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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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말씀과 삶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경험이나 훈련이 필요치 않은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십계명중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레20:10) 이러한 내용들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안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에 나타난 ‘말씀’에 대한 표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절의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간직하며, 2절에서는 내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지혜'에게 누이라하고, '명철'에게 친족이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말이나 명령이나 법이나 지혜나 명철은 모두가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니까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기능을 말해준다. 즉 말씀을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말씀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말씀, 오직 예수,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지혜가 되는 것이다.

또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절에는 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경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하는 것이다. 어쩌긴 어쩌겠는가? 그것이 법이고 지혜라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하지. 지키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1-4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말씀을 간직하고(1절) 지키고(2절) 가까이하라(3절 上) 새기라(3절下) 친근히 여기라(4절)는 것이다. 여기서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또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가까이한다는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며, 또 ‘새기라’는 것은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또 친근히 한다는 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특히 지키라는 말씀속에서 2절 후반부에서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눈동자처럼 지켜라.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를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서 4절에서는 말씀한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경계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씀을 지켜 살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시련들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그것은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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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생명의말씀]  


 


 


제목 : 영광스러운 흔적

말씀 : 갈6:14-18

1.영광스러운 흔적

캐나다에 메리라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메리의 엄마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어 보기가 매우 흉했습니다. 그래서 메리는 다른 아이들은 예쁜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데 자기는 얼굴이 너무 흉한 엄마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친구들도 네 엄마는 얼굴이 왜 그렇게 보기 싫으냐고 놀려대며 메리와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리가 울면서 유치원에서 돌아왔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또 메리를 놀린 것이었습니다. 메리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싫어. 엄마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놀린단 말야. 엄마가 창피해.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유치원에 오지 마.’

그러자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사진첩을 꺼내어 어린 딸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메리야, 자, 보렴. 엄마도 누구 못지않게 예뻤단다. 이게 불과 몇 년 전의 엄마의 얼굴이란다.” 거기에는 그녀의 꿈 많던 대학시절, 눈부시게 아름다운 결혼 때의 모습, 갓 난 메리를 안고 있는 예쁜 엄마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의 흉터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메리야, 네가 두 살 때란다. 엄마는 너를 재워 놓고 잠깐 시장에 다녀오려고 나왔단다. 그런데 한참을 가고 있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와 돌아다보니 우리 집 쪽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단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집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갔어. 그런데 정말 우리 집에 불이 붙어 있었단다. 나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집 안에 잠들어 있는 네 모습만이 눈에 선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 들어갔어. 사람들이 나를 붙들었지만 막무가내로 불타는 집속으로 뛰어 들어 갔어. 그리고 너를 이불로 싸서 끌어 앉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출구를 찾았다. 천만다행히 겨우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단다.

몇시간이 지난 뒤 내가 깨어났을 때는 내 몸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나는 너를 불렀다. 메리야, 메리야. 그 때 누군가가 말해 주었단다. 아기는 무사하다고, 메리는 다치지 않았다고....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너무나 감사해서 기도를 드렸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어도, 우리 집은 다 타버렸어도, 우리 메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 나의 모습은 이렇게 흉측한 모습이 되었지.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모습이 자랑스럽단다. 왜냐하면 이 흉한 얼굴은 너를 구한 자랑스러운 흔적이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메리는 엄마의 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메리 엄마의 얼굴의 흔적은 참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흔적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영광스러운 훈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얼굴은 다 일그러졌어도 그 얼굴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얼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의 흉터는 너무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상처요, 흔적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상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생의 가치나 고귀함이나 의미는 그저 혼자 평안하고 잘 먹고 잘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하나 편안하게 잘먹고 치장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도 아니고 영광스러운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얼마나 귀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와 의미와 행복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2:10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서 때로는 아픔이 될 때도 있겠지만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에게 진정한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대로 달려가다가 마음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상처를 입는다해도 그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고귀한 상처라는 것을 기억하며, 또 그렇게 할때에 진정한 행복도 영광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주님뜻대로 아름답게 사용하면 살아갈때에 진정 고귀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오늘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17절을 보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내 몸에 흔적이 있다. 영광스러운 상처, 영광스러운 훈장이 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을 말씀을 따랐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많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겪었다. 나에게는 그런 상처와 흔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부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최선을 다해 달려왔기에 그래서 영광스러운 흔적까지 가졌기에 그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할 자격은 없다.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주인의 소유물로서 낙인이 찍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낙인 이라는 말은 본래 종은 말은 아닙니다. 종이니까. 노예니까. 여러분, 안 그래요? 노예라는 낙인이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습니까? 아니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본래는 수치스러운 것이지요. 그런데 왜 바울은 종의 낙인이 찍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은 종인데 예수님의 종이니까. 낙인은 낙인인데 예수님의 낙인이니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생복락을 누릴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 아닙니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입니까? 세상에서 대통령 종노릇하는 사람도 얼마나 목에 힘을 주고 다닙니까? 대통령 비서실장, 그게 결국 대통령의 종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도 얼마나 목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까? 무슨 대기업 총수 비서만 되어도 얼마나 대단하게 여깁니까? 물론 그래서 그들이 받아 누리는 것도 상당히 있습니다. 명예와 물질도 생깁니다. 속된 말로 끝 발도 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종입니까?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종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누가 예수님의 권세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도전할 자가 있습니까? 누가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영광과 그 생명과 그 은혜를 줄 주인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의 종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종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또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예수님께 어떻게 우리가 순종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설령 그렇게 종노릇하는 것이 때로 힘들기도 하고,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있다 해도 그래서 몸과 마음과 물질적으로 상처를 당한다 해도 그 받은 상처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자식을 위해서 혹은 그 밖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받은 고난과 상처와 아픈 흔적도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일진대 하물며 주님을 위하여 받은 상처와 아픔이라면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자녀와 이웃과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드린 것들도 아름다운 것일진대 하물며 주님을 위하여 드려진 것들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과 상처를 받는다면 장차 주님께 잘했다 칭찬받고 세상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될터이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어떤 주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주님이시며 생명의 주님이시며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주인이시라는 것을, 그래서 나에게 영원하고도 완전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실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자랑스럽게 여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런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런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움이 있더라고 혹시 상처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상처요 흔적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의 삶에도 더욱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충성스러운 흔적

여러분, 바울이 가졌던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충성의 흔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기에 숱한 어려움과 고통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섬긴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몸과 마음에는 그로 인한 많은 상처와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짐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로마에서 여러번 감옥데 갇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태장으로 세번 맞았고,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내기도 하였고, 여러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의 위험을 당했고, 잠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얼마든지 편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문벌과 학벌과 돈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들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과정에서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오직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낙인이 찍혀 충성스럽게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삶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는 죽었다. 즉 나는 이제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필요하고 세상에 대하여 관계할 것을 오직 그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정녕 주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고난이긴 하였지만 영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흔적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큰 상급이 되는 흔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확실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떤 흔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이든 모두 흔적을 가지고 혹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향락의 흔적, 거짓의 흔적, 미움의 흔적, 도적질의 흔적, 술과 마약의 흔적, 시기와 질투의 흔적 등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그저 자신의 육신 평안함만을 추구하는 흔적을 남기며 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나름대로 사랑과 선행과 의로움을 흔적 등 나름대로 아름답고 훌륭한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상처와 흔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상처입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상처와 흔적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진정한 기쁨과 안식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상처와 흔적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상처와 흔적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험한 길이라도 이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흔적이요, 가장 자랑스러운 상처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이요,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에 우리는 각자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나 사명이나 직분이나 직책대로 거기에 걸맞는 흔적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에 다른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삶도 보다 기쁨이 은혜가 있고 아름답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그 아름다운 흔적, 그 생명의 흔적, 그 영광의 흔적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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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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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지혜로운 사람

 

 

 

제목 : 참 지혜자의 삶

말씀 : 엡5:15-18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뒤 다시 3차 전도여행시에 와서 3년간이나 눈물로 목회 하여 세운 교회였다.(행20:31) 그리고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항구도시로 해상교통의 요충지기도 했고, 이 에베소에서 소아시아 전역으로 도로가 나 있어서 인근의 교통의 요충지기도 했다.

따라서 상업과 무역업이 발달하였고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여타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는 교회이기도 했다. 물론 에베소교회만의 어떤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었고, 또한 신분적으로도 자유자와 종된 자들이 혼재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고, 이방인들은 헬라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세속으로부터의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면 1장에서 3장까지는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적인 말씀을 한 다음에 4장에서 6장까지는 주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가 이제 주님을 믿고 거듭난 존재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악하고 혼탁한 세상속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세상 속에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세상 속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세월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는 오늘 말씀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15,16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그런즉」이라는 말은 이유접속사로써 바로 앞부분의 말씀들이 이제부터 논하고자하는 말씀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세상은 어두움이고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에 참예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런즉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다.

즉 이제는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살펴서 빛의 자녀처럼 살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세상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말고 참된 지혜를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차원적인 욕구 속에 살아간다. 1차적인 욕구란 먹는 욕구이다. 좀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2차적인 욕구를 위하여 살기도 한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정신적,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더 고상한 사람들은 3차적인 욕구까지도 추구한다. 이것은 남을 위한 삶이다. 선을 베풀며, 남을 도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추구해야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가지 더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관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할 부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 이후에 우리가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추구해야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만이 진실로 세월을 아끼는 삶인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을 온전하게 준비하는 행위이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삶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얽매여 있는 삶이나 좀더 고상하게 문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나 더 나아가서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까지도 거기에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족한 삶이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삶이다. 반쪽 인생이다. 설령 돈과 명예와 부귀와 세상적인 영광을 누린다해도 그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자. 물론 1차적인 욕구나 2차적인 욕구나 3차적인 욕구도 추구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가운데 미래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되자.

2.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뜻을 살피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지금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주님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시는가? 오늘의 시간들을 주님은 어떻게 보내시기를 원하시는가?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 물질이 있다면, 나에게 건강이 있다면, 나에게 지식이 있다면, 나에게 권력이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살펴서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트루엣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만이 온전한 것이다. 변함없는 진리이다. 영원한 것이다. 그 곳에만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대로 살 때만이 진정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와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까지도 진정한 기쁨과 영광을 받으며 만족을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깨어 기도해야 한다. 물론 주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한 길일 때도 있다. 고난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살길이기에 그것만이 생명의 길이기에 그것만이 궁극적인 승리의 길, 축복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만 하는 것이다.

3.성령 충만하여 사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참된 지혜의 삶을 사는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오늘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소아시아의 중심적인 도시 중의 하나로 상업이 발달하고 농업 역시도 번창해 있었다. 아데미 여신의 커다란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에 따라 향락의 문화도 번창해 있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히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술이란 우리 인간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술은 인간의 윤리, 도덕성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많은 죄악들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또 평상시에는 얌전하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떠들어대기도 하고, 난폭한 짓을 하기도 하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육체적인 제어 능력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술은 인간의 혼미케하는 주범이다. 뿐만아니라 건강을 해치고 시간을 빼앗는다. 그래서 사도는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존재인 술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엉뚱한 것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물론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술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술은 사람을 어둠속에 빠지게 하는 주범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꼭 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혼미케하며 육체와 시간과 건강에 해로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 의미에서 배격하라는 의미이다. 여하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영혼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배격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영생복락의 길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라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도 많다. 술, 노름, 담배, 마약, 향락 등은 우리를 결국은 파멸의 길로 이끈다. 심지어는 그 자체로서는 건전한 것들이 거기에 취해버리면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도 많다. 건전한 취미생활, 돈, 명예, 사랑, 지식, 문화, 과학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건전하고 유익한 것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 취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을 빼앗겨 버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결국은 생명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악한 것들은 배격할 수 있고, 건전한 것들은 올바르게 사용하며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은 단 한번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일회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지속적인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다시는 성령의 세례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그렇지 않다. 지금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가도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언제나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가 성령을 외면하고 성령과의 관계에서 멀리가고자 할 때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허용하신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의 경우에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함을 받기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자.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이것이 진실로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이요,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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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예수그리스도의 종

 

 

 

제목:그리스도 예수의 흔적

본문-갈6:14-18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하고, 성도라고도 하며 혹은 제자라고도 합니다.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운 것은 행 11:26절에 나오는 바와같이 안디옥에서 였습니다. 본래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좋은 의미로 쓰였던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말로써 지금의 예수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단어였습니다. 왜냐하면 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그야말로 별로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었고 숫자적으로도 매우 적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를 때 이는 말그대로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뜻으로 거룩이란 구별된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결국 이 말은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단순한 학생이라는 말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학생은 단지 선생으로부터 지식과 기능, 기술등을 배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에게서 지식과 지혜는 물론 전인격을 배우며 스승의 뜻을 따릅니다. 학생은 졸업이 있지만 제자는 졸업이 없습니다. 제자는 평생 스승에게서 인격, 성품, 지식, 사상, 정신과 신앙을 따르고 본받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단어의 의미속에서 우리가 성도로써 그리스도인으로써 제자로써 어떠한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할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로서는 주님의 가르침과 사상과 인격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으며,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푸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제자로써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던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모든 면에서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1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로써 이것은 어떤 주인의 소유물로서 찍는 낙인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흔적이란 너는 내것이라는, 반대로 말하면 나는 당신의 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은 지극히 불명예스런 말입니다. 그것은 노예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도바울은 자랑스럽게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과 삶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제자의 삶의 모습을 배울수가 있습니다.

1.예수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갖기 위해서는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스티그마 즉 흔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표시입니다. 그것은 나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은 곧 나는 오직 예수님의 지시만을 받아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였다가도 자신에게 위험이 오고 환난이 오면 예수를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 몸에 예수그리스도의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 나타난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에게는 분명한 소속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나는 사나 죽으나 예수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분명한 소속감이 있을때에만이 이 변화무쌍한 세계속에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오직 주님만을 따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명한 종의식이 없다면 상황이 변하고, 환경이 바뀌면 세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여러분의 주인으로서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흔적은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분명한 종의식이 있으면 그것은 충성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충성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도바울을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는 그 몸에 온통 충성스런 흔적 뿐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말은 예수님의 종이라는 낙인이 찍힌채 충성스럽게 걸어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행 14:19절에서 보는바와 같이 갈라디아 지방의 한 성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짐을 당하기도 하였고, 빌립보 감옥에서 착고에 채워졌던 흔적, 고후 11장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태장으로 세번 맞았고, 돌로 맞고, 한번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의 위험을 당했고, 잠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던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숱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흔적은 말할것도 없고 그는 그가 세운 교회들을 위하여 날마다 해산하는 수고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그러한 고통들을 피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그자신이 남들에 비교해서 다른 할 일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문벌과 학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을 위해 스스로 이러한 흔적들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7절에서는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낙인이 찍혀 충성스럽게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갈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 300여명의 감독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혹은 한쪽눈이 없고 혹은 양쪽 손이 없고 혹은 다리가 불구인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써 당시 많은 핍박속에서도 오직 예수그리스도 영광에 동참하려하여,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정녕 주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고난이긴 하였지만 영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랑스러운 흔적이었습니다. 큰 상급이 되어지는 흔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확실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고 그런 흔적을 가지길 바랍니다. 주님의 흔적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물론 몸에 흔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됨의 표시오, 그것이야 말로 가장 영광된 흔적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역사를 위한 흔적입니다.

인류 최대의 영광스런 흔적을 가지고 계신 분은 물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존귀하신 몸에 무지한 인류는 엄청난 상처를 냈습니다. 이마는 가시에 찔리신 흔적이요, 손과 발에는 못에 박힌 흔적이요, 옆구리에는 창에 찔리신 흔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아픔이었습니다.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흔적이었습니다. 영광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메리의 엄마는 얼굴에 화상을 입어 보기가 매우 흉했습니다. 메리는 국민학생인데 그런 엄마가 몹시 창피했습니다. 친구들은 놀려댔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느날 메리가 또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또 메리를 놀린 것이었습니다. 메리는 엄마가 싫다고 했습니다. 메리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메리야 이 엄마도 누구 못지않게 아름다운 때가 있었단다. 자 보렴.”하고는 그녀의 사진첩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녀의 꿈많던 대학시절, 눈부시게 아름다운 결혼때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했습니다. “네가 두살때 였지. 엄마는 너를 재워 놓고 시장엘 갔었지. 그런데 시장으로가는 도중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와 돌아다 보니 우리집 쪽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단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집을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갔어. 우리집에 불이 붙어 있었단다. 나는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너의 모습만이 눈에 선했다. 정신없이 달려가 막무가내로 불타는 집속으로 뛰어 들어 갔어. 그리고 너를 보자기에 싸서 끌어앉고 뛰었다. 어디론가 그저 뛰었다.

어떻게 밖으로 나왔을때 나는 쓰러져 정신을 잃었지. 몇시간이 지난뒤 내가 깨어났을때는 내몸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나는 너를 불렀다. 그 때 누군가가 말했다. 아기는 무사하다고....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단다. 그후 나의 모습은 이렇게 흉칙한 모습이 되었단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나의 이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그리고 감사한단다.” 메리는 엄마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엄마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메리 엄마의 흔적은 참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값진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은 그보다 더 비교할수 없이 더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이든 모두 흔적을 가지고 그리고 흔적을 남기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향략의 흔적, 거짓의 흔적, 미움의 흔적, 낭비의 흔적, 도적질의 흔적, 술과 마약의 흔적, 시기와 질투의 흔적, 게으름의 흔적 등등을 가지고 혹은 남기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슨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라십니까? 무슨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사도바울은 오늘 14절에서 우리에게 가장 값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이여,

우리 정말 아름다운 흔적들을 남겨 봅시다. 아름답고 값진 흔적을 우리몸에 지녀 봅시다. 우리모두 정말이지 아름다운 그리고 영광스런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가장 값진 것으로 만들어갑시다. 가장 영광스러운 흔적을 남기는 복된 삶을 살다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품에 안기는 가장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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