 거부했다(행전 10:25,26). 그러나 역대 교황들은 천주교도들로부터는 물론 정치가/지도자들로부터의 영예/배례/키스/숭배를 기꺼이 수용하며 거의 신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페트로는 구원이 오로지 예수 크리스토의 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페b 1:1). 그러나 교황들은 구원엔 영성체(성체를 받음)도 필요하다고 곁들여 주장한다.

페트로는 교권제도와 함께 목회자들의 권위주의적 자세를 경고하고 양떼의 본이 될 것을 권고했다(페a 5:3. 이하 성구들 모두 페a 즉 베드로전서). 또 장로 외엔 어떤 교회직분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들은 교권체계를 세우고 신약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제도와 직책을 만들어냈다.

페트로는 신약시대의 유일한 사제(제사장)직은 예수 크리스토의 하늘 대사제직 뿐이라고 가르치며 모든 신자들의 영적/보편적 사제직을 말했다(2:5~9). 그러나 교황들은 성체를 나눠주도록 서품된 카톨릭만의 특수 사제제도를 보유했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기초이자 바위이신 예수 크리스토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한다(2:4~8). 그러나 교황들은 페트로가 곧 반석이요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페트로 자신을 거짓말쟁이, 모순된 사람으로 내모는 격이다.

페트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가르친다(1:23). 그러나 교황들은 사람이 영세(세례받음)로 거듭난다고 주장한다.


▲상 피에트로 바실리카 안의 페트로 동상. 로마주신 주피터 상을 닮았다는 설이 있어왔다. 발은 키스로 닳아있다     © 김삼  

페트로는 크리스토께서 죄를 위해 한번 희생되셨다고 가르친다(3:18). 나무(십자가)위에서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지셨다고 가르친다(2:24). 그러나 교황들은 매번 미사 때마다 크리스토께서 새로 희생되며 예수 크리스토와 그 십자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로마카톨릭교회와 영성체와 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신자가 산 소망과 하늘 유업을 지녔다고 가르친다(1:2~5). 그러나 교황들은 신자가 하늘나라에 제 집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신자가 살인자/도둑/악행자와 남의 일 간여자가 되지 말라고 훈계한다(4:15). 역대 교황 대다수는 이 모든 죄를 골고루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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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주일예배 대표기도문 : 부활의 증거 

 

 

 


말씀 : 고전15:1-8

제목 : 부활의 증거들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만해도 그렇습니다. 이성적, 논리적, 과학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이 세상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법칙에 의하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질서도 절대로 저절로 생겨 날 수 없습니다.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면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나도 세상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과학적으로는 절대로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그냥 저절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세상의 어떤 것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저절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대답은 하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니 모든 이성이나 지혜나 과학이나 질서나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과학과 지성과 이성과 경험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상식과 이성과 경험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행2: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결단코 사망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의 부활은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도 이성과 경험안에 갇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1)성경과 예수님이 증거입니다.

 

부활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4절을 보겠습니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은 미리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53:5절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16:10절에서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즉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고하였고,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이 뭐가 되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허무맹랑하고 휘황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정신 이상자가 기록한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대의 거짓말장이요, 과대망상자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만큼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의 증언과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거짓된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성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는 죽을 거다. 살아날 거다 말씀하셨는데 성인으로 믿는다면 따라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과대망상주의자, 정신이상자로 몰아가야 정상 아닙니까? 또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성경이 어떻게 200여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수십억권이 팔린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하여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따르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있는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쓰레기 같은 것으로 여기든지........

지난 주일에 전도를 하다보니까 윗마을 버스 정류장 밑에 집 할아버지가 자기네 가문에서 사회로 진출했으면 판검사는 넉넉히 하고도 남을 제일 똑똑한 두 놈들이 하필이면 목사가 되었다고 한탄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다시 오신다. 예수님 믿어야 죄용서받고 천국간다. 당신네들은 그걸 미친소리라고 하는데 그 똑똑한 두 놈이 바보 멍청이 천치라서 그걸 믿고 그걸 전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분명히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진정 유일한 부활의 주님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시오, 심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빈무덤이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무덤이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냈을 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다가 감춰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릴 것을 우려하여 무덤입구를 큰 돌로 막은 다음에 바위와 무덤 양쪽 벽에 밧줄로 여러 번 동여매고 진흙을 발라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을 세워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밧줄 아니라 쇠사슬로 백번천번만번을 묶어놔도 소용없고, 진흙 아니라 쇳물을 부어놔도 소용없습니다. 경비병 아니라 경비병 할아버지를 세워놔도 소용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는 무덤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임으로 무덤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28: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천하없는 사람이라해도 다 무덤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망권세 앞에 그 어떤 조그마한 저항도 한번 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80세에 식중독으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져 무덤에서 끝났습니다. 공자는 곡부성의 사수언덕에 안장되어 커다란 무덤을 남겼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은 62세에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무덤을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무덤이 성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덤의 권세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서는 생명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무덤에 갇힌 자가, 사망 권세에 진 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셨기 때문에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덤에 집착하지 마세요.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연속극에 보면 무덤 앞에 가서 막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데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부질없는 짓입니다. 거기 뭐가 있습니까? 생기가 있습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썩어 냄새나는 시체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무덤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만 생명과 희망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천하없는 것이라해도 다 무덤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생명과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시고 살아가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앞에 나타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만해도 16번이나 됩니다.

오늘 본문 5-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심어는 500여명이 모여 있는 곳에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확인하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러다가 500여명의 문도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고, 귀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산증인이 되어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제자들의 삶이 증거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만 해도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하나같이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일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분안에 있는 생명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다고 증거하다가 하나같이 다 순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바보가 거짓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요새 말로 총 맞았습니까? 안 그래요? 혹시 돈이나 한보따리 안겨 주든지 무슨 큰 권세나 하나 준다면 몰라도 돈이나 명예는커녕 환난과 핍박과 죽음만이 돌아올 그 일을 위해서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 잠깐 있는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더 소중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못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이 안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 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알량한 이성과 지식과 경험속에 갇혀 거짓말이다, 환상이다, 신화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과연 정말 부활할 수 있을까하면 의심하거나 잘 믿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걸어나올 수가 있지?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가 있지? 어떻게 물이 갈라져 벽처럼 설 수가 있지? 여러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의 한계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주님의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절망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 모든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그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다 이기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의 촉구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내 작은 이성과 지식과 경험의 틀을 깨트려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 부족한 것들, 어려운 것들, 죄된 것들 다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자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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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천국을 볼 수 있는 눈

 

 

 

 

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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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

제목 :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

말씀 : 요한복음 3장 16∼17절 
 

 

 
운동선수가 슬럼프에 빠지면 어떤 훈련을 할까요. 기술을 연마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기 훈련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 여기저기서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진단하며 신앙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신앙의 기본기가 탄탄했을 때는 언제였을까요.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즉 ‘처음 신앙’ 시절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처음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본문 말씀은 기독교인이라면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와 새 신자 교육만 받아도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찬양으로도 익숙한 말씀이지요.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이들을 사랑하사,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 밖 세상 속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사, 북한 동포를 사랑하사, 아프리카의 헐벗은 이웃을 사랑하사, 그리고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까지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대신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말씀(17절) 또한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고 물과 피를 다 흘리며 죽게 하신 목적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드러내는 핵심 요소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추한 죄악 가운데 죽어 마땅한 우리를,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는 우리를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 오늘도 세상을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 택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곧 십자가 사랑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십자가 사랑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영생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잠시 돌이켜볼까요. 얼마나 많은 심판과 정죄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억누르고 있습니까. 자격 없는 우리 인간이 무엇이길래 원망과 증오와 한탄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까.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고 사모합시다. 나아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서로 사랑합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며 살아갑시다. 그러할 때 한국교회의 위기론은 어느 순간 사그러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기까지 사랑한 세상을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곧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한정배 목사(완도 모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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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말씀 설교] 복된 인생을 준비하라

 

 

 

 

 

제목 : 복된 인생을 준비하라 ​
성경 : 시편 1편 1∼6절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인생을 꿈꿉니다. 복된 인생, 행복과 기쁨이 있는 인생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할 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시편 기자는 두 가지 답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 ‘나의 행복은 내가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관자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없이 내가 가진 지혜와 힘, 능력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또 살겠다는 교만과 고집 의지를 전부 내려놓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가진 힘 능력 지혜가 크다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제시해주신 복된 인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복된 인생으로 돌아가는 두 가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거부해야 합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란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합니다(1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인들의 충고를 받아 들여서는 안 됩니다. 악을 모의하는 자리에 서 있어도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2절). 복된 인생을 위해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모든 기쁨의 근원을 삼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묵상해야 한다는 말의 뜻은 ‘공부한다’ ‘읽는다’ ‘중얼거린다’ ‘읊조린다’는 의미입니다.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또는 입으로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복음적이고, 말과 삶이 세상사람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고상함을 갖는 일입니다. 묵상하는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무지와 교만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복된 인생을 위해서 참된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우리의 참된 행복과 기쁨과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모두가 이런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운창 목사(전남 함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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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지 못한 교회 특징

 

 

 

 

성장하는 교회의 특성

 

성장하는 교회는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보다 괄목할만하게 개발된 질적 특성들을 갖고 있는가?

♥ 교회 성장에 대한 오해

이 책에서는 성공한 교회를 모델로 모방한 것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 교회 성장을 원리 중심 접근 방식을 따라 교회 성장에 기초되는 보편적 원리들을 발견, 그 사례들을 분석하였다.

♥ 국제적인 연구 결과

어떻게 하면 모든 교회가 적용할 수 있는 교회 성장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세상에 있는 많은 교회들을 과학적으로 올바르게 조사 ⦁연구해서 얻는 것이다. 세계 1,000개의 교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우리는 “오늘날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해 각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근거있는 해답을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 “성장”이 적합한 기준인가?

교회 성장 속도와 같은 양적 성장과 질적 지수로 나타내는 질적 성장으로 표현하여 네 가지 유형의 교회로 나눌 수 있다. ①높은 질적 특성+양적 성장[질적 지수(QI)가 56이상(기준이 50)과 5년에 걸쳐 매년 10%이상 성장] ②높은 질적 특성+양적 감소 ③낮은 질적 특성+양적 감소 ④낮은 질적 특성+양적 성장

이러한 조사는 네 개의 유형에 속한 각 교회의 상태를 진단 가능케 한 최초의 조사 연구이다.

♥ 질적 특성1: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의 차이점을 가장 잘 나타내는 부분은 “사역자를 세우는” 일이다. 성장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사역을 위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와 권한을 부여 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이런 지도자는 교회의 수많은 일들을 자신들이 다 하느라 시간을 뺏기는 대신, 그들의 시간을 제자훈련, 권한위임, 그리고 재생산에 투자한다. 이런 식으로 투자한 노력의 결과는 상상 할 수 없는 성장을 가져 온다.

♥ 질적 특성2: 은사 중심적 사역

“은사 중심적 사역”이라는 질적 특성은 특별히“하나님에 의한 자연적 성장”이 뜻하는 바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은 교인들이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은사를 따라 사역할 수 있도록 잘 조정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섬길 때, 인간의 힘으로 하는 부분은 줄어드는 대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뤄지는 일은 더 많아 지게 된다. 그러므로 은사에 따라 사역하게 되면 놀랍고 대단한 일을 해 낼 수 있게 된다. “은사 중심”과 “기쁨이 넘치는 삶”사이에 놀라운 연관성이 드러났다. 즉 “은사 중심적 사역”은 개인의 삶이나 교회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읽으면서 생각해 볼 때 이 이유는 아마도 은사 중심적으로 사역하면 만족감과 적극성과 성취감이 더해져서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 질적 특성3: 열정적 영성

“이 교회 성도들은 ‘불붙어’있는가? 성도 들이 기쁨과 열정으로 헌신과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성장하는 교회나 퇴보하는 교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므로, 우리는 이 질적 특성을 “열정적 영성”이라 부른다. 영적인 열성이라는 개념과 흔히 말하는 “의무를 다하여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고 율법주의 경향이 있는 교회는 영적 열심히 대게 평균 이하였음을 발견 했다.

기도 생활에서 열정적 영성의 결과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기도의 시간(양)보다는 “기도는 나에게 은혜로운 시간이다”라는 영감있는 경험이 교회의 높은 질적, 양적 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 경과를 접한 나는 기도를 시간만 채우려하는 기도에서 열성적인 은혜스럽다고 생각 할 만큼의 기도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질적 특성4: 기능적 조직

기능적 조직 이라는 질적 특성의 핵심이 사역의 계속적 증진을 촉진하는 조직 개발이다. ex)사역 각 분야에 부서장들이 있는 교회가 없는 교회보다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보여 주고 있다. 지도자는 단지 어떤 조직을 이끌 뿐 아니라, 또 다른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교회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생조직이 이뤄질 때 까지 계속해서 교회 조직을 평가, 개선해 나가게 된다. 이 기준에 도달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들은 없애든지, 아니면 바꿔야 한다. 이와 같은 계속적이고도 조직적인 자동 갱신의 과정을 통해 전통주의적 타성들 중 많은 부분을 제거 할 수 있다. ex)전통에 얽매여 교회들이 얽매이지 않는 교회보다 질적으로 낮으면서 쇠퇴하고 있는 교회가 많았다.

이 부분에서는 튼튼한 조직을 갖추어야겠다고 생각되며 전통에 얽매이는게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질적 특성5: 영감 있는 예배

구도자 예배, 즉 주로 불신자를 겨냥한 예배는 질적 특성과 양적 특성에는 크게 기여 한다고는 볼 수 없는 결과들이 나왔다. 이런 결과들이 나왔다고 해서 “구도자 예배” 형식이 보통교회들이 모방 할 좋은 전도 방법은 못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전도 방법의 예배가 바로 교회 성장 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가 신자 중심이든 불신자 중심이든, 또 전통적 스타일이든지 자유스러운 분위기이든지 그것은 교회 성장과 무관한 것이다.

교회 성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밝혀진 다른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과연 성도들에게 ‘영감 넘치는 예배’인가?”라는 점이다. ex)영감이 넘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는 교회는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하고 있는 교회였다. 여기서 “영감 있는”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의 근원인 인스피라티오(inspiratio)라는 단어의 뜻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영감,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 할 때 예배의 분위기는 물론 예배 절차에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영감 있는”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교회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게 된다.

이 부분의 내용을 읽으면서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 기쁘고 영감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혹은 목사를 위해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지루하고 기쁘지도 않는 예배를 참고 있어주는 그들의 “충성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에 참석 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까 반성해 본다.

예배가 영감 넘칠 때 사람들은 “스스로”예배에 출석 하게 된다.

♥ 질적 특성6: 전인적 소그룹

소그룹의 계속적 번식은 보편적 교회 성장 원리가 된다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질적 특성, 양적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려면 소그룹이 단순히 성경구절을 공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구절의 메시지를 매일의 삶에 적용시키는 전인적인 소그룹이 되어야만 한다. 소그룹 안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실제 처해있는 개인적인 문제나 질문들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전인적 소그룹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적 은사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 섬기기를 배우는 자연스러운 장소가 되어야 한다. 소그룹은 또한 번식을 통하여 교회 성장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낸다. ex)“의도적으로 소그룹을 나누는 것을 통해 소그룹 번식을 촉진 한다”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 목사의 교회가 월등히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보여 주었다.

이 내용에서 소그룹의 운영과 소그룹의 번식이 교회 성장의 최대 요인임을 알 수 있었다.

♥ 질적 특성7: 필요 중심적 전도

모든 사람들이 다 전도자는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중 10%이하의 사람들에게만 전도의 은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가 전도의 은사를 가졌는지 교회의 지도자가 알고 그들에게 맞는 사역을 맡긴다는 것은,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하는 교회가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 자기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불신자들을 섬기고, 그들이 확실한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그들이 가까운 교회와 연결되도록 돕고 격려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의무다. 교회 성장의 열쇠는 교회가 전도의 초점을 불신자들이 당면한 문제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맞추는데 있다.

여기서 나는 전도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이미 맺은 불신자와의 관계에서 그가 필요함을 충족시켜 주는데서 전도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 질적 특성8: 사랑의 관계

성장하는 교회는 정체되어 있거나 쇠퇴하는 교회에 비해 눈에 띄게 높은 “사랑지수”를 갖고 있다. 이“사랑지수”를 정하기 위해 교회의 공식적인 모임 이외에 교인들이 서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고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ex)자주 서로를 식사에 초대, 차 마시기를 하는지? 교회는 칭찬을 하는데 얼마나 너그러운가? 교회 목사는 자기 교회평신도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교회안에 얼마나 웃음이 있는가?

여기서 “웃음이 넘치는 교회 생활”과 교회의 질적 양적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우리 교회는 웃음이 넘친다”라고 대답한 교회들은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들이였다.

진실하고 실제적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석과도 같은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입으로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전도 프로그램에 비해 훨씬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얘기 하는 것을 듣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정말 어떻게 역사하는지 경험하기를 원한다.

우리 논공교회에서도 사랑의 실천에서 역사는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 어떤 질적 특성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질적, 양적 성장을 원하는 교회라면 이 여덟 가지 질적 특성들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간과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흔히 “교회성장은 전적으로 기도에 달렸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소그룹예배도, 지도력이나 조직도, 그 어떤 다른 요인도 그것 하나가 교회 성장의 “유일한”열쇠는 아닌 것이다 “유일한”열쇠는 여덟 가지 요소들의 조화로운 상호 작용에 있다.

♥ “65 법칙”

교회 안에 질적 내용이 있으면 양적 성장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한 교회가 여덟 분야에서 모두 65의 질적 지수에 도달했다고 하면 교회가 성장할 통계적 확률은 99.4%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65의 질적 지수의 의미는 지도자의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교회 성장에 헌신된 교회, 거의 모든 교인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자신들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이 능력과 넘치는 열심을 갖고 믿음을 실천하는 교회, 교회성장에 기여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조직이 평가되는 교회, 한주동안 예배가 기다려지는 교회, 그리스도인 교제를 통한 사랑과 치유의 능력이 소그룹 안에서 경험되는 교회, 거의 모든 교인들이 자신의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이루도록 돕는 교회,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의 거의 모든 활동에서 나타나는 교회. 저희 논공교회에서도 위의 세부적인 사항들이 다 적용되기를 소망합니다.

♥ 질적 접근

질적 접근은 사역 현실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지를 갔고 있다.“어떻게 하면 우리 예배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보다도, 우리는 “여덟 가지 질적 분야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장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서 고민해야 한다. 진정한 질적 특성, 양적 성장에 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성장의 외적 성장을 고민하기 보다 질적 성장을 고민 할 때 우리 논공교회도 외적 성장까지도 덤으로 얻게 됨을 믿어봅니다.

♥ 왜 양적 성장 목표는 부절적한가?

예배 참석자의 수 (양적 성장 목표)를 정해 놓지 않아도 조사에 의하면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 10개중 7개는 이런 양적 목표를 정하지 않고도 명백하게 성장하고 있다.

교회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도전을 주며, 시간제한이 있고, 측정할 수 있는 목표를 필요로 한다. 숫자를 정해놓고 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성장을 위해 구체적인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수적증가는 질적 지수가 향상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부산물이다.

우리 논공교회도 성장 목표를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에 맞춰서 목표를 세워야겠습니다.

♥ 큰 교회가 “좋은”교회인가?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 같다. 연구, 조사 과정 가운데서 어떻게 그와 같은 견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

1.성장·쇠퇴하는 교회들의 평균 등록 교인수와 출석교인수를 분석하고 비교해 보았을 때 등록 교인수는 쇠퇴하는 교회가 평균 2배 이상 많고, 출석 교인수는 쇠퇴하는 교회가 단지 17%만 높다(등록 교인수는 많은데 출석 교인수는 턱없이 적다.)

2.교회크기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의 관계에서 보았을 때 큰 교회는 연성장 3%, 질적 지수48,작은 교회는 연성장13%, 질적 지수 52로 나왔다.(성장이든 질적 지수이든 작은 교회가 높았다)

3.부정적인 요인도 큰 교회크기가 세 번째를 부정적인 요인으로 판명되었다.(자유주의적 신학, 전통주의에 이어 세 번째)

4.새 신자 수 에서도 작은 교회가 큰 교회에 비해 늘었다.

5.새 신자를 얻는 비율이 통계적으로도 작은 교회가 큰 교회보다 높게 나왔다.

6.질적 특성 면에서도 큰 교회 보다 작은 교회에서의 참여도가 두드러진다. 은사에 따라 일을 맡고 있는 것과(작은 교회31%, 큰 교회17%), 소그룹에 속해 있는 교인수(작은 교회46%, 큰 교회12%)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외가 있다. 높은 질적 특성과 양적 성장을 보이는 큰 교회도 있지만 본보기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 탄탄하게 성장할 뿐 아니라 혁신적인 수적 증가를 나타내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을 잘 연구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
 
8가지 질적 특성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어느 것 하나 등한시 할 것이 없음을 다시금 깨닫고 미래를 보고, 하나 같이 합심하여 질적 지수를 높이는데 전심으로 행하여야겠고, 자기의 믿음으로 자기 행할 바를 행할 때 양적 성장도 더불어 성장함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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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 유월절과 성찬식

 

 


유월절과 성찬식!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월절이 마지막으로 행해졌다. 그 후 유월절은 주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양고기와 쓴 나물, 무교병의 유월절 음식은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성찬식으로 바꾸셨을까. 유월절은 애굽에서 출애굽 직전 급박했던 그 밤에 행해졌던 일이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셨다.

 

그 밤 어린양의 피는 죽음을 넘어가게(PASS over)하는 능력의 피였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위대한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 유월절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는 일에 대해 결코 타협하시지 않으셨다. 히스기야와 요시아 왕은 유월절을 잘 지킨 왕으로 높이 평가하셨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명절이었다. 출애굽 후에는 시내 산에서, 그리고 법궤가 만들어진 후에는 법궤가 있는 곳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법궤는 어깨에 메어 옮겨 다니다가 드디어 다윗의 소원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후 예루살렘에 머물게 된다. 그 후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된다. 예수님께서도 12세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신 기록이 나와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 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 하에서 신음하던 유대 백성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부른다. 예수님 당시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비롯한 유대인의 명절에 1년에 3번 혹은 최소한 한 번이라도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때 그들은 1년분의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고 약 한 달 정도씩 머무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유월절과 오순절, 장막절에 예루살렘은 매우 번화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1000년 된 도시 예루살렘에서 1400년 된 명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를 지시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며 어린양의 피를 당신께서 대신하시기로 선언하셨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들어 축사하신 후 이것은 우리를 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니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주의 성찬식이다.

유월절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순종이 필요했다. 그리고 성찬식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기념하고,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다. 어제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림을 일컬어 기억상실증이라 말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한 책 성경을 주심을 올 추수감사절에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조병호 목사(성경통독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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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 ]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르지 못한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그러나 이 간단한 내용이 인간의 머릿속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 먼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1-4)

 

위의 구절들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본체 하나님’이라고 하며, 아들 하나님을 ‘형상 하나님’ 및 ‘말씀 하나님’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는 분이시다 (딤전 6:16).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의 대상이 되지도 않으신다. 마치 눈이 눈 자체를 볼 수 없으며, 혀가 혀 자체를 맛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엡4:6), 모든 것의 원천이 되는 분이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볼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절대 초월자이신가?

그 대답은 ‘예’도 되고, ‘아니오’도 된다. 왜냐? 하나님은 본체 하나님이 되시지만 동시에 형상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이셨다고 기록되어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하나님은 본체의 하나님이 되는 것 만큼 형상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이 되는 것 만큼 형상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만물을 초월하심과 동시에 형체와 형상으로 보이고 나타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계시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삼위의 하나님은 한분이다. 그래서 본체의 하나님은 반드시 형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보이는 형체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아들 하나님 곧 형체를 만드시는 말씀 하나님을 통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골1:15-17)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는 객관적인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모두 나타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의 원리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현대 과학은 보이는 모든 물질과 시간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물질이란 에너지의 전달형식 내지 준재 형체이다. 그래서 모든 형상을 에너지 운동법칙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에너지로 되어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이나 나타난 것들은 물질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4:12)

 

위 구절에서 ‘운동력’은 헬라어로 '에네르게스'인데 영어의 에너지란 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형체와 형상은 전부 움직임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주, 시간, 공간도 전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헬라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만물은 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운동력 속에서 그것을 일정한 형체로 붙잡고 유지하고 계신 분이 말씀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3)

 

만물을 볼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위엄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19:1-4)

 

하나님은 영이시다 (요4:24).

영이란 자신을 의식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역사가 형체라면, 영이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과 및 형체를 초월하여 자신을 의식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역사이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어떤 피조물에게도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자신을 의식하실 뿐 아니라 창조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 각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다 알고 계실 분만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도 전부 주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는 것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시139:7-12)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28-30)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천사와 사람도 영체로서 각자 자신을 의식할 뿐 아니라 주어진 영적 능력을 따라 자신의 위치와 환경을 주관한다. 이것이 영체인 천사와 성도가 갖는 영적 권세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눅10:19)

 


아버지 하나님 (본체)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하늘의 모든 복을 주심(엡1:3-5)
 

아들 하나님 (형상)
 
말씀으로 천지(아담)창조(요1:1-3) 육신으로 대속, 아들의 형상을 입혀주심(창조와 재창조)(고후5:17)
 

성령 하나님 (한몸, 교회)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고 아들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함(요14:16-17, 요16:14)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누릴 수 있는 은사를 주신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2)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사람마다 새로운 능력과 권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말세에는 모든 육체에서 하나님의 영을 주신 것을 약속하셨다. (욜2:28, 행1:8, 행2:17)

 

그러면 왜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4:8)

사랑은 인격이며 자신을 채우는 동시에 자신을 나타내면 사랑의 상대(대상)를 갖는다.

 

사랑이신 본체의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지 않을수 없었고, 아들 하나님도 사랑의 상대를 갖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은 사랑의 상대로서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의 형상인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 과정이 천지창조와 인류구속의 역사인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3-5)

 

이 모든 것은 아들인 말씀 하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말씀에 의한 천지창조는 사랑의 상대인 성도를 창조하기 위한 준비단계라 할 수 있으며, 말씀인 육신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속하신 역사는 교회(성도)를 창조하기 위한 최종적인 창조완성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상대로서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모든 좋은 석으로 공급하시면 성도(교회)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실현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6)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인류 구속 및 교회의 완성과 새 하늘 새 땅을 이루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실현해 가시는 과정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성도(교회)와 함께 영원히 스스로 충만하게 되신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11:36)

 

이와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삼위로서 역사하신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4:6)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사람은 속사람(마음, 영)과 겉사람(몸) 및 행동(생애)으로 되어 있다. 마음도 ‘나’요 몸도 ‘나’요 생애도‘나’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이 본체 하나님, 형상 하나님, 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은 서로 다르지만 한분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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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예배 대표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며,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지금 우리들이 이 곳에 모여서 이 세상을 먼저 떠나
아버지 앞으로 가신 ○○○ 성도님 (어른, 선생님)의 장례식을 거행하려고 하오니
아버지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 성도님 (어른, 선생님)이 세상에 있을때에 아버지께서
크신 능력으로 지켜 주시고 사랑의 손으로 인도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영원한 후사가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원하옵기는 이 장례가 아버지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져 이로 말미암아
그의 유족과 친척들이 큰 위로를 받게 하옵시고,
이곳에 모인 우 리도 하나님의거룩하신 교훈을 배우고 죄를 뉘우치는 것과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믿음이 더욱 굳세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이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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