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예배] 여전도회 헌신 예배

 

 


말씀 : 요20:11-15

제목 : 내가 하리이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첫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몇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 일어난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갔습니다.(막16:1) 왜냐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여서 안식일이 시작되는 그날 저녁까지 장례를 마치기 위하여 너무나 서둘러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에 향유도 제대로 발라드리지 못하여 너무나 안타까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굴려낼 걱정을 하면서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어찌된 영문인지 무덤 문은 이미 열려져 있었고 깜짝 놀라 들어가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 울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해서 운다고 말하는데 이때 뭔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마리아는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게다가 예수님의 모습도 신령한 몸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곳을 지키는 동산 지기인 줄 착각하고 당신이 옮겼으면 어디 두었는지 알려주면 내가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았는데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특별히 15절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을 진정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예수님 무덤가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말씀은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때의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유대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신성모독죄로 혹은 이단자로 몰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힐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에다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준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간주하여 괘씸죄까지 추가되어 가장 극악한 죄수를 사형시키는 십자가의 사형을 언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파기하는 이단의 괴수요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가장 끔직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잘못 보이면 자신도 무슨 봉변을 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짐짓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 행세를 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상황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장례를 잘 치러준다는 것은 결국 반역자를 돕는 것입니다. 반역자를 돕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도 반역자 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면 자신에게도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혹시 불이익을 당한다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용감하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주님은 나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그 몹쓸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희롱과 고통과 아픔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마22:37,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보세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주님을 진정 목숨처럼 사랑한다면 어찌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몸된 교회를 사랑한다면 정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부인과 헌신과 섬김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위하여 끔찍한 죽음을 당하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이기에, 그것이 주님이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이루시기를 너무나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길이기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운데 살게되고 주님의 역사는 아름답게 이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대한 소망으로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대로 그때의 정황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정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요,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후환이 두려워서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주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혹은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덤가를 찾아간다는 것이 큰 위협이나 걱정거리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그 무덤을 찾아갔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부활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서슬이 시퍼렇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찾아 핍박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러주고 돌본다는 것은 어떤 고통과 불이익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용기와 각오와 결단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용기 있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시신을 내가 가져가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과 후환과 불이익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오직 주님을 조금이라도 잘 모시기 위한 생각으로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용기 있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두려움과 걱정 염려를 물리치고 주님을 찾게 되었고 내가 가져가겠다고 말씀했고 그래서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고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물론 당연히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정말로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에서 혹시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는데요, 그 안에 영생복락이 있는데요,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요, 어찌 세상에서 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고 그걸 피하겠습니까? 어찌 세상에서 조금 불이익이 있다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한다면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그것이 복된 일이고, 그것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이고, 그것이 우리가 자신이 진정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만나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16:24,2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진정으로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생각과 이성과 환경과 상황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약해지지 말고 오직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진정한 용기와 결단력으로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역사를 이루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르게 섬기려면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있어도 누가 뭐래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나는 내게 주신 이 귀한 사명,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내게 맡긴 이 일에 충성을 다겠다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과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사명을 감당하고 그래야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이와같은 책임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만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기서 내가 가져 가겠다는 이 말은 곧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당신이 혹시 치웠다면 나에게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잘 모시겠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비록 시신이나마 제가 돌보고 안식하도록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십시오하는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넘쳐나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드물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정승이 살았을 때는 뭔가 잘 보여서 유익을 얻을까하여 조그마한 일에도 열심히 그 집을 찾아 가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자신에게 별로 득 될게 없으니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 병든 자, 메시야 왕국을 바라는 자, 진리에 갈급한 자 등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반역자로 몰려 돌아가시게 되자 그 많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다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자취를 감춰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 한패가 되어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도망갔을 때 그녀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남들이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예수님의 시신을 친히 모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 시신을 자신이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져가겠노라, 곧 내가 책임지겠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남들이 잘 안하려는 일이지만 내가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 자체로 보아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고 더더구나 자칫하면 커다란 불이익이 올 수도 있는데 누가 기꺼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남 보기에 좋은 일, 고상한 일, 깨끗하게 차려입고 폼 나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궂은일은 뒤로 빠지기 쉽습니다. 궂은 일,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남에게 미루고 무언가 그럴듯하게 자신이 드러나는 일만 하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뭔가 폼나고 재미있고 대접받고 드러나고 영광받고 하는 일만 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건 그저 자기 만족 자기 기쁨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기 힘든 일, 남들이 꺼려하는 일, 궂은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조건이 나쁠 때, 힘들 때, 부족할 때, 연약할 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면서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좋은 조건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 많은 것을 얻어 보려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에게 인간적으로 무슨 큰 영광이 되고 명예가 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참혹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지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혹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끗하고 폼나고 그럴듯하고 남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비록 인간적으로는 좀 꺼려지고 힘들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일에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헌신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러한 사명들을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책임감있게 주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여러분의 삶도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주님의 거룩한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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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회헌신예배] 옥합을 깨트린 헌신

 

 

 

 

 

제목 : 옥합을 깨트린 헌신

본문 : 막14:3-9

어떤 욕심 많은 부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오직 일과 돈과 자기 자신 밖에 모르고 한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디어 나이가 많아 늙어지자 허탈감과 외로움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하여 살아온 삶을 돌아볼때에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던고하는 생각에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현자를 찾아 가서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일평생 일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을 도와준 일도 사실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늙고 보니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던고하는 생각에 허무한 생각이 듭니다. 누구하나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의 이 허탈감과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까요?」

그러자 현자는 잠잠히 생각하더니만 말했습니다. 「저 창문으로 가서 밖을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예, 길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저 거울앞에 가서 들여다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예, 제가 보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유리의 뒷면에 아무것도 가리워진 것이 없으면 밖을 잘 내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리 뒷면에 무엇인가를 붙여 놓으면 밖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인가에 가리워져서 이웃 사람들도, 진리의 세계도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당신 혼자서 당신의 모든 짐을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리는 투명한 물체라서 깨끗하게 닦여져 있고 무언가 장애물이 없다면 밖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유리라도 뒷면에 무엇이 붙어 있으면 세상은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가리워진 것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까지도 내다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져 있거나 무엇인가에 가리워져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투명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거울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만을 들여다보며 사는 사람처럼 그저 당장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저 눈에 보이는 육체의 요구에만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머언 피안의 세계까지도 내다 볼 수 있는, 무언가 진리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무언가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러한 투명한 눈을 가졌던 한 여인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26:6-13절과 요12:1-9절에서도 동일하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이 중요한 사건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오늘 말씀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죽은지 나흘이 지나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살려 주신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을 때에 일어났던 일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잔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가 옥합속에 귀하게 간직하고 있던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지고 와서는 옥합을 깨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흘러내리는 그 향유를 가지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팔아먹게 될 가룟유다가 나서서 마리아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비싼 향유를 왜 이렇게 허비하느냐? 이 정도면 적어도 삼백 데나리온은 될터인데 차라리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릴텐데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한단 말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과 가룟유다의 말을 잠자코 듣고 계시던 예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으니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삼백 데나리온 값어치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마리아의 모습을 통하여 참 헌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1.가장 귀한 것을 주저없이 주님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마리아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가장 고귀한 것을 조금의 미련이나 주저함없이 기쁨으로 주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드렸던 나드는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지방에 있는 식물에서 채취되는 기름으로 아주 고가의 향유였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말씀에 보면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순전한 나드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나드향으로 값이 3백 데나리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까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친다면 무려 1500만원어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 향유는 옥합에 담겨 있었는데 옥합이란 대리석 비슷한 돌로 만든 병으로 그 자체의 값만해도 상당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러한 막대한 액수의 향유를 가지고 와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옥합을 깨트려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몽땅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기에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알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최고의 보물을 미련없이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향유를 머리에 붓는 행위는 당시 이스라엘 지방에 있어서는 가장 귀한 손님에 대한 특별한 예우였습니다. 우리로서는 좀 납득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여 물이 귀했기 때문에 목욕하기도 어렵고 땀은 나고 해서 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손님이 오면 향수로 몸을 닦도록 했다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은 값싼 향수를 이용했는데 오늘 마리아는 가장 귀하게 보관해 두었던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 예수님을 씻겨 드리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정말 가룟유다의 말 맞다나 낭비였을지도 모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단순히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이것은 도무지 불합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씻겨 드리는데 무려 1,500만원이 들었으니까 말입니다. 천오백만원가지고 가룟유다의 말처럼 굶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었다면 적어도 오천명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칭찬하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하여 이를 기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물론 마리아가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미리 확실히 알고 주님의 장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아마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예고하신바 있기 때문에 마리아도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아마 알고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정말 주님의 죽음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었느냐 모르고 있었느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주님의 머리에 부은 순전한 나드 한근은 결과적으로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확실히 알고 있었다면 주님의 죽음이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기에 그 주님의 죽음을 더욱 아름답고 가치있고 향기롭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가장 아끼던 향유옥합을 깨고 몽땅 쏟아부어 주님의 장사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한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주님을 최상의 손님으로 대접하는 행위였습니다.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리고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믿음속에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려서 주님을 메시야로 대접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자신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섬겼을때 결과적으로 주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행위가 되었고, 그것은 결국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주님의 머리에 쏟아부은 1,500만원어치의 향유는 결코 헛된 것도 아니고, 낭비된 것도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하게 사용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만약 주님을 안다면 우리도 최선의 것으로 주님을 대접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들로 인하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드린 그것도 최고의 가치를 갖게되고 주님의 역사도 이루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발아래 엎드려 주님을 섬겼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주님을 섬길 뿐 아니라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사실이 생략되어 있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요12:3절에 보면 그러한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겨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리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엎드려서 얼굴을 거의 발에 갖다 대야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길을 나막신을 신고 다녔던 그 발에서는 아무리 주님의 발이라해도 아마도 냄새도 났을 것입니다. 그냥 손으로 냄새나는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군다나 자신의 머리칼로 코가 거의 발에 닿을듯한 자세로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더군다나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여자의 머리는 아주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보면 남자가 머리가 길면 욕이 되고, 여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앞에서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을 단정치 못하고 수치가 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물론 오늘날 우리 사회속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기쁨으로 엎드려서 자신의 그 소중한 향유를 사용하여 그 소중하게 가꾸어온 머리칼로 그 냄새가 나는 발을 씻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본래 남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노예가 하는 일을, 그것도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를 쏟아 부어서, 더더구나 여자로서의 모든 수치심도 창피한것도 잊어 버린채 땅바닥에 엎드려서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당신의 노예입니다. 나는 당신의 발을 씻겨드리기에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 눅3:16에서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당신의 발을 씻겨드리기에도 부족한 종입니다. 그러니 나의 섬김을 받아주십시오라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이러한 자세가 진정한 헌신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가장 확실한 의사표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그야말로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가장 분명한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자신이 낮아질 수 있는대로 최대한 낮아져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참다운 헌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고 오늘 헌신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여전도회원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저주받은 그 멸시받은 그 처절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십니다.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믿고 죄와 사망가운데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진정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다면 오늘 자신의 가장 소중한 주님께 모두 드린 마리아처럼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마땅히 그분을 위하여 여러분의 소중한 것들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욱 주님께 기쁨을 드리며 우리도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가운데서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받는 아름다운 삶이되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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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예배] 찬양대 헌신예배 기도

 

 

 

 성경: 이사야 43:21, 에베소서 5:19,20

 <찬양과 감사>
홀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드립니다. 미천한 저희를 불러 주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이전에 세상과 마귀를 찬양하던 입술을 정케 하사 주님을 찬송하는 새 노래,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귀한 은총을 내려 주신것도 말로다 형언할 수 없을 만치 감격 적이고 복된 일이 온데 특별히 저희들에게 귀한 달란트를 주셔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오니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저희들은 말문이 막힐 뿐이옵니다.
 <간구>
이 시간은 저희들을 주님을 힘껏 찬양할 수 있는 찬양대원으로 세워 주신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놀라워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으로 찬양대 헌신 예배를 드립니다. 모든 찬양 대원들이 뜻을 같이하여 주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는 이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이 시간 헌신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이 저희에게 맡기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고 찬양의 도구로 새롭게 거듭나는 시간이되 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원의 노래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 찬양대가 부르는 찬양이 구속 받은 은총의 감격과 특별한 은사를 받은 데 대한 기쁨을 가지고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찬양할 때에 저희의 모든 것이 다 주님께 드려지게 하시옵고, 형식적이거나 가식적인 찬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항상 향기로운 제물을 주님께 드린다는 정성 된 마음으로 찬양하게 하시고 자랑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찬양대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듣는 이들의 영혼도 감동시킬 수 있는 찬양이 되기를 원합니다. 찬양을 듣는 주의 백성들 심령 가운데도 주님을 찬양 해야 한다는 마음을 더욱 사모하고 사무치게 만드는데 동력이 될 수 있는 찬양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찬양을 연습하는 것 뿐 아니라 믿음과 신앙의 훈련에도 더욱 충실해야 될 줄로 압니다. 항상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않는 찬양 대원들이 되게 하시옵고, 예배 생활도 흐트러짐이 없는 찬양 대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더욱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할수 있는 찬양 대원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찬양이 있기 전에 무릎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함을 뼛속 깊숙이 체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주님을 찬양하기에는 부끄러운 것도 많사오나 찬양을 힘써서 준비하고 주님 앞에 드리는 가운데 저희들의 신앙인격도 격상되게 하시고, 예배 때만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찬송이 끊이지 아니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창양대 대장님과 지휘자 반주자에게 더 뛰어난 재능과 지혜와 건강을 주셔서 귀한 직분을 감당 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시고, 모든 대원들에게도 크신 은총을 내려 주셔서 찬양의 일로 주님께 봉사하며 헌신 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들고 단위에 서시는 귀한 강사 목사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들어 주셔서 온 성도들의 심령에 주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배 순서를 맡은 성가대 임원들에게도 함께 하셔서 실수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시간 함께 예배 드리는 온 성도들의 심령을 주님을 찬양하는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실 것을 믿사옵고 저희들과 언제나 함께하시고, 동행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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