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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째주일 대강절 주일예배 설교 (Preaching of the Advent)  


 


 
말씀 : 마22:34-40

제목 : 사랑의 계절

벌써 2003년도의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고, 그 한 장 남은 달력도 절반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우리는 이맘때쯤 되면 웬지모를 숙연함을 느끼며 다시금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실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무상하게 지나간 세월속으로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더듬어 보며 또다시 우리앞에 펼쳐질 시간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성탄절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언제나 그랬듯이 거리에는 웬지모를 흥분감마져도 감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약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오셨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과 가난과 질병과 미움과 저주와 온갖 압제 속에서 시달리는, 그래서 결국은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생명과 평화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정말 무지하고 죄된 인생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모든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셨고 생명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오늘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가운데 주님과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죄되고 무지한 인생들, 저주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생명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참 자유와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은 그저 단순히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물론 그 역사적 사실도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 왜 우리는 그분을 영접해야 하고, 영접했다면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 어떻게 주님의 뜻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는 먼저 주님을 내 심령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 가정과 교회속에 새롭게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나와 내 가정과 내 교회속에 주실 그 생명과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는 일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계신 그 주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으로 이 땅위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에 성탄절의 의미는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구원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땅에 실현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러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생명의 역사와 사랑의 역사를 구체화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관심이나 이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의 현실속에 구체화시킬 때 그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이 있고, 관심이 있고, 이해가 있고, 공감을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체적, 현실적으로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생자 예수께서 현실의 세상속에 오셨고, 또한 그분도 십자가의 처형을 실제적으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체적 현실적으로 부활하셔서 무덤문을 열고 나오셨고, 실제적으로 40일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현실적으로 승천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가 받은 바 은혜와 사랑들을 구체적, 실제적으로 현실에 적용할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말입니다. 관념적인 사랑, 그저 생각으로만 공감하는 사랑, 그저 이해나 하고 있는 사랑,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절은 말할것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와 영광과 축하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돌리기 이전에 주님의 뜻을 살펴야 되는데 그것은 물론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래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죄사함과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주님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물론 사랑입니다. 주님은 인류를 향한 나를 향한 그 애특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랑 때문에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곳에 오셔서 날 위해 죽으셔서 내게 생명을 주신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게 두가지의 중요한 커다란 계명이 있는데 먼저는 우리의 생명을 다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들을 하고 계시지만 결국은 이 두가지로 결론이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론 먼저 첫 번째의 말씀 즉 왜, 어떻게 우리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보아야 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두 번째 주제 즉 우리의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겠습니까? 내 가족입니까? 내 옆집에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 동네 사람입니까? 안동권씨다 진성이씨다 하는 종씨입니까? 아니면 녹전면민입니까? 아니면 대한민국 국민입니까? 물론 좋습니다. 다 나의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이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혈연, 지연, 학연 다 초월해서 여하튼 너와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흑인이든 백인이든, 전라도 사람이든 경상도 사람이든, 안동 권씨든 진성 이씨든, 서울 대학 졸업자든 녹전초등학교 출신이든, 대통령이든 거지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적군이든 아군이든, 원수든 친구든 여하간 너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므로 너 또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네가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모든 대상들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그렇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인줄 압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뜻을 늘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의 이웃을 그가 누구이든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주님앞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정말 엄격히 따지고 보면 주님 앞에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그런 거 다 묻어두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의 심령속에 이러한 사랑의 싹을 틔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그 방법론으로써 네 몸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잘 갈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소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어떤 허물과 죄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늘 이해하고 변명을 하고 용서를 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안하고서는 부득이해서, 너무 피곤해서,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바빠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라고 하면서 이해하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안 할때는 그것도 안한다고 비난을 합니다. 어떤 때는 안 할 말을 해놓고는 상대방이 그렇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같은 말을 할 때는 그래도 그렇지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하여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노하게 만들때는 그 분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를 않습니다. 앙금처럼 남아서 어디한번 두고보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배가 고프면 열심히 먹습니다. 목이 마르면 곧 물을 가져다 마십니다. 추우면 곧 옷을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선풍기를 틀어 줍니다. 피곤하면 곧 자리에 누어 쉬게 하고, 병나면 곧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줍니다. 무언가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그런 관심을 가지지 못합니다. 남이 정말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남이 배고프고, 남이 병이나고, 남이 추울 때 내 몸에게 하는 것의 1/10만 해도 사실 아주 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네 몸을 사랑하고 돌보고 아끼는 그것만큼 남도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고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만큼 너도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평안을 누리고, 네가 사랑을 받고, 네가 즐겁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 그만큼 남에게도 평안을 누리게 하고, 사랑을 받게 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백퍼센트 우리가 다 실천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만 그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다만 애쓰는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백분의 일이라도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다 연말연시다 하여 사회각계각층에서는 이웃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떤 방법이로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실시를 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4월부터 구제성금을 모금하여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하여 굶주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매월 약3만여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지역에 있는 식사준비가 곤란한 가정에 매주 한번씩 반찬을 장만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정도의 상황이라면 이 정도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 우리 사회곳곳에는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개인적으로 그러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우리 교회적으로도 좀더 이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개중에는 그러지 않아도 농촌경제가 어려운데 남을 돕는 것이 그리 쉽겠느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도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미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농촌 생활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적으로도 여유도 없고, 미래적으로 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래도 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영적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림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기본적인 것 뿐만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는 문화적인 생활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도시에 돈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문화생활이랄것도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기본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 염려할 만큼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휴대폰, 전화기, 텔레비젼, 냉장고, 컴퓨터, 비록 좋은 차는 아니지만 찬 한 대씩 굴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정도면 그래도 복받은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일년에도 수천만명이 되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보건소에 가서 약3일치 지어먹으면 깨끗이 나을 병인데 그런 기본적인 약조차도 없어서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그 정도만 해도 정말 잘먹고 잘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그 사랑을 정말 다시한번 깊이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놀랍도록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어떻게하면 그 사랑과 은혜를 더 의미있게 하고, 더 가치있게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해볼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말할것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상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일3: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습니다. 사랑은 실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저 공감이나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실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실제적인 사랑을 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실제적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성자를 주셨듯이, 독생성자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우리도 무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지고 나아갈때에만이 주님께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세상속에 적용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주는 곳에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받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는다는 것은 주는 것이 선행될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는 자가 없으면 받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주는 자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그렇습니다. 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주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다시한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되새기면서 주는 자의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주고, 은혜를 주고, 마음을 주고, 용서를 주고, 이해를 주고, 물질을 주고...... 하여튼 받는 자의 입장보다는 주는 자의 입장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사실은 바로 내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나와 네가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되새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주일을 맞이하면서 이런 주는 자의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우면서 늘 줄 수 있는 자의 입장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이 더욱 여러분 안에 충만하고 여러분을 통한 주님의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이땅위에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그리할대에 여러분 자신도 더욱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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