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영의 눈을 활짝 뜹시다

 


제목:영의 눈을 활짝 뜹시다.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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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성령의 능력

 

 

 

제목 : 성령의 능력

말씀 : 창3:1-7

1.죄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여러분, 식충식물 아세요? 곤충 잡아먹는 식물 말입니다. 식충식물들은 잎이나 꽃으로 곤충을 잡아먹는데 이들은 먼저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여 곤충을 유인합니다. 곤충이 이 향기를 맡고 꽃으로 접근하여 앉으면 미끄럽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게 있습니다. 그 웅덩이 속에는 곤충을 녹여버리는 강력한 소화액이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은 그것도 모르고 향기에 취해 웅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들어가면 꽃잎이 닫혀 버리고 곤충은 그 안에서 녹아버려 식물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마귀가 인간을 사냥할 때 쓰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뭔가 향기로운 냄새를 보냅니다. 아름답고 편하고 즐겁고 향기롭고 기쁘게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뭔가 맛있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호기심이 발동되어 자꾸 가까이 가게 됩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가다가 그만 풍덩 빠져 들어가서 허우적거리다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귀의 수작에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에 속습니다. 성과 향락과 쾌락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넘어갑니다. 술과 담배와 마약과 놀음의 유혹에 속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안일함과 편안함의 달콤함 유혹에 속습니다. 그런 달콤한 유혹의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일날 일하면 그 만큼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행복할거라는 유혹의 덫에 걸려 주일날 교회도 못나오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 안하면 더 부자가 되어 더 행복할 줄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십일조 생활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니나노 먹고 마시자 하면 무슨 기쁨이나 행복이 있는 알고 거기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뭔가 한 방에 될 것 같은 달콤한 유혹에 빠져 노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뭔가 황홀하고 쾌감이 느껴지는 기분의 유혹에 빠져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행복할 줄 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남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세요. 거기는 혹시 죄된 육신과 생각으로 맛있고 재밌고 넉넉한 삶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안과 행복과 안식과 자유가 없습니다. 참된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존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는 고통과 상처와 죽음뿐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상) 보세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먹어도 괜찮다.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좋아진다. 하나님처럼 된다. 그러니까 먹어라. 그래서 나무의 실과를 보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에 탐스러웠습니다.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덜커덕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하고 지혜롭고 평안과 기쁨과 가치와 의미와 보람이 넘치는 삶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축복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종신토록 수고해야 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질병과 수고속에 살다가 마침내 죽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혹에 속으면 안됩니다. 사기꾼에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가짜에 속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먹이에도 진짜가 있고, 가까가 있습니다. 진짜는 양식이 있고, 가짜는 미끼입니다. 양식은 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만 미끼는 똑같이 먹는 것이지만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마귀가 던져놓은 아주 맛있게 생긴 미끼가 너무 많습니다. 돈의 미끼, 권력의 미끼, 향락의 미끼, 명예의 미끼, 편안함의 미끼, 자기 중심의 미끼, 지식의 미끼 등 수많은 미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언가 우리 앞에 그럴듯한 것이 있으면 이것이 양식인지 미끼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병들게 하고 고통받게 하고 마침내 죽게 하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인지 우리를 죽게 만드는 미끼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게 유혹인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음성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아무리 달콤하고 그럴듯하고 보기 좋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면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달콤한 마귀의 소리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에게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보람과 의미와 가치와 존귀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하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교묘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미끼를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유혹의 장소를 멀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먼저 마귀가 주는 미끼가 널려 있는 곳을 피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지뢰 전문가라도 지뢰가 널려 있는 지뢰밭으로 들어갔다가는 까딱하면 죽습니다. 세상에는 마귀가 묻어놓은 지뢰가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미끼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다니다가는 어느 순간에 낚시 바늘에 코를 꿸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유혹의 마수에 걸려들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지뢰가 터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장소와 시간 속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유혹을 당합니까?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으로 봄으로써 욕망이 발동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제 보게 됩니까? 죄의 장소에 가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서 보게 되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죄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꾸 보고 듣게 되면 그게 점점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죄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양식을 공급하지 않으면 죄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죄가 성장하고, 생명 양식을 공급하면 생명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죄의 양식이 뭡니까? 왜곡되고 악하고 죄된 것들을 가까이 하며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폭력, 절도, 강도, 간음, 향락, 도박, 술, 담배, 마약, 거짓, 미움, 증오, 원망, 불평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양식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까이하여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죄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죄의 욕망들이 점점 자라나 마침내 활활 타오르고, 그래서 결국 자신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와가 어떻게 유혹에 빠졌습니까? 그것은 그녀가 선악과나무 근처에 간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선악과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였으면 그 근처에도 가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 나무 근처에 갔고, 게다가 마귀와 다정하게 대화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습니까?

6절 상반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러니까 하와는 마귀가 유혹할 때 벌써 그 나무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 나무 아래 있으니까 마귀가 작전을 개시한 것입니다. 정말 저 열매를 먹으면 죽느냐고 했느냐? 그러자 하와는 친절하게 답변해 줍니다. 먹는 것은 물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무슨 말이냐,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 같이 된다. 그러니까 마음놓고 먹어라. 그럽니다. 이 말에 솔깃해진 하와가 나무를 보자 정말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너무나 탐스러운 열매여서 그만 덜커덕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나무아래 간 것도 잘못이고 게다가 마귀의 유혹에 친절하게 대답한 것도 잘못입니다. 아니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위험한 장소에 가기는 왜가며, 게다가 그런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마귀의 말장난에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뭡니까?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다윗도 보세요.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삼하11:2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러분, 이 때는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 중이어서 온 군대가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여 여유가 있었던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쉬며 낮잠을 즐기다가 한가롭게 지붕 위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만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만치 하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의 권한으로 그를 데리고 오라 하여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고 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은 있지 말아야 곳에 있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고, 결국 크나큰 죄를 짓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긴 그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에서 목욕을 합니까? 일부터 유혹이라도 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하긴 세상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다윗은 그곳에 있지 말아야 했습니다. 설령 눈에 보여도 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게 보이면 빨리 집안으로 도망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었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 바라보다가 결국 큰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근처에 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눈에 띄어도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공연히 근처에 얼씬 거리다가 못 볼 꼴 보고 영혼을 도둑질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잠23:31에서는 말씀합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포도주는 아름답습니다. 달콤합니다. 기분을 알딸딸하게 만듭니다. 찰랑찰랑대면서 사람을 유혹합니다. 더구나 오색불이 휘황찬란하게 번쩍번쩍 거리며 빛나는 불빛 아래서 보면 더욱 아름답게 반짝이며 유혹합니다. 그러면 침이 꼴꺽 넘어가고 그러면 결국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곳에 가까지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시고 싫어하시는 곳에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마십시오.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싸우고 죽이고 하는 그런 장소나 시간에는 근처에도 기웃거리지 마세요.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마세요. 향락과 오락과 도박과 음주가무가 있는 그런 곳에는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가면 자칫하면 그 유혹의 웅덩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맨날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려도 유혹에 빠지는 판에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어떻게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유혹에 빠집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상황이 문제입니다. 죄의 장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의 장소에서 죄와 무지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속에서 죄와 무지와 교제하고 그런 것들을 들으며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인생인양, 그것이 행복인양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식어집니까? 왜 강단에서 선포하는 말씀들이 오래가지 못합니까? 왜 천국과 지옥이 자꾸 의심이 갑니까? 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까? 세상에 발을 딛고 세상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 나라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소리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들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을 몇 십배 몇 백배 더 많이 말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그러면서 산속으로 들어가 살라는 것입니다. 빨리 천국으로 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들에 물들고 끌려다니지 않도록 주님을 가까이 하고, 거룩한 장소를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은 절대로 세상의 죄되고 악하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유혹의 장소를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전에서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수고하며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진리의 길, 생명의 길,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는 곳, 주님과의 교제가 있는 곳, 성실하게 진실하고 열심히 그런 곳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유혹의 장소를 피한다해도 그래도 유혹은 다가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몸담고 살고 있는 한 죄된 세상과의 접촉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있는 장소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안하고 승리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는 해야 합니다. 적이 공격해 오는데 변변한 무기하나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서만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분별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로마 공화정시대의 안토니우스는 황금의 혀를 가진 웅변가였고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최고의 장수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절세미인이었다고 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먼저 안토니우스와 함께 가장 유능한 장수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저를 유혹하여 결혼하여 케사리온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저가 암살 당하게 되고 그러자 어떻게든지 케사리온을 유리한 위치에 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결혼을 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클레오파트라도 더 이상 자신이 설 곳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이어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당대 최고의 장수도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능력과 용기와 의지와 지성 이런 것들 결코 유혹 앞에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오직 한가지 우리가 믿을만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여 말씀의 칼날로 물리쳐 버리는 길 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더럽고 추하고 죄된 장소와 시간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곳을 혐오하여 멀리하게 됩니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엡6:13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즉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경의 검 이런 것들로 무장하고 있어야 마귀사탄의 흉계와 유혹과 도전을 깨트려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유혹의 장소를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장소에 서성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은혜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와 섬김이 있는 곳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죄되고 추한 곳에는 가지도 말고, 달콤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들을 바르게 분별하여 물리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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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풍성한 은혜

 

 


제목 : 은혜를 풍성하게 합시다.

말씀 : 고후8:1~7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안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에서 헌금을 은근히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헌금 때문에 교회 오기를 꺼려하기도 하고 성도들 중에도 헌금으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거나 때론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 돈에 관한 문제는 교회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상당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친구나 이웃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간이나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돈 문제는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헌금에 관한 문제는 가능한 회피하고 싶고 가급적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함도 돌리지 않고, 강단에서 헌금하신 분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이름을 부르면 헌금한 것을 광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리지 못한 분은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하신 분을 확인해 드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보에는 싣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은 이래저래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속 침묵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계속 덮고 간다면 직무유기이기 때문에 부득불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일조나 기타 헌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순종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신14:22에서는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고, 레27:32절에서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고 하셨고, 눅11:42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모셨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종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요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복의 근원이십니다. 분명히 진리이시고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 안에 우리가 살길이 있습니다. 복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 따라서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릴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2.헌금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두 번째 의미는 헌금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요, 믿음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6:21절을 보겠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는 몸도 물질도 시간도 열정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 큰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오실 거라고 여겼던 분들 중에 못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물론 다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왠지 좀 서운했습니다. 왜 서운했을까요? 축의금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분들의 저에 대한 마음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면 다른 이유를 일단 접어놓고 왔을 터인데 나라는 존재가 그들이 다른 것을 포기할 만큼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못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농사일이나 기타 다른 모든 일을 젖혀 놓고 가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가 농사일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이 가장 크고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라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 젖혀두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몸과 물질과 시간과 열정이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유행가에 보면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넘어 무조건 달려가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이 부르면 열일 젖혀 놓고 그곳이 어디든 저 땅 끝까지라도 달려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별도 달도 다따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까지 따라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결코 지옥까지는 따라가면 안됩니다.

여하튼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마음과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져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 믿음과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몸과 물질과 시간이 그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지 않겠습니까? 정녕 모든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 없어지는 것이고 저 하늘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그래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그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 주신 주님,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앞에 드리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여러분도 진정 자유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헌금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 마음과 믿음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고린도교회도 이 은혜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헌금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은혜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또 4절에서는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라는 말씀이 있고, 6절에서는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7절에서는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베풀어주신 혜택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조건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총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구원받은 것 뿐 아니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할렐루야 찬송이 나오고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을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귀히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힘들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힘껏 헌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보십시오. 극심한 가난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도리어 힘에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들도 어려운데 힘에 넘치도록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받은 바 너무나 큰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이 없겠습니까? 이런 감사가 있다면 어찌 응답이 없겠으며 어찌 섬김과 헌신과 드림이 없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받으면 세상의 것들은 실상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 숨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의 지식 권세 명예 물질 없어도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감사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래서 물질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고 어찌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그런 삶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여기서 앞당겨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난 속에서도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힘에 겹도록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인들이 받았던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은헤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믿게 된 것이 은혜중의 은혜요, 예수님 믿고 보니 내 맘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많이 얻은 것이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장 부요한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사용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영혼속으로 온전히 깊이 깨닫고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심령이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그래서 심령이 더욱 부요해져서 정말 감사 충만, 은혜 충만, 기쁨 충만한 인생이 되시고 나아가 주님께나 이웃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헌금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마음을 드리는 것이요,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나아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드리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에 우리를 위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음의 문제요, 은혜에 대한 응답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더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께 자신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드렸고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드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물질도 능력도 지혜도 이성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걸 알고 인정한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과 헌금과 섬김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이나 헌신이 왜 힘이 듭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내가 번 돈이기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상29:14절을 보십시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생명, 지혜, 능력, 의지, 육신, 땅, 하늘, 공기, 물 다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사실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면서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날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가 기분이 너무 좋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소가 기특하게도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어. 그래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릴 거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내는 기분이 너무 좋아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믿음이 좀 들었나 봅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남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송아지 한 마리가 죽었어.’ 그래서 부인이 누구 송아지가 죽었느냐고 묻자 남편은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을까요?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 않을까요? 뭔가 무슨 변명거리를 만들어 일단 내 몫을 먼저 떼어 놓고 주님의 몫에서 제해 버리는 거지요.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생명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의 몫은 그대로 놔두고 내 몫에서 제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조금 무거운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냥 회피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요,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지,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면, 우리가 누릴 저 영광의 나라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굉장한 것이라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은혜로운 마음, 넉넉한 마음, 풍성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주의 역사 이루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부요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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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감사하는 자의 복

 

 

 

제목 : 감사하는 자의 복

말씀 : 시107:1~7

1.감사는 현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굽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15평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기본 재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월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도 월급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넓고 호화스러운 집과 멋진 청춘남녀들과 그들이 다니는 멋진 직장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나 멋지게 생긴 사람들과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뭐냐고 탄식하며 원망하며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이 귀한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 먹을 것, 입을 것,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 하루 쉬면서 예배드리고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똑같이 기본 재산이나 월급도 많지 않고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자의 사람은 그나마 그 작은 아파트도 진정으로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뱅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릴 줄 아는 부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개를 가지고도 백가지를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백개를 가지고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부자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물론 한 개를 가졌어도 백가지 천가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백개 천개를 가졌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만가지를 주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뱅이인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내 손에 펜 한 자루 쥘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사랑의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입으로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신을 신고 집으로도 일터로도 갈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귀로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은한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해도 손에 펜만 한 자루 쥘 수 있어도, 말만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냄새만 맡을 수 있어도, 내 곁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뭔가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찾는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을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격언에는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고, 지옥은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 불평 낙심 절망하지 말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풍성한 계절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멀쩡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기전에 먼저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저와 여러분은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오늘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일의 복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감사할 때에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감사할 때에 힘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긍정적 적극적 에너지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길이 열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없이 머리와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좌절과 원망이 아니라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정상적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오토다케의 부모나 오토다케 본인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다면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아들을 주셨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이런 꼴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팔다리도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면 이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저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얻어먹는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나 그 자신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리한 여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을 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하며 위대한 일을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감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과 기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갈등과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없애버립니다. 또한 감사는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완화시켜 줍니다. 면역력을 높이고 활력을 주어 육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고 설령 질병이 와도 감사와 긍정속에 사는 사람은 치료가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소화를 잘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잘 되지요, 힘과 의욕이 생기지요,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의 신진대사도 잘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쁘게 하지요, 어려움이 와도 낙심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지요, 모든 일에 긍정과 적극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게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잘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힘과 의욕과 활력과 기쁨을 주고, 매사에 적극성과 긍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오늘이 행복하게 하고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가 곧 믿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아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심을 믿는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이렇게 신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알고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창조, 인도, 거룩, 의, 선, 구원을 믿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사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게다가 천국의 은총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감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이 있는 자도 감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심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건들이 있지만 설령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즉 죄와 마귀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할 때 우리를 부르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고 천국길인지 천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커녕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다만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지금 이미 주어진 것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가운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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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제목 :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말씀 : 고전9:24~27

 

1.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의 농구 코치 중 꽤 유명한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치 노릇을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못해서 유명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맡은 팀마다 계속해서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찌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치가 한번은 시합에 임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오늘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이겨서 챔피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코치와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그 게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겼다고요? 미안하지만 또 졌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게임을 합니까?” 이때 한 선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실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정신력이나 마음의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과 실력이 딸리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부도 안하고 난 시험을 잘 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겠습니까? 농구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농구선수들에게 덤벼든다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노력과 투자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덮어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는 등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기도만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적 이성적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끊어버릴 것은 너희가 끊어 버려라. 너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이래서 저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못합니다. 하면서 변명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끊을 것은 내가 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귀하고 복된 일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은 귀한 일에 쓰임 받겠다,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삶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잘 참고 견디며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하고 귀한 일에 열심도 낼 수 없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며 무사안일 속에 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 속에 휩쓸려 다니며 잘못된 길로 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별볼일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하여 가치있고 의미있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그래서 자신도 남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풍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때 부와 명예를 얻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했을 때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주님께 부름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였을 때 사도라고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사도 바울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버림받아 천국에 못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망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천국에 못갈까봐 두려워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충성스럽지 못한 종이 되어 주께서 넌 더 이상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그 직분 내놔라. 그러실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일을 만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넌 더 이상 쓸모없어. 가치가 없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정말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에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사람들에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히 쓰임받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저 자신의 안일함과 물질적 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겠다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 받고 귀히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가장 귀하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목적을 두고 썩어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썩지 아니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힘써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또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물론 상을 받는 사람이 여럿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달리기를 해도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한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목표를 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야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소망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무조건 열심히 해서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 소망과 목표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소망이고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서도 진정한 평안과 은혜와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목표를 가지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졌어도 또 그것을 향해서 아무리 힘써 달려갔어도, 그래서 혹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어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빈 쭉정이 인생이 되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거나 혹은 아예 버림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최종적인 목적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나아가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다음에는 그 열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일에 열망을 가졌어도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말씀 그대로 나는 지금까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힘써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리기 선수가 출발 총성을 듣고 힘껏 달려가는데 도착점을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권투 선수가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데 계속 허공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라고 뛰고, 죽어라고 주먹을 휘둘러봐야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인생의 경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나 목적지도 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달리기는 달리는데 썩어 없어질 것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은 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혹시 사람에 인정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진정하고 영원한 소망도 열망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어리석은 삶이 되디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 귀하고 온전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말고 혹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주저 앉아있지 말고, 주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선한 역사에 힘써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즌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 그것은 절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설령 열심히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파리 한마리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꿀단지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핥아먹던 파리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점점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배를 채운 다음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고 날개를 파닥였지만 날개가 꿀 속에 잠겨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방 한 마리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꿀단지 속에 들어가면 그럴 줄 몰랐더냐? 욕심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나방은 보란 듯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잠시 후에 이 나방은 파리가 발버둥치고 있는 꿀단지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나방이 환히 빛나는 등불을 향해 날아가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한쪽 날개가 불에 타서 추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고 파리가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나방아, 불에 가까이가면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네 불장난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결국 파리도 나방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과 유혹이 파리와 나방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야 하지만 자신을 잘 다스려 유혹과 욕심을 물리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좋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정치인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직업인이나 직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잠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고 언제 훈련을 하겠습니까? 또 실컷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다음에 진탕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면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가고 싶은 곳 다가면서 언제 예배드리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언제 헌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밖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논다면 기껏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25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자신을 잘 다스려 모든 유혹과 욕심과 욕망을 이겨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좋은 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과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음식도 좋은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답시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맨날 철야기도 한다고 직장에 가서 졸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책망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올바른 목표와 열망을 가지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끊을 것은 끊고 삼갈 것은 삼가고 피할 것은 피하고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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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인생

 

 

 

말씀 : 계1:1~3

제목 :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인생

1.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 방송에서 북한에 대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참 가관이지 않습니까?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김정은 앞에서 열광하는 모습이나 모란봉 악단이니 무슨 악단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놓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김정은을 찬양하는 모습이나 김정은의 측근들이 손자뻘 되는 김정은 앞에서 안절부절하면서 무릎을 꿇고 아부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저러겠나 하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저 짓을 하고 있나하면서 정말 딱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아마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하나는 진짜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김정은을 위대한 지도자로 알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거기 붙어서 아부하며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겠죠.

그러면 여러분,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뭐 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 보세요. 북한 주민들 중 어떤 사람들은 김정은을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며 저렇게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복종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런 망나니 같은 김정은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얼마나 영광을 돌리고 얼마나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고작해야 육신의 생명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권력자 앞에서도 저렇게 두려워서 벌벌 떨고 어쩔 줄 몰으며 복종하고 있는데 하물며 영혼을 천국에도 보내고 지옥에도 보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며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경외한다면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아니 진짜 안 그렇습니까? 세상의 별것 아닌 권세에도 그렇게 두려워 떠는데 어찌 그것과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저 어리석고 무지 몽매하고 악한 인간에게 속아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그 능력과 사랑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은혜와 구원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안다면 어찌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마8장에 보면 유명한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는 하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 백부장을 가상히 여겨 흔쾌히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뭐라고 합니까? 마8:8절을 한번 보실까요?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여러분, 정말 얼마나 순전한 믿음입니까? 여러분,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주만물의 절대적인 주권자로서 나 같은 인간은 주님의 종노릇 할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은 그런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은 우주만물의 절대적인 통치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굳이 가실 필요없이 그냥 말씀 한마디면 그까짓 중풍병은 물러갈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님께서 그 믿음에 감동받아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하시니까 즉시 중풍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자의 올바른 태도이고 바로 그럴 때 능력이 임합니다. 은혜가 임합니다. 당연하잖아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전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따라가는데 주님이 왜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은혜와 능력을 주시면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믿음으로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정말 그 알량한 지식 경험 이성 생각 가치관 그거 좀 고집하지 말고 진심으로 경외하며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아, 정말 어떤 때 답답할 때가 있어요. 정말 인간의 생각 경험 이성 지식 먼지 만도 못한 건데 왜 그걸 내려놓지 못하고 자꾸 그걸 따라가려고 하는지. 그래서 하나님과 경외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교회 생활하고.....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겠습니까? 여러분, 꼭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경외하며 따라감으로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총과 그 안에 있는 구원과 생명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안 그래요? 거기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그래서 그 안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 좋은 것을 놔두고 무엇하러 다른 곳에 뭐 좋은 것이 없을까하면서 기웃거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니 안 그래요? 빛을 가까이 해야 빛의 은혜를 누릴 것 아닙니까? 좋은 것을 가까이 해야 좋은 것을 누릴 것 아닙니까? 능력 있고 멋있고 훌륭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풍성한 사람을 가까이해야 좋은 것을 얻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 존재가 누굽니까? 뭡니까? 하나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게 뭡니까? 가장 기본적으로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곧 예배입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 삶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까지 해야 되지만 일단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말씀 생활에 힘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의 기본이고, 이 기본이 올바르게 잘되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갖 풍성한 은혜들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마련입니다. 안 그래요? 주님 안에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이 있는데요, 생명이 있는데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요. 그러면 주님을 만나 이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어찌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굉장한 맛을 보았는데 어찌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집에 자꾸 가려고 하면 집에 꿀단지 묻어놨나 왜 자꾸 가려고 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 안에 꿀단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게 있는데 어찌 자꾸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고 직접 경험하며 늘 찬양하며 살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시19:8~10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러분, 이게 바로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래서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맛이 얼마나 단지 꿀보다 더 답니다. 꿀보다 더 단 말씀의 맛을 본 사람은 그 인생이 꿀 같은 인생이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향기를 발하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함으로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기쁨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물론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은 우리는 정말 주님의 종노릇 할만한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걸 아는데 어찌 그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겸손히 귀 기울이며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에 어찌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제사장 에스라에 의하여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수문 앞 광장에 모아 놓고 제사장 에스라를 초빙하여 말씀을 읽고 해석을 해주는데 그러니까 곧 설교겠지요. 이 때 백성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새벽부터 오정까지 무려 여섯시간동안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데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에 그들은 계속 아멘아멘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를 하면서 들었습니다. 느8:6절을 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러자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온 백성들은 다 어찌할꼬 하는 마음으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던 모든 모습들을 청산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다짐합니다. 그리하여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민족적 큰 숙원 사업이었던 성벽 중건 사업을 성공리에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승리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진정한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은혜가 충만한데서 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환경이나 상황을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기게 됩니다. 마귀사탄이 아무리 역사해도 사탄의 역사를 바르게 분별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쳐 버립니다. 모든 시험과 유혹과 도전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습니까? 물론 기도할 때도 은혜를 받습니다. 찬송할 때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뭐니뭐니해도 은혜와 능력의 근원은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와 연약함과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엎드려 말씀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인하여 지혜를 얻게 되고 능력을 얻게 되고 힘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어두운 것들이 물리치고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듣는 일에 정열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읽고 듣되 그 알량한 자신의 생각이나 이성이나 경험이나 지식 따위는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 심령 가운데 일어날 때에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나고 풍성해 짐으로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단 말씀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마땅히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아멘 했으면 다음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안 그래요? 아멘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러면 누구 말 맞다나 립서비스 밖에 안되는 것이지요. 물론 기왕이면 립서비스도 안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지만 그러나 립서비스만 하면 그건 아부가 되니까 립서비스만 하면 안되지요. 실제 행동으로 해야 그게 진짜배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로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버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좋은 케이스가 있지 않습니까? 누굽니까?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입니다. 그는 키가 아주 크고 외모가 훤칠했으며, 게다가 처음에는 겸손하기도 했고, 하나님도 잘 섬기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그는 초심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인간적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에 연연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진멸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좋은 양과 소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직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사무엘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신이 직접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무시하는 사울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삼기로 결정하시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사울왕을 찾아가 이렇게 꾸짖습니다. 삼상15:22,23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당신 멋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와는 반대되는 사람은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떠나라,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티끌과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100세에 겨우 아들 하나 달랑 줘 놓고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명령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 사라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이삭을 밧줄로 묶어 번제단의 위에 올려놓고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높이 듭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되레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본분입니다. 왜요? 그분이 창조주이시니까요. 거기에 생명과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복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생명과 진리와 은혜와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영생복락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어두운 것과 왜곡된 것을 이기고 상황과 환경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천국에서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그 그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사모하며 읽고 듣고 아멘으로 순종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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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천국을 볼 수 있는 눈

 

 

 

 

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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