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주시는 말씀  

 

지나간 2018년은 정말 다사다난 그 자체였습니다.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하여, 온 나라에는 선동과 대립, 분노의 영이 뒤덮고 있어 암울하기만 한 해였습니다.
촛불 집회 덕에 새로 집권한 정부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정부의 잘못을 찾아 법정에 세우는 데 열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작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긍정의 언어로 국민을 안심시키는 본업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모습에 많은 분들이 적지 않게 실망하고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룬다고 합니다.
이제 2018년은 지나갔으니 작년 같은 어둠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원하며 2018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 2019년 첫 시간을 예배하며 맞이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첫 시간 나에게 주신 말씀은 잠언 12장 14절 말씀입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새번역: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복록에 족하다.”란 말은 “좋은 것으로 가득 차 만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좋은 말을 하면 복이 넘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에 말씀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우리 인간의 말에도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씨가 되어 언젠가 그 말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좋은 말을 하면 대개 그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
무심코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때로는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용헤원 목사님은 “언어는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인다. 생각이 밭이라면 언어는 씨앗이다. 좋은 생각에 좋은 말을 심으면 좋은 인생을 거둔다” 했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가 있고, 저주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축복도 들어오고 저주도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나의 입술에는 저주의 말이나 부정적인 말 대신에 긍정의 언어, 축복의 언어, 칭찬의 언어가 넘쳐나는 언어 사용을 생활화 하여야겠습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잠언 12장 14절 하반 절에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는 말씀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손이 심은 대로 거두며 손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손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 선을 행하는 데  쓰여질 수 있도록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시며 그 일을 가지고 축복도, 저주도 하십니다.
의인은 그 입의 진실한 말로 인하여 큰 만족을 얻지만 악인들은 불의한 이를 탐하고 말의 실수로 인하여  자신이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어떠한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언제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언제나 좋은 것으로 심고 좋은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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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범사에 감사하라

 

 

 

민수기 11장 4∼15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군대에 쫓기다 홍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당신이 우리를 끌어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 이같이 하느냐” “애굽에서 당신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 했고,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했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게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길을 터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온 회중이 굶주려 죽게 됐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만나를 새벽마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만나가 끊길 수 있다며 또 불안해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 우리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샘솟아 나오는 기적을 통해 그들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1년 후 바란 광야에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땐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다. 이제는 우리 기력이 다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미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저녁마다 메추라기 떼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처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 많은 식량을 공급하심에 경외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같은 음식에 싫증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 저녁마다 진에 덮인 메추라기, 그 기적의 산물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간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감사하는 일에도 조건부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는 게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가 하나님의 응답과 풍성하게 채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렸겠지요. 일종의 조건부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잊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알고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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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 주일저녁예배설교 :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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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사도의 질문

 

 

 

 사도의 질문 (로마서 3:27-31)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1. 내세우고 싶고 자랑 하고 싶을 때, 복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복음을 이해하면 결코 자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인 동시에 모든이의 하나님이 되신다.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 그런즉 자랑할데가 어디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죄악 투성이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3. 믿음으로 받으라.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양팔 뻗어 받으라.

죄성때문에 우리는 무언가 행위를 해야 할 것 같은 교만으로 인하여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4.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낮춰라.

내가 죄인임을 하나님앞에서 인정하라.

자기를 세우려고하지 말라.

스스로 의롭다함을 여기지 말라.

 

5. 구원 얻음에 대해서는 내세울것, 자랑할 것은 없다.

감사와 찬미 밖에 없다.

 


6.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자랑하라.

우리는 그 피로 속죄함을 받았다.

 

7. 오직 하나님 한분만 유일한 신이다.

하나님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이의 하나님 되신다.

 

8.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계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없이 똑같이 주셨다.

하나님 한분, 한 길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9.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장 16절)

 


10.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장 22절)

 

11. 율법을 주신분은 하나님.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 분은 하나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선한것이다.

은혜와 율법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율법을 이루어 가신다.

 

 

12. 하나님의 지혜는 크고 깊고 넓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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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나는 부활이요

 

 

 


말씀 : 요한복음 11장 25-27절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1. 부활은 슬픔이 기쁨으로, 낙심됨이 감사함으로 변화되게 하여 주셨다.

 

2. "나는 - 이다." 라고 이야기 하신 예수님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 하여 주셨다.

 

3. 예수님의 부활과 같이, 우리도 죽음 가운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

예수님이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심

우리 몸이 (육체가) 성전이 됨음 알려주심이다.

 


5. 마가복음 5장 38-43절 / 누가복음 7장 11-17절 / 요한복음 11장 43-44절

성경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들.

주님은 능력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다.

기적을 통해 죽음의 권세에서 부활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기적을 통해 우리의 부활되심과 삶의 능력자 되심을 보여주셨다.

 


6. 예수님 자신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심음 확실히 보여 주셨다.

말씀. 기적.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부활 되심을 보여주셨다.

 


7.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죽어도 부활할 수 있음을 확신 하였기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다.

 


8. 죽음은 새로운 출발이며 확신에 찬 희망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의 은총이 있기에

슬퍼하고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9.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영이 산 사람 거듭난 사람만이 믿을 수가 있다.

예수그리스도밖의 사람은 육은 살았어도 영은 죽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있다.

죽음은 하나의 관문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10. 인생의 마지막 순간 굿바이나 씨유어게인의 인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빼앗기지 않는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주인 되신다.

주님 내 모든 것 다 드립니다.

 


11. 우리에게 예수님이 질문이 있으시다.

"네가 이것(내가 부활되괴 생명됨을)을 믿느냐" (26절)

관념적이고 머리에만 남아있지 않고 진정한 내 고백이 되느냐, 진정 믿느냐

 


12. 부활절은 부활의 주님을 기념하는 것도 맞지만,

부활의 주님을 믿음을 고백하는 날

나의 주님 나의 부활 나의 생명됨을 고백하고 주님을 믿음을 고백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됨을 믿는 것을 고백.

 

13. 내가 믿음이 있을 때, 내가 믿을 때에

 예수님이 나의 부활되시고 생명되시며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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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부활주일설교 <부활의 능력>

 

 


제목 :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 : 요5:24~29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이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 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참 종교의 조건입니다. 제아무리 지적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으로 고상하고 심지어 사랑이 충만해도 생명의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요, 알맹이 없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진짜고 이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믿지를 못합니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마저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건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의 소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거나 말거나 부활은 우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실이고 진실이고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누누이 예언되었던 일이요,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시고 약속하신 일입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리고 물론 당연히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28: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를 보기 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은 물론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그 분이 온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물론 이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영웅호걸이나 종교의 창시자나 철학이나 지식이나 과학이나 그 어떤 것도 하지도 못했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생명을 조금 유익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 생명을 연장하고 조금 건강하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생명을 창조할 수도, 살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우리 주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셨고, 그러자 사망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였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고 명령하자 청년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셨을 때 썩어 가던 나사로가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병들어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소녀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자 즉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오늘 친히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보내며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고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넘침으로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과 승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러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부활의 생명을 마음껏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먼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부활의 능력과 은혜를 마음껏 맛보며 살아가려면 먼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우리 영혼이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죄와 무지와 불의를 비롯한 모든 어둠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다는 것은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의와 선과 진리에 대하여 살아남으로 말씀가운데 진리가운데 선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넘치게 되고, 그러면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악하고 추한 것들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부활의 생명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25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이 때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살아난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냐? 바로 지금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말씀에서의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죽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오직 심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혹 듣는다해도 믿고 회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도 죽은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살아난다는 것은 육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영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난다는 것은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거듭남이지요. 그래서 바로 앞절의 24절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거듭남이고 구원이고 영적인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먼저 바로 이 거듭남, 즉 영적인 부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단은 천국백성이 되고 그 다음에는 부활의 생명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거듭남으로 일단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부활했으면 이제는 과거에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있을 때 우리를 지배하던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들을 뿌리쳐 버려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영적으로 부활했는데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과거에 우리 영혼이 죽어 있어서 죄와 무지와 마귀사탄의 종이 되어 끌려다녔지만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모든 마귀사탄의 흉계와 유혹과 위협을 간파해 내고 호통을 치며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며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물질과 육신의 욕구와 모든 원망과 불평과 좌절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 등의 세상의 모든 더럽고 추하고 속되고 죄된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영혼이 부활한 자의 삶이요, 이것이 진정 능력있는 삶이요, 진정한 자유와 승리를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상황이나 환경이나 돈과 명예와 세상 영광과 세상 즐거움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걱정 근심 염려 원망 불평 좌절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아름답게 감사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평강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할렐루야 찬양하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4:12,13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외치며 능력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고 온전히 거듭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죄로 인하여 죽어있던 영혼이 온전히 부활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으로 이기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어 온전히 거듭난 심령, 부활한 영혼으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약하고 추하고 악하고 속된 것과 모든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예수님의 생명 은혜 기쁨 평안 위로 소망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인격적 부활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부활하면 자연히 인격적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는 우리 영혼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도 알지 못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어서 캄캄한 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별빛도 달빛도 그 어떤 인공적인 조명도 없는 완전히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구덩이에 빠지고 벽에 부딪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는 인생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됩니다. 올바른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저 죄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부활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어 있어서 감각도 없고 분별력도 없고 캄캄한 가운데 있던 우리 영혼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그래서 생명의 빛이 비춰지고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영혼이 살아나면 그야말로 우리 영혼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본분을 바르게 깨닫습니다. 내 육신과 생명과 능력과 지혜와 지식과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을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줄 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 부활의 주님의 은혜가 충만함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희망과 소망과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름다워지고, 정직과 진실과 성실로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송하는 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말씀의 맛이 꿀맛처럼 달아집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을 가까이하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심령 속에 생명의 은혜로 더욱 가득하게 되고 그리하여 현재적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말 그대로 거듭난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과거에 죽어있던 영혼이 살아난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와 죽음과 사탄이 내 안에 역사했으나 이제는 예수님과 의와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을 돌리며 하늘나라를 맛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일단 영적으로 온전히 부활한 생명을 가지고, 더 나아가 과거의 모든 악하고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인 모든 모습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림으로 인격적으로도 온전히 부활하여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육체적 부활

여러분,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일단은 영적으로 부활하게 되고, 영적으로 부활하면 전 인격이 새로워져 인격적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혼의 부활이 전부는 아닙니다. 부활의 완성은 신령한 육체로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마지막 부활이요 완전한 부활이요 궁극적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인데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함으로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간 영혼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8,29절을 보겠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보십시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때가 온다. 그때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한 일, 악한 일은 단순히 인격적으로 선하고 악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인격적으로 아무리 선해도 선한 일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선한 일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설령 세상에서 선을 좀 행한다해도 선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육체적인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육체는 지금의 육체와는 달리 신령한 육체요, 영광스러운 육체입니다. 그래서 늙지도 병들지도 아프지도 죽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염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은 하나도 없고, 하나도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한 육체입니다. 이 신령한 육신은 물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시공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5:42~44절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선 영적으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부활합니다. 이 육체적인 부활이 이루어질 때 부활이 완성됩니다. 영적 인격적 부활을 가진 자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어둠과 마귀사탄과 죽음과 세상의 왜곡되고 무지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을 이기는 삶을 살기는 하지만 100%는 못됩니다. 혹 70%. 혹 80%, 혹 90%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혹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져 전인격적으로 부활이 완전히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 어둠의 권세, 마귀 사탄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을 맞이하여 진정 오직 유일한 생명의 부활이신 예수님을 더욱 온전히 심령 속에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고 부활하고 인격적으로도 거듭나고 부활함으로 마귀 사탄 어둠 권세 물리치신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악한 것들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부활이 완성된 단계가 아니라서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과 육과 혼이 완전한 새 생명으로서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모든 죄와 무지와 추함과 낙심 원망 불평 절망 근심 염려 시기 미움 거짓 위선 다 집어던지고 믿음과 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부활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부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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