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저녁예배설교] 오직 바른 교훈을 따르라

 

 

 

제목 : 오직 바른 교훈을 따릅시다

말씀 : 딤전6:3-5

1.유일한 완전한 진리인 성경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크게 보면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없이는 우주도 나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이다.

안 그런가? 어떻게 우주만물이 존재하는가? 자연발생설, 진화론 모두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연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생길 수도 없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저절로 될 수 있다는 것은 20만개나 되는 비행기 부품을 다 흩어 놓았더니 어느 날 저절로 조립이 되어 비행기가 나왔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만에 하나 20만개의 부품이 저절로 조립되어 비행기가 된다해도 우주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우주의 부품이 20만개만 되겠는가? 20만개가 아니라 2,000만 조도 넘는다. 아니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저절로 생겨서 저절로 조립되어 이 신묘막측한 질서가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즉 저절로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어찌어찌 해서 생긴다해도 그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 원리와 생명이 이 엄청나고 신비하고 복잡미묘한 존재로 진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한 그대로 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이 정답이고 이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속된 말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걸 바르게 믿으라. 분명히 알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한 것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완전한 선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런 사랑과 선와 의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다. 이걸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경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다. 오직 말씀만이 기준이며, 규범이며, 준거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따를 때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가게 된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결코 다른 교훈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한 자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가장 무식한 자이며 거기서부터 모든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만이 바른 말이요, 올바른 교훈이라는 걸 기억하고 이것만을 받아들이고 따라 살아야 한다. 안 그런가? 정말 옳은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 정말 무슨 말씀이 옳고 선하고 완전하며 무슨 말씀이 우리에게 정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정말로 귀 기울이지 않고 자꾸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려고 한다. 당장에 뭔가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한다. 당장 편하고 물질적 육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도 안 오면서 하나님은 믿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믿는다면서 성경대로 믿지 못한다. 이런 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도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내가 만든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오긴 나오는데 자기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 교회 생활한다. 주일날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바쁘면 밭에 가서 앉아 있다. 십일조도 형편에 따라 자기 기준에 맞추어 하게 되면 하고 못하게 되면 그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교훈을 바르게 따르지 않는 것으로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과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다른 교훈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라. 조금도 가감하지 말고 말씀그대로 믿으라. 이해가 되건 안되건, 내 생각과 같건 다르건 말씀 그대로 믿으라.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리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고 진정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리라.

2.성경을 믿지 않으면 가장 교만한 것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거부하면 가장 교만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인생이다. 당연하지 않나?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있다고 그걸 거부하겠나? 태초부터 있었는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는가? 그런데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

가장 유식한 것은 성경을 바로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한 지식이 뭔가?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지식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나? 진정 인생이 가야할 길과 목적과 방향과 의미와 가치를 누가 알려주나? 오직 성경 밖에 더 있나?

그런데 요즘에 정말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 많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가 그렇다고 하고, 성경이 그렇다고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계22:18,19절을 보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아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말씀이 우습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라.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라. 그리하여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라.

3.성경을 따르지 않으면 문제 발생

딤전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렇다.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이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인데 그걸 믿지 않으면 결국 생명과 진리를 버리는 것인데 문제가 안 발생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결국 거짓 것을 따라가는 것인데, 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도 모르고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서 캄캄한 길을 더듬고 다니는 것인데 어찌 문제가 생기지 않겠나?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왜 날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된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시기와 분쟁과 싸움과 비방과 악한 생각들이 물러가는 것이다. 도리어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악을 행하겠는가?

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위로하며 살게 된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교만한 가운데서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방하고 불화하겠는가? 심지어는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하든지 성경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라.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 넣으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영혼이 소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남에게도 생명의 은총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지 말라.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폐단이다.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조차도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 이익의 방도로 삼는다는 것은 경건을 물질적, 육체적 유익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일 경우에는 삯군 목사요, 성도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세상 행복의 도구로 부려먹으려는 거짓 성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참 목자와 참 신자라도 경건을 올바른 이익의 방도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올바른 이익이란 정신적으로는 경건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참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또한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강건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과 사랑에게 귀히 여김 받게 된다. 그러면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풍성함을 누리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잠3:3,4절에서는 말씀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또 잠3:9,10절에서도 말씀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이런 은혜도 누려야 한다.

그러나 경건을 잘못된 이익의 방도로 사용하면 안 된다.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출세하고 자식이 잘되는 등 그저 세상의 복을 위하여 경건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왜곡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모습들이 있다. 삯군 목자도 있고, 그저 세상적인 복이나 바라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분별해야 한다. 사탄마귀가 그럴듯하게 미혹해서 우리를 자꾸 그쪽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물론 돈이나 건강이 평안함과 기쁨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만을 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그런 것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는 행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오직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르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바른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하자. 경건을 세상적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은혜를 구함으로 진정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서 그 은혜를 세상에 끼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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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생명의말씀]  


 


 


제목 : 영광스러운 흔적

말씀 : 갈6:14-18

1.영광스러운 흔적

캐나다에 메리라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메리의 엄마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어 보기가 매우 흉했습니다. 그래서 메리는 다른 아이들은 예쁜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데 자기는 얼굴이 너무 흉한 엄마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친구들도 네 엄마는 얼굴이 왜 그렇게 보기 싫으냐고 놀려대며 메리와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리가 울면서 유치원에서 돌아왔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또 메리를 놀린 것이었습니다. 메리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싫어. 엄마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놀린단 말야. 엄마가 창피해.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유치원에 오지 마.’

그러자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사진첩을 꺼내어 어린 딸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메리야, 자, 보렴. 엄마도 누구 못지않게 예뻤단다. 이게 불과 몇 년 전의 엄마의 얼굴이란다.” 거기에는 그녀의 꿈 많던 대학시절, 눈부시게 아름다운 결혼 때의 모습, 갓 난 메리를 안고 있는 예쁜 엄마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의 흉터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메리야, 네가 두 살 때란다. 엄마는 너를 재워 놓고 잠깐 시장에 다녀오려고 나왔단다. 그런데 한참을 가고 있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와 돌아다보니 우리 집 쪽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단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집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갔어. 그런데 정말 우리 집에 불이 붙어 있었단다. 나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집 안에 잠들어 있는 네 모습만이 눈에 선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 들어갔어. 사람들이 나를 붙들었지만 막무가내로 불타는 집속으로 뛰어 들어 갔어. 그리고 너를 이불로 싸서 끌어 앉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출구를 찾았다. 천만다행히 겨우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단다.

몇시간이 지난 뒤 내가 깨어났을 때는 내 몸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나는 너를 불렀다. 메리야, 메리야. 그 때 누군가가 말해 주었단다. 아기는 무사하다고, 메리는 다치지 않았다고....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너무나 감사해서 기도를 드렸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어도, 우리 집은 다 타버렸어도, 우리 메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 나의 모습은 이렇게 흉측한 모습이 되었지.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모습이 자랑스럽단다. 왜냐하면 이 흉한 얼굴은 너를 구한 자랑스러운 흔적이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메리는 엄마의 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메리 엄마의 얼굴의 흔적은 참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흔적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영광스러운 훈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얼굴은 다 일그러졌어도 그 얼굴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얼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의 흉터는 너무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상처요, 흔적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상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생의 가치나 고귀함이나 의미는 그저 혼자 평안하고 잘 먹고 잘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하나 편안하게 잘먹고 치장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도 아니고 영광스러운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얼마나 귀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와 의미와 행복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2:10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서 때로는 아픔이 될 때도 있겠지만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에게 진정한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대로 달려가다가 마음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상처를 입는다해도 그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고귀한 상처라는 것을 기억하며, 또 그렇게 할때에 진정한 행복도 영광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주님뜻대로 아름답게 사용하면 살아갈때에 진정 고귀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오늘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17절을 보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내 몸에 흔적이 있다. 영광스러운 상처, 영광스러운 훈장이 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을 말씀을 따랐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많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겪었다. 나에게는 그런 상처와 흔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부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최선을 다해 달려왔기에 그래서 영광스러운 흔적까지 가졌기에 그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할 자격은 없다.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주인의 소유물로서 낙인이 찍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낙인 이라는 말은 본래 종은 말은 아닙니다. 종이니까. 노예니까. 여러분, 안 그래요? 노예라는 낙인이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습니까? 아니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본래는 수치스러운 것이지요. 그런데 왜 바울은 종의 낙인이 찍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은 종인데 예수님의 종이니까. 낙인은 낙인인데 예수님의 낙인이니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생복락을 누릴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 아닙니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입니까? 세상에서 대통령 종노릇하는 사람도 얼마나 목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대통령 비서실장, 그게 결국 대통령의 종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도 얼마나 목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까? 무슨 대기업 총수 비서만 되어도 얼마나 대단하게 여깁니까? 물론 그래서 그들이 받아 누리는 것도 상당히 있습니다. 명예와 물질도 생깁니다. 속된 말로 끝 발도 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종입니까?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종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누가 예수님의 권세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도전할 자가 있습니까? 누가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영광과 그 생명과 그 은혜를 줄 주인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의 종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종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또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예수님께 어떻게 우리가 순종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설령 그렇게 종노릇하는 것이 때로 힘들기도 하고,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있다 해도 그래서 몸과 마음과 물질적으로 상처를 당한다 해도 그 받은 상처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자식을 위해서 혹은 그 밖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받은 고난과 상처와 아픈 흔적도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일진대 하물며 주님을 위하여 받은 상처와 아픔이라면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자녀와 이웃과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드린 것들도 아름다운 것일진대 하물며 주님을 위하여 드려진 것들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과 상처를 받는다면 장차 주님께 잘했다 칭찬받고 세상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될터이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어떤 주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주님이시며 생명의 주님이시며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주인이시라는 것을, 그래서 나에게 영원하고도 완전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실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자랑스럽게 여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런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런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움이 있더라고 혹시 상처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상처요 흔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의 삶에도 더욱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충성스러운 흔적

여러분, 바울이 가졌던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충성의 흔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기에 숱한 어려움과 고통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섬긴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몸과 마음에는 그로 인한 많은 상처와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짐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로마에서 여러번 감옥데 갇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태장으로 세번 맞았고,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내기도 하였고, 여러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의 위험을 당했고, 잠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얼마든지 편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문벌과 학벌과 돈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들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과정에서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오직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낙인이 찍혀 충성스럽게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삶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는 죽었다. 즉 나는 이제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필요하고 세상에 대하여 관계할 것을 오직 그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정녕 주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고난이긴 하였지만 영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흔적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큰 상급이 되는 흔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확실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떤 흔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이든 모두 흔적을 가지고 혹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향락의 흔적, 거짓의 흔적, 미움의 흔적, 도적질의 흔적, 술과 마약의 흔적, 시기와 질투의 흔적 등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그저 자신의 육신 평안함만을 추구하는 흔적을 남기며 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나름대로 사랑과 선행과 의로움을 흔적 등 나름대로 아름답고 훌륭한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상처와 흔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상처입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상처와 흔적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진정한 기쁨과 안식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상처와 흔적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상처와 흔적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험한 길이라도 이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흔적이요, 가장 자랑스러운 상처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이요,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에 우리는 각자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나 사명이나 직분이나 직책대로 거기에 걸맞는 흔적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에 다른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삶도 보다 기쁨이 은혜가 있고 아름답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그 아름다운 흔적, 그 생명의 흔적, 그 영광의 흔적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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