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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고난의 의미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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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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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포기와 행복

 

 

 


말씀 : 마5:1-12

제목 : 행복과 포기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부딪치는 문제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있으나 막상 교회에 가려고 해도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희생해야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일종의 취미생활이나 계모임 혹은 인격수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투자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것에 비하여 잃는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겨져 잘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은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갖는 생각인지 모른다. 처음에야 어차피 영적인 생명의 진리, 영원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알지 못하고 있음으로 단순히 인격수양이나 혹은 질병의 고침이나 혹은 마음의 위안 등등의 목적으로 나오기가 십중팔구인데 그것을 위한 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솔직히 나도 그랬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전에는 취미생활로 서예와 바둑을 주로 했었다. 이 취미생활은 둘 다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때는 먹 갈기를 배우고, 그 다음에는 수직 긋기와 수평 긋기, 사선 긋기 등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그냥 쭉쭉 긋는 것이 아니다. 붓 끝에 힘이 들어가야 힘 있는 글씨가 되기 때문에 붓 끝에 힘을 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없이 먹을 갈고, 줄긋기 연습하고 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물론 모방이다. 남의 글씨를 계속 반복해서 쓰는 것이다. 한 글자를 제법 비슷하게 흉내를 내려면 천 번을 써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만번을 쓰면 그 글씨에 통달하여 자신의 글씨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엄청난 시간과 정열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서예이다.

바둑도 그렇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도 있듯이 바둑을 두다보면 지면 열이 받아서 또 두어야 하고, 이기면 기분이 좋아서 또 두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너 시간은 언제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밥 먹으러 빨리 안온다고 잔소리도 제법 들었다. 또 낚시도 제법 다녔고, 볼링도 좀 쳤다.

그래서 이러한 취미생활을 즐기다보면 신앙생활을 잘하기가 어렵다. 때로는 교회가 너무 사람을 옭아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평안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도리어 속박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헌금 생활도 그렇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다. 회사생활하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기타 다른 헌금 계산해 보면 그것을 계속해서 적금을 붓는다면 노후대책이 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 먼저 들어 올바른 헌금생활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것이 사실은 처음 믿음 생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갈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교회에 다니려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일까?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그것은 더 좋고, 더 유익하고, 더 기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미 언급한바와 같이 인간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즐겁고 더 평안하고 더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확실하고, 유일한 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생활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고 구속당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세상 살다보면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즐기고 싶은 일도 많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입고 싶은 것도 많다. 이것 저것 눈치보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런데 사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러한 생활가운데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아마도 남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술, 담배의 문제일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좀 바뀌어 있지만 옛날에는 술 담배를 못하면 사회생활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술 담배를 못하면 사람이 째째해지고 좁쌀 영감처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화투놀이도 그렇다. 일반인들 사이에 화투놀이로 재미거리를 삼는 사람도 많다.

회사에 다닐때도 끄떡하면 회식이다, 무슨 경조사다 하여 회사 동료들이 모일 기회가 많았고, 모였다하면 의례히 술⋅담배와 함께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또 어느 곳에 모여 앉아서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처음에 남자들이 교회에 올 때 많이 느끼는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 재미로 살았는데 그런 것 다 포기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낙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런 낙을 포기하면 도대체 인생의 낙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취미생활이 아니더라도 아까 말했다시피 바둑이나 서예나 낚시나 등산, 가족 나들이 등등의 건전한 취미 생활도 그렇다. 사실 신앙생활하다보면 이런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신앙생활하지 않을 때는 주일날을 잡아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가족간에 나들이도 가고 마음놓고 앉아서 바둑도 두고 글씨도 쓰고 하는데 주일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면 도대체 내 생활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좀더 넓고 높은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좀더 나은 것을 위한, 좀더 가치있는 것을 위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위한 가장 현명한 투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투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라. 우리는 분명 무언가 나은 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도둑질이나 강도짓이나 간음이나 이런 적극적인 악을 행하는 사람도 무언가 나름대로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무언가 자신에게 유익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되고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될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잠시잠깐이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유익한 것들도 그렇다.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언가 희생과 투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농사도 그렇다.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봄부터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제거해주고, 거름과 물을 주고, 병충해를 방제해주면서 뙤약볕 아래서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 다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못먹고 열심히 힘써야 하는 것이다.

박사도 그렇다. 정말 제대로 된 박사노릇하려면 정말 힘들다. 심지어는 가정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벌 사장도 그렇다. 물론 호의호식하며 대접받으며 사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직장의 중역만되어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어 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수많은 투자와 인내와 자기포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더 많은 투자와 더 많은 자기포기와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다면 신앙생활은 어떨까? 물론 동일하다. 신앙생활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어서 보다 행복하게 보다 기쁘게 보다 소망가운데 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익하고 좋은 것을 위해서 무언가를 투자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위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앙생활의 유익은 세상에서 얻는 다른 어떤 유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돈과도 명예와도 권력과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유익을 준다. 기쁨을 준다. 은혜를 준다. 생명의 풍성함을 준다.

그러므로 사실상 잃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 더 좋은 것을 위하여 보다 덜 좋은 것은 당연히 포기함이 현명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치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12:24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져 썩으면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이다. 희생당하여 없어지는 것 같지만 더 많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원문의 의미는 「재산을 상실하고 불행속에서 방황하는 거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이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래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 것 이것저것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인데 왜냐? 이런 사람은 세상의 것 대신에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잃어버린 대신에 더 나은 천국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정말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4절도 그렇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무슨 말씀인가?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죄와 부족함과 미련함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 진정한 위로가 그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안식과 위로와 소망이 그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10절에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복된 사람인데 왜냐, 바로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역설의 진리다. 진정 세상 것 욕심 부리지 않고 오직 진리 때문에, 생명의 역사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을 받는 자 그 사람이 부유하고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 천국을 소유하게 되니까,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저 천국에 가서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14:27에서 또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수없이 자기부인과 포기와 희생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말씀들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고통스럽게 어렵게 무엇인가에 얽매어서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평안을 주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또 요8:32에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누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너무 잃는 것이 많지 않느냐고 묻거든 그것은 더 나은, 더 보람있는, 더 가치있는, 더 자유로운, 더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현명하고도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사실을 말해주자.

그리고 그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바르게 알자. 정말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구속이 아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물론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다. 진정한 평안을 위해서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해서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포기해야 할 부분은 포기하고 드려야 할 것은 드리고 헌신해야 할 부분은 헌신하면서 그 안에서 정말이지 세상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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