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선교사  (선교사 언어 교육원 강의 내용 중에서)


 

 

 

 

1866년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제너럴셔먼호는 물이 빠져 나간 강의 진흙 바닥에 좌초됐다.

​배에는 조선으로 두 번째 전도여행을 온 영국 웨일스 출신의 토마스 선교사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를 대대적으로 시작하고 있어 매우 위험했다.

​다음 날인 9월 5일. 조선 관군들은 강가에 좌초된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놓았고,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모두 강으로 뛰어들었다.

​토마스 선교사도 성경 한 권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 내렸다.

​뭍으로 헤엄쳐 나온 선원들은 모두 관군의 창에 목숨을 잃었다.

​관군에 의해 끌려 나온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백사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기도했다.

​그는 가슴에 품고 있던 성경을 꺼내 관군에게 내밀었다. 병사는 주춤했으나 이내 토마스를 살해했다.

​스물 일곱살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저는 10월(1893년)에 22명의 교리문답 수강생을 모집했고 더 체계적인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나온 토마스 선교사에게 한문 신약성경을 받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1925년 3월 마포삼열 선교사의 선교보고 중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배에서 뿌린 성경을 주운 사람은 정부 관원을 포함해 상당수에 달했다.

​당시 20세였던 이신행이라는 여인도 성경 한권을 얻어 집으로 왔는데 그후 그녀는 평양 최초의 여자교인이 됐다.

​그녀의 아들 이덕환도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했다. 제너럴셔먼호를 구경하러 대동강변으로 나온 11세 소년 최치량도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세권을 얻어 돌아왔다.

​당시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성경책의 종이 질이 좋아 버리기 아까워 한 장 한 장 뜯어 집의 벽지로 발랐다.

1891년 소년이었던 최치량은 성인이 된 후 널다리골에 있는 박영식의 집을 매입해 여관을 경영하게 됐다.

​그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새뮤얼 오스틴 모펫(마포삼열) 선교사와 한석진 목사가 우연히 이 여관에 머물게 됐다. 이들은 온통 성경 말씀으로 도배된 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모펫 선교사는 이 여관주인 최치량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영식도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다.

​결국 널다리골의 그 여관은 예배의 처소로 사용됐는데 나중에 이곳이 평양 최초의 개신교회인 널다리골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후에 장대현교회가 되어 이곳에서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하면 평양 대동문 안에서 교회를 열었을 때 토마스에게 받은 성경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아들인 새뮤엘 휴 모펫은 1973년 5월 6일자 '코리아헤럴드'에 이렇게 기록했다.

"제 아버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24년 후에 평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들이 증언하기를 한 백인이 불에 타고 있던 갑판의 연기 속에서 "예수"라고 외치며 강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던져 주었다고 합니다."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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