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 사순절 주일 예배설교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 앞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정말 주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영성을 유지하며 살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주변에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문화가 급속히 발달하고, 물질이 풍성해짐으로써 질적, 양적으로 더 높고 더 많고 더 다양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고,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는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는 말도 흔히 합니다. 맞습니다. 차라리 안 보고 모르면 갖고 싶지도 않고, 먹고 싶지도 않을 텐데 자꾸만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옷, 좋은 집들이 보이고, 번쩍번쩍 빛나는 차들이 돌아다닙니다. 더 크고 더 좋은 냉장고 텔레비전 휴대폰 카메라 컴퓨터 등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눈이 높아지고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걸 소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가전제품도 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아니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도전하게 만들어 인간의 삶에 발전을 가져오는 동력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번영을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풍요롭고 넉넉하고 마음 껏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 되었는데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외형적으로 풍성해진만큼 그렇게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만족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었습니까? 사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엊그제 뉴스에 보니 살인 강도 강간 등의 흉악범죄는 해마다 증가일로에 있다고 합니다. 묻지마 폭력이 증가하고 결혼도 잘 하지 않으려하고 결혼을 해도 아이도 잘 낳지 않으려고 하고 이혼율도 세계최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또 사회적 갈등은 왜 그렇게 많습니까? 툭하면 싸우고 헤어지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머리에 띠 두르고 결사반대, 결사 항전을 외치며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일들이 많은지...

옛날에는 어렵고 힘들어도 잘만 살았는데 요새는 왜 그렇게 갈등이 많고 참 이상하지 않나요? 이만큼 풍요롭고 넉넉하게 되었으면 마음도 좀 더 넉넉하고 서로 받아주고 이해하며 갈등없이 살 만도 한데 말입니다.

그게 다 왜 그렇습니까? 소유나 과학이나 지식이나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올바르고 가치있게 사용하여 인간의 행복을 위한 보조도구로 활용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도리어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자꾸만 사회가 삐그덕거리고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가장 큰 유혹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까먹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르고 예민한 영성으로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격할 것은 배격하며 우리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5,16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어그러지고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속에서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예수님의 시험-사탄에 대한 승리의 선포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감히 마귀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물론 예수님이 그 시험을 허락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의 선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죄가 들어왔고,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에게는 고통과 사망이 왔습니다. 결국 인간의 고통은 사단의 시험에 짐으로써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사망권세를 물리치려면 사탄의 유혹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망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가 쫓겨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일부러 마귀의 시험을 허락하셨고, 보기 좋게 물리치심으로써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해 오는 마귀사탄의 도전을 우리가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마귀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므로 그 안에서 사탄 권세를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를 물리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삼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분별력을 가지고 사탄의 흉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왜곡되고 유혹많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고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우리 스스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겠습니까? 누가 스스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죄의 유혹을 이기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스스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권세와 싸워 이기지 않는 한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도로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풍성해 진다해도 사단의 세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과학도 지식도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것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처럼 문명이 발달하고 풍성한데도 오히려 더 불평과 불만과 갈등과 걱정근심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살아가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은혜임을 압니다. 함께 나누어야 함을 압니다. 서로 존중함을 압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압니다. 위로부터 평안과 기쁨과 자유와 은혜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려분, 진정으로 행복을 원하신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온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다른 잣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잣대로 삼아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과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적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그렇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물질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 있는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보라는 유혹을 합니다. 그러면 배도 불러서 좋고, 동시에 너의 권능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한마디로 비록 떡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비록 배가 고파 떡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하나 그러나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려서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떡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요구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설령 내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악의 존재의 말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분명히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물질인 육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물질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고, 물질이 우리의 욕구 중 많은 부분을 충족시켜 주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코 물질을 하나님과의 사람의 관계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이게 뒤바뀌어져 있습니다. 물질지상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물질이 사람보다 위에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보다도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물질의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은총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누려야 할 사랑과 기쁨과 은혜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자신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면 바로 거기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도 하나님도 행복한 파라다이스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는 결코 물질을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고, 물질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다운 인간의 가치를 앞세우고, 이웃과의 관계를 앞세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앞세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더욱 온전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명예적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1차 유혹에서 실패한 마귀는 겁 없이 다시 도전합니다.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였느니라.’(마4:7)하시며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뛰어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정말 그것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일이라면 뛰어 내릴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께 있어서 그까짓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뛰어 내릴 때가 아닌 것입니다. 마귀의 말을 듣고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이 때에 뛰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참람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설령 뛰어 내려도 끄떡없어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수 있다할지라도 나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죽음의 장소라도 가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한 것이라면 불속에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엉뚱한 일에 용감해서는 안됩니다. 잘못된 일에 용감해서는 안됩니다. 쓸데없는 영웅심리로 혹은 뭔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으려는 어리석은 행위는 삼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무언가 인정받기 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명예를 얻기 위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의 일을 하거나 무슨 직분을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야말로 갓난아기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를 얻으려는, 인기를 얻으려는, 뭔가 튀는 행동을 통해서 인정을 받으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왜곡된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정석대로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그 방법도 올바르게 되고 결국은 결과도 나타나게 됩니다. 설령 결과가 더디 나타나거나 혹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해도 언젠가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실하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디 이루는 한이 있어도, 아니 세상에서 비록 명예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그저 진리 안에서 성실하게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명예나 영광보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인정과 상급과 영광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천하만국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하시며 호통을 치며 마귀의 교활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교활한 종교적 시험이었습니다. 자신에게 경배하기만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눈한번 질끈 감고 절을 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어떻게하든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책을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나가 누굽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이 뭡니까? 죄의 세력입니다. 죽음의 권세입니다. 지옥의 권세입니다. 오늘날 그런 게 뭘로 나타납니까? 때로는 돈으로 나타납니다. 권세로 나타납니다. 과학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로 나탑니다. 물론 돈이나 과학이나 이성이나 이런 것들 자체가 사탄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할 때는 사탄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들을 돈에게 무릎을 꿇게 합니다. 권력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향락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개인이기주의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편의주의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그러면 너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속삭입니다. 마치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했던 수작과 똑 같은 것입니다. 따 먹어라. 따 먹어라. 그러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할 대상은 오직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이렇게 교묘하고 다양하게 다가오는 마귀의 흉계를 간파하고 절대로 거기에 현혹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 묵상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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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sunday worship sermon)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말씀 : 행17:10-15

제목 :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1.성도는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상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몇백만원 몇천만원하는 명품 옷이나 시계나 구두를 신고 번쩍번쩍 빛나는 고급 세단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신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혼과 인격과 정신과 생각과 가치관이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원래 신사 즉 gentleman은 ‘가문이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도 큰 띠 紳, 선비 士자를 써서 옛날 중국에서 예복을 입고 큰 띠를 맨 고위직에 있는 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사란 본래 높은 지식과 인격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보다 고귀한 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입니다. 이 보다 높고 고상한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최고의 윤리 강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높고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식과 윤리강령을 가진 사람이므로 마땅히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벧전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인데 거지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나라의 백성인데 속되고 추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 고귀한 신분에 걸맞게 고상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 기억하며 몸과 마음과 말과 행동과 영혼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품위 있고 단정한 참 신사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주의 은총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사다운 면모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그러워서’라는 말씀은 본래 ‘고귀한 혈통의, 마음이 고상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 쓰던 개역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이 원어의 뜻에 훨씬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신사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2.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우선 그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본 11절 말씀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은 너그러워 즉 고상하여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속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고상한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순전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베뢰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사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마음, 신사적인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돈이나 일이나 향락이나 이런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으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는다해도 결코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3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네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인데 이런 마음은 완고하고 강퍅하여 죽어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받는데 건성으로 받아 말씀이 심비에 새겨지지 않음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실족해 버리는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한 것 같은데 마음속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욕심이나 향락이나 이런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어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터서 조금 자라다가 세상 것에 묻혀서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곡식이 잡초 속에 떨어져 겨우 싹을 내긴 했으나 잡초에 묻혀 아무런 결실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씨앗이 잘 싹이 트고 자라나 30배, 60배, 100백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네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애굽왕 바로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끝까지 완고하고 강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다가 끝내 열가지 재앙을 당하고 전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을 만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까지 팔아 넘겼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람으로서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고, 결국 비참한 자살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을 탐을 내다가 부부가 함께 죽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을 따라 다니며 열심히 믿음 생활하는 것 같았으나 믿음의 뿌리가 없어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결국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보았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베드로사도를 초청한 다음에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초청해서 모아 놓고 기다리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러 오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모셔 들여 겸손히 말씀을 받음으로 온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지치고 곤한 몸으로 돌아와 항구에 배를 대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인 베드로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는 주로 호수의 가장자리 근방에서 잡히지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은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헛그물질을 했기에 지칠대로 지쳐 이제는 그물질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까지 별거 아닌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주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여러분, 저는 농사도 잘 모르고, 여러분의 직장이나 경영하는 사업장의 상황이 어떤지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농사를 짓는 일이나 직장생활하는 일이나 사업장을 경영하는 일에도 제 말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각론에 들어가서는 여러분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되 근본적인 원칙은 반드시 제말대로 하십시오. 겸손히 저의 말을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배격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방법은 여러분들보다 만배 억배 수백 수천억배 더 좋고 더 크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 안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오직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배가 가득 차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강퍅하고 완고하고 가시덤불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과 이성과 경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밤새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수고해봐야 결국은 헛그물질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베뢰아 사람들처럼 옥토와 같은 마음, 고상한 마음, 신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 인생의 배가 만선을 이루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이렇게 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또 어떻게 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앞에서 본 11절 다시 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라는 말씀은 성경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 의심하며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된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진정 인생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알기 위하여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렇게 성경을 상고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처음에 바울에게 들었을 때는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는 이 고상한 진리의 말씀을 더욱 바르게 자세히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되었고,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분명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일단은 겸손하고 순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디에 생명이 있는지, 무엇이 복을 받는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최고의 신사다운 면모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았다해도 간절하 마음으로 상고도 하지 않으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경험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결코 신사와 같은 인생도, 성공한 인생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초라하고 추하고 자부심도 긍지심도 가치도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면 진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됩니다. 성공한 인생, 멋있는 인생, 신사중의 신사와 같은 인생, 주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겸손히 말씀을 받고 열심히 상고함으로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신사다운 신사의 삶을 살아감으로 빛과 같이 빛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짜 신사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죄와 악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불의에 굴복하고 죄와 야합하고, 세상과 짝하며 추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과 벗하며 지내면 신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짧은 신앙경륜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킬뿐더러 바울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바울은 베뢰아에 오기 전에 데살로니가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모함하여 체포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간신히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긴 했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전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 이곳 베뢰아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이 전도는커녕 도리어 신변이 위험해지자 예수님을 영접한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일행을 아덴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지 불과 한 두달내지는 몇 달 밖에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많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을 무슨 이단자나 사이비 집단으로 몰아간다면 혼란에 빠지고 미혹당하기 쉬운 때였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이런 위협과 유혹과 핍박이 있으면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있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협과 공갈과 유혹과 핍박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였기 때문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릎쓰고 바울일행을 안전하게 아덴까지 피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부인하고 도망가고 숨는다면 그게 무슨 신사이겠습니까? 조금 손해볼 것 같으면 진리를 팔아버린다면 그게 무슨 신사겠습니까?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물론 바울일행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켜주는 신사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조금 힘들다고 진리를 버리겠습니까? 어떻게 조그마한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신앙양심을 팔아먹겠습니까? 어떻게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더럽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 야합하며 친구가 되겠습니까? 그래가지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주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고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내 생각, 고집, 이성,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세상의 모든 죄나 악이나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에게 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신사 중의 신사적인 모습으로 주의 영광 나타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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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주일예배설교]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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