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 ( 대강절 )그 날을 바라보며


 

 


말씀:이사야 35:1-10

제목:그날을 바라보며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켓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으로 1969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라고 하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들은 고도가 나타나면 그들을 구원하여 무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떠들어대기도 하고, 혹은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는 등의 별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희낙낙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하면서 그저 무한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아주 허무하게 종결을 짓고 있습니다.

무슨 결론도 없고 마치 쓰다가 만 책처럼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참된 인생의 목표나 기다림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길인 것처럼, 그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영원한 고향을 망각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면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인생의 의미요, 인생의 가치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도 될 수 없고, 참된 만족과 가치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고, 기다려야할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허무와 좌절과 고독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은혜를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정녕 우리가 기다려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정녕 우리 인류가 소망을 걸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며 소망이며 기다려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1.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두 개의 세상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설령 산다고 해도 온갖 고초속에 살아가야 할 그런 험하고 거친 세상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와 저는 자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나운 세상이요, 소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정 반대의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세상입니다. 광야와 사막 위에 샘물이 솟아나서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나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들이 만발한 샤론평원처럼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저는 자는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의 눈이 열려서 누구하나 소외당하거나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이 함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다만 우리의 상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갓 이상향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된 세상이며,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누리고 있든 누리고 있지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이 두 개의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두 개의 세상중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험하고 절망적이고 영원한 고통의 삶을 살아 갈것이냐 아니면 낙원과 같은 세상속에서 영원한 영광과 은혜의 삶을 누릴 것이냐 우리는 이 두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광야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낙원의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행복과 은혜의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광야의 삶에서 해방되어, 이 절망과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은혜의 삶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먼저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실 그때에만 진정한 은혜와 행복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세상속에서 좌절과 두려움과 참된 평강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고 고통스럽고 근심걱정하게 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열리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저는 자는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모든 것이 물러가고 우리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인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생명과 평강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잊지 말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대강절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제 성찬식과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먼저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은혜를 주시려고 기쁨을 주시려고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은혜의 길이 열리고,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주님을 영접해야 할 인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한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영접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다리를 만들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그 다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풍성한 진수성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다. 8절 말씀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 대로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나라에서, 그 낙원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누가 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깨끗지 못한자는 지나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만이 그 길을 통과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서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하게 되어 질때에 우리는 그 거룩한 길을 건너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동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을 진실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 거룩한 길이,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지로 말미암아, 어둠으로 말미암아, 완고함과 강퍅함과 고집스러움과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르는채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를 맛보며 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수 있으며, 이 어찌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속에 가정속에 교회속에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기쁨과 은혜와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아직은 영광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힘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우리를 괴롭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안식만이 영원한 영광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 같은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건지시어 참된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맛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chojien

,

[절기예배설교] 부활절 예배 설교

 



제목 :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말씀 : 마28:1-6

 


1.놀라운 축복의 사건,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날입니다. 오늘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날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크게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입니다. 육체가 병들어 죽다가 살아난 것보다도, 금덩어리를 산더미처럼 얻게 된 것과도, 세상의 가장 큰 권세를 얻게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요 축복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리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을 열저 젖히고 나오심으로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은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건강이나 권세나 모든 부귀영화는 며칠 후면 다 사라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6:5에서는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고 그 분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자는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모든 죄와 사망과 어둠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는 진실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의 모든 어둡고 추하고 칙칙하고 절망적인 것들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전인적 생명을 부활시키신 사건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덤권세,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 다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혼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생명을 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늘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 계시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무덤입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으스스하고 캄캄하고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만이 있는 곳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덤속에서 당할 그 고통과 절망과 캄캄함과 두려움과 공포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잠시 무덤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언제까지 거기 계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하셔서 잠시 맛보아야 할 과정일 뿐이요, 예수님께서는 그 더럽고 냄새나고 절망적인 무덤의 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가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고, 그 부활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라 죄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죽음과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영과 혼과 육신이 다시 살아 전인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서 승리의 주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이 우리 가운데 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 이상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절망과 더러운 것들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승리의 주님이 그런 것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상황과 어둠의 세력과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등의 마귀사탄의 권세에 억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인도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과 고통과 연약한 것과 절망적인 것들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믿음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온갖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을 친히 보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목격하기 전에는 형편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앞에서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끝났다고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을 때,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셨을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나 절망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혹은 십자가위에서, 혹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혹은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심을 명백히 보여 준 사건입니다.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20:28절에서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고백했지 않았습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인도에 가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믿음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 잘난 지성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를 접어두고 천지의 창조주로써 생명의 주관자로서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져본 사건입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만져 본 것을 기록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오직 그들 자신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는 완전한 부활의 능력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분명한 부활 신앙을 살아가실때에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기쁨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사랑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이간질로 시작된 인간사이의 갈등과 미움과 고통을 깨트리시고 사랑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화와 미움과 저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마귀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사탄은 먼저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합니다. 그리고 더 부추겨서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먹게 함으로써 결국 아담을 공범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담은 사랑하는 아내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갈등과 미움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과 미움은 집안 전체에 누룩처럼 퍼집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와 질투로 죽이게 됩니다. 가족관계가 깨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왜곡된 관계는 더 나아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불신과 미움과 갈등을 유발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 그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투쟁과 갈등과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시기와 미움과 갈등이 편만해 있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몹쓸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에게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온갖 희롱을 다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상)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국 사랑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움과 증오와 멸시천대까지도 가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떨쳐 버리고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을 부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점도 깊이 묵상하여 모든 미움과 저주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주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에게 혹시 미움이나 시기나 저주나 질투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남아 있다면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생명과 사랑과 은혜를 부활시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의 심령속에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부활의 기쁨이 더욱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소망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한마디로 하늘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고, 죽었던 자를 살려 주심으로써 천국의 모형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늘나라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맛보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실 새로운 세계에서나 완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는 인생이 받게 될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만으로는 천국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물리쳤으면 이제는 새생명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그 깨끗하게 씻어진 공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생명으로 거듭나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하고 낙향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님을 알고,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과 소망 속에 다시 모였습니다. 주님의 분부대로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꿈과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4:33절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비겁하게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진정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원수는 패한 것입니다. 죄도 패하고, 마귀사탄도 패했습니다. 죽음도 패하고,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원수도 절망도 다 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는 예수님의 것만이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을 보내며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찾아 오셔서 우리를 모든 죄의 짐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사랑과 믿음을 회복시키고 천국의 소망을 주시는 주님과 더욱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chojien

,

[절기설교 /성령강림절 : 성령을 따라 행하라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choj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