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절기예배 설교

 

 

 

제목 : 십자가의 도

말씀 : 고전1:18-25

1.가장 큰 능력인 십자가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와 지식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요, 지혜요, 지식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제 아무리 큰 능력이라도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겠습니까? 제 아무리 고상한 학문이라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온 천하를 다 얻는다해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억만금이 있어도, 지상 최고의 권세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잖아요? 결국 돈도 지식도 권세도 과학도 문화도 스포츠도 예술도 다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인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살리지도 못하고 풍성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전한 의미의 지식과 능력과 은혜는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지혜와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을 풍요롭게하는 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러나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과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살리겠어요? 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겠어요? 아무도 그 아무것도 못합니다. 정치도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고, 예술도 달나라 별나라 가는 과학도 못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요10:10절 보세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요14:6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믿은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걸 모르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모르는 거 하나도 없다해도 생명의 도를 모르면 헛 똑똑이요, 헛 지식인이요, 헛 박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왜 표정들이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생명을 영원히 풍성하게 하는 지식과 믿음을 가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가장 똑똑한 사람, 가장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지옥과 마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똑똑하고 능력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하며 사세요. 이 시대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자부심과 삶의 양식도 가지고 사세요. 최고의 지식인이요, 최고의 지혜자로써 거기에 걸맞게 그 가장 고상한 지식을 바탕으로 거룩함과 의와 진리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며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여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때에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주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 대한 지식이 최고의 지혜이며 능력인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식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주님의 대속함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는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초죽음이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어 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습니다. 생명이 질긴 사람은 열흘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고 때로는 독수리들이 몰려와 산채로 살을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고통이 그 십자가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서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를 위하여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당해야 할 그 끔찍한 죄의 대가를,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처참한 지옥의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평화와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대안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없습니다. 돈으로도 안됩니다. 지식으로도 안됩니다. 과학으로도 안됩니다. 무슨 고상할 철학으로도 안됩니다. 천년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밖에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과 대신하여 받으신 멸시와 천대와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처절하고 끔찍한 참혹한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총이 찾아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찾아 들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날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생명이며, 소망이며, 가장 큰 힘이며 지혜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특별히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며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기적이고, 편협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못난 자아랑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십자가만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고 흠없으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우리의 죄과가 도말됨으로 비로소 새생명의 은총을 덧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된 인생을 살리는 유일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 엡 2: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을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화목한 관계로 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 장벽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려 버린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가장 한 무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강력한 가장 지혜로운 힘은 생명을 살리는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요, 힘이요, 가장 큰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총알 하나면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막대기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늘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터트리면 한꺼번에 수십만의 생명이 희생당합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지진과 해일과 테러와 화재와 전쟁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살리는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생명체에 생긴 조그만 상처하나도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에 조그마한 상처를 내기는 쉽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손가락 하나가 절단되기는 쉬우나 그것을 원상복구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더더구나 죽은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과연 무엇이 가장 큰 능력이겠습니까? 원자폭탄을 수없이 만들어서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여차하면 터뜨려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엄청난 군대를 훈련시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제력을 쌓고, 돈을 벌고, 엄청난 기술력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지식과 지혜와 기술을 쌓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능력 맞습니다. 그런 것들도 어느 정도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병을 보다 잘 치료하고,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윤리와 도덕과 종교와 철학도 어느 정도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감동을 주기도 하며 어느 정도 선한 길로 이끌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의 가치도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나 과학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하는 등의 세상적인 지혜와 힘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좀더 향상 시키고, 좀더 풍요롭게 하고, 좀더 가치있게 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을 건져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 여러분의 삶의 기초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주님께 삶의 근거를 두고 목적을 두고 그 바탕 위에서 다른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 안에 있는 그 힘과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주님의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가장 큰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무엇이 참된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생명에 관한 지식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지식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지혜가 진짜 지혜입니다. 온천하를 얻어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면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도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면 가장 무식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기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냐, 그렇게 무기력하게 붙잡혀서 어떻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 받은 십자가는 필요없으니 뭔가 좀 대단한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먹을 것 입을 것 실컷 먹고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거기서 내려오라, 거기서 뛰어 내려서 너를 구원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이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멸시합니다. 무시합니다. 그게 무슨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냐고, 그게 무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느냐고, 우리는 그 따위는 필요 없으니 돈이나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실상은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련한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재물과 권력과 인간의 이성이 무기력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헛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 20절과 25절 보세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20절)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절)

여러분, 지혜자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가 어디 있습니까? 참된 변사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지혜롭게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강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똑똑하겠습니까? 누가 우주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미래를 알겠습니까?

오직 참된 지혜하는 하나님 뿐입니다. 진짜 진짜 진진짜 선비는 주님 뿐입니다. 참된 변사는 주님뿐입니다. 참으로 강한 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참으로 참된 지식을 가진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 하나님 택하신 인류구원의 방법인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인류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도를 따르십시오. 누가 어떻게 세상없는 소리해도 십자가의 도가 지혜이고 능력이고 복음이고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도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생명얻는 지혜가 없습니다. 생명얻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얻는 도가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도만이 생명의 도요, 지혜의 도요, 능력의 도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때에 정말 큰 능력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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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 겸손한 자가 누리는 은혜

 

 


제목 : 겸손한 자가 누리는 은혜

말씀 : 눅4:25-27

1.신실한 믿음의 복

몇 년 전에 미국 MIT공대 경제학과 조나단 그루버 교수는 ‘종교시장구조와 종교참여 및 결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결론은 올바르고 열성적인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뿐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도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평강과 위로가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게 되며, 선과 의를 향하여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에 신앙심이 없거나 얕은 사람들보다 성공률이 훨씬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배출석률이 두 배가 되면 소득이 9.1%가 증가되고, 복지혜택은 16% 감소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혼인율은 높아지고, 이혼율은 낮아지며, 알콜, 흡연, 마약, 도박, 향락, 음란에 빠지는 경우는 무려 70%정도 감소하고, 범죄율은 35%이상 낮아지고, 행복지수는 30%이상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올바르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기쁨과 소망 속에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땅위에 사는 동안도 감사와 기쁨과 평안 속에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때에 주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영광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나아가 주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기를 애씁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가정생활도 성실하게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도 성실하게 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당연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을 멀리 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마약이나 알콜이나 도박이나 향락이나 음란이나 거짓이나 폭력이나 도적이나 이런 범죄에 빠질 우려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들에 빠집니까? 마음에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만족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런데 예수님 온전히 믿으면 마음에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만족이 있는데 그 딴 것들을 왜 거들떠 보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의 가정이 어찌 평안하지 않겠으며 어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시1:1-3절에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운이며 축복입니다. 내 영혼이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가정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야말로 무한한 복이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인생의 행복이 결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고 기도하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이 세상에서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넉넉함을 누리며 가정이 평안하고 하는 일들이 잘되고 주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사순절의 의미

여러분, 오늘 사순절 둘째주일을 보내고 있는데 사순절은 바로 그렇게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6주간 중 주일을 뺀 40일간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육체적인 것에 얽매어 있던 삶에서 돌이켜 좀 더 주님을 닮아가는 훈련을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며 주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힘쓰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을 영어로 Lent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대 영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봄이라는 뜻입니다. 즉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땅속에 잠자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죽은 듯이 보이던 나무들이 잎새를 내며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 믿음도 더 이상 잠들어 있지 말고 활발하게 움직여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잠들어 있으면 안됩니다. 마치 봄이오면 땅속에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활발하게 움직여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영적으로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지말고 영적인 기지개를 크게 켜고 열심히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 저도 은혜충만한 믿음생활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단 새신자만 아니라 10년, 20년 다니신 분들도 이런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직들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경건의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일본에 후쿠사이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친한 친구가 와서 수탉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주일 있다가 오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일주일 있다가 가니까 아직 그리지 못했다고 한달 있다가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달 있다가 갔는데 또 한달 있다가 오라고 하고, 또 한달 있다가 오라고 하고, 그러기를 무려 3년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림을 부탁한 친구가 인내의 한계에 달하여 “오늘은 그냥 돌아갈 수 없네. 지금 당장 수탉 그림을 주든지 싫으면 아예 그만두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후쿠사이는 그때서야 그를 데리고 그의 작업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를 따라 작업실에 들어간 친구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작업실에 수백장의 수탉그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많은 수탉그림이 있는데 왜 3년 동안 그림을 안 준거냐?” 후쿠사이가 말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가장 좋은 그림을 주고 싶었다네.” 하면서 자신이 보기에는 이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한 장의 수탉그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좋은 그림은 그냥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노래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훈련하지 않고 어떻게 좋은 군인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연습하지 않고 훌륭한 선수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연주하지 않고 좋은 연주자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육체를 꼼짝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육신이 건강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지 않으며 은혜충만한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서 훌륭한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내 생각, 내 고집, 내 경험, 내 편한대로 하면서 신앙이 성장하겠습니까?

여러분, 딤전4:7,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여러분, 신앙도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해야하고 어려워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훈련은 주님 앞에 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성숙하고 성화된 모습을 가질 때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무한한 생명의 열매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좀 더 영적 훈련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경건의 훈련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들, 쉬고 싶은 것들, 안일한 것들, 물질적인 유익들, 내 경험적인 것들 다 내려놓고 자신을 주님 앞에 세우는 일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께 영광돌리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일이 더 소중한 일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삼고, 기도로 주님과 함께 호흡하고,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경건의 훈련입니다. 이걸 잘못하면 세상에서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이성과 생각과 즐거움과 평안함과 경험을 다 내려놓는 신앙의 고백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이 없이는 다른 것도 쓸데 없는 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드릴 때 내 영이 더욱 밝아지고, 생명력이 넘치고, 은혜가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지고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로써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복된 삶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누리려면 또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흡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은혜받은 두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라는 곳에 사는 가난한 과부이고, 또 하나는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써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 두 사람을 소개하면서 당시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가난한 과부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쳐 놓고 이 두사람에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 오셨을 때 고향사람들이 그 알량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셨을 때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들이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을 버리고 겸손하게 엎드려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들은 둘 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이었고, 게다가 하나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하던 과부였으며, 또 하나는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생겼다고 생각하는 나병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때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쳐두고 이 두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조건들은 아무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해도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해도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히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은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더럽게 여기고 무시하고 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엎드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놀라운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렙다 과부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만큼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까? 한마디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 환경, 논리, 경험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상17장에 나오는 데 하루는 엘리야 선지자가 사렙다 과부를 찾아가 물과 떡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가 어떤 상황이냐 하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자기 가족도 먹을 것이 없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왕상17:12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지금 한끼 식량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이 한끼 식량으로 아들과 함께 밥을 해 먹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왕상17:13절입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아니 선지자가 좀 체면이 있어야지, 그래 한끼 먹을 양식밖에 없다는 데 그걸 가지고 먼저 자기를 위하여 밥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래, 그렇게 딱하냐? 그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좀 보태주마,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이나 해 먹어라. 그래야지 밥한끼 해먹고 죽어야 할 형편이라는데 그걸 달라고 하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럼 정말 이 선지자의 행동이 염치없는 행동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들을 곤경에 빠트리려는 게 아니라 네 모든 상황과 환경과 가치와 생각을 내려놓고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렙다 여인은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왕상17:15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보세요. 지금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딱 한끼 식사할만한 떡과 기름입니다. 그게 전 재산입니다. 그걸 먹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입니다. 3년6개월 비가 안왔기 때문에 어디서 꿔 올데도 없습니다. 꿔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굶주린 자식새끼에게 먹여할 그 한끼 식사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식이 굶어 죽었습니까? 왕상17:15절부터 16절까지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놀랍게도 한끼 식량밖에 안되던 가루와 기름이 한끼가 아니라 열끼 백끼 천끼를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에이, 선지자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한끼 밥해 먹고 죽으려고 한다는데 그걸 달라고 하시니 세상에 염치도 없으시지 그런 말씀이 어딨습니까 하면서 그냥 자식 새끼 먹이는데 썼더라면 그들은 그 한끼 밥을 먹고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드렸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먹으면 또 채워지고, 먹으면 또 채워지고 하여 그 극심한 가뭄가운데서 그들은 염려없이 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이웃나라의 국방부 장관이 왔는데 감히 나와 보지도 않고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노발대발합니다. 건방진 놈, 감히 대 아람의 국방장관이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고 고작 종을 보내어 한다는 말이 뭐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그까짓 요단강에 가서 씻느니 차라리 우리나라에 있는 더 큰 강에 가서 씻겠다고 하면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종이 ‘아니 왜 이러십니까? 선지자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해야 하는데 그까짓 요단강에 가서 씻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이러십니까?’라고 하니까 나아만이 요단강으로 들어가서 씻지 않습니까?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씻어도 아무일어나지 않았지만 끝까지 시키는 대로 일곱 번 씻었을 때 나병이 깨끗이 낫지 않았습니까? 어떻게보면 인간적으로보면 황당한 일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니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렙다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공통점입니다. 인간의 논리, 경험, 이성 그거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경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그냥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백배 천배 억배 크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냥 겸손히 하나님을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이것이 경건이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이런 훈련을 하는 기간입니다. 겸손히 엎드리는 훈련입니다. 겸손히 기도하는 훈련입니다.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그 알량한 내 생각과 가치관과 의지와 경험과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능력이 임하고,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놀라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거룩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진실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평안하고 형통하고 교회가 든든히 서가며 주의 영광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며 아니 주님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는 등의 기본적인 경건의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진정 주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위로와 평강을 충만하게 덥입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죄됨을 인정하고 더욱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주님의 은총을 넉넉하게 누리며 주의 영광 크게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과 저들의 가정과 저들이 영위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 교통 역사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이제로 영원까지 함께 하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기도)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직 영광과 존귀만을 받으셔야 합당하신 주님께서 온갖 멸시천대 침뱉음 모진 채찍질과 심지어 십자가의 그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사오니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리나이다.

그러하오나 주님, 우리는 아직도 진정으로 겸손하지 엎드리지 못함으로 주의 은총 온전히 누리지 못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나이다. 주여, 저희들과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시여,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가 더욱 모이기를 힘쓰며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영적 훈련을 잘 받아서 주의 은혜 충만하게 덧입어 주님의 은총 온전히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도 감사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함과 한계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우리들 자신 안에 주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과 소망이 가득하며 가정과 직장과 나라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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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사순절 (깨어 있어 기도하라)

 

 

 

제목 :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말씀 : 마 26:36 ~ 46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고, 다음 주일부터 고난(苦難)주간이 시작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을 “위대한 주간”이라고 칭할 정도로 교회의 큰 명절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주간을 이렇게 중요한 날로 지켰습니까? 그것은 이 주간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위해 성취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주간동안 옛 악마의 통치가 해체되고 죽음이 정복되었고 속죄(贖罪)가 이루어졌고 저주의 닫히고 낙원이 문이 열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하늘과 땅에 가득 차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구원의 축복을 더욱 실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로 고난절 행사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행사는 교인들의 [금식(禁食)]이었습니다. 성경학자 [에피파네스]는 "당시의 사람들이 한 주간 금식했으며 특히 마른 고기나 빵 소금 물 등만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 주간 내내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금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2일정도 굶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주간동안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곤 하였으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와주는 관습이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또 이 기간 동안에는 종들에게 휴식과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때에 황제는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혜의 조치도 내렸고 모든 소송과 법정의 재판을 중단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고난주간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배반당한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행사를 했습니다.
서양(西洋)교회에서는 이날 저녁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성만찬]을 시행(試行)했습니다. 이날에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금요일은 [좋은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해서 이 날에 기도하고 금식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주일 날에도 여러 가지 종교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왕 시대에는 이러한 철야행사는 거대한 등불행사를 동반하였다"고 말합니다. 콘스탄틴노플 전역에 횃불이 세워지고 등불이 켜 졌으며 그래서 온통 도시에 정오의 태양을 보듯이 밝았다고 합니다. 교회 내에 횃불이나 등불을 달았습니다. 이렇게 불을 밝히는 것은 부활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령하는 행위로 상징하였습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의 특징과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에 실제로 동참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하찮고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지 아니하면서도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난으로 몸소 체험하고 실감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깊이 받기 원하여 몸부림쳤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고난주간에 아무런 의미 없이 바쁘게 지내버리는 현대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행위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둘째,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뿐 아니라 형제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주간을 가난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봐주고 노예와 종들을 쉬게 하는 등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간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곧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고난이라는 그들의 신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주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며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영광과 기쁨의 신앙으로 보냈습니다. 이 도시에 횃불을 밝혀 놓고 교회마다 집집마다 등불을 켜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찬양하면서 한 주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는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절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절기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통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고난을 멀리하고 영광만 차지하려고 불신앙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부활의 아침이 이 땅에 다시 임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할 때입니다.

정말 고난주간은 우리성도들이 모든 일에 조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합니다. 말이나 행실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도록 주의함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국가에서는 금요일부터 다 부활절까지 다 공휴일입니다. 국가적으로 3일간을 부활절 휴가로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주간을 겸손한 마음과 영혼을 여밀고 경건하게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활의 승리를 위한 기도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고난주간동안 특별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하는 것도 중요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갖는 것도 중요할지라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두 가지 핵심 요소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으시고 줄기차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제자양성에 주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 나셔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또 틈만 나시면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의 쓴잔을 앞두시고 외롭고 고통스러우나 겟세마네 동산에 나아가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이 기도의 싸움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자기와의 투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질 영력을 덧입으시고 인류 구속역사를 능히 섬기실 수 있었습니다.

▶ 그런데 이때에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눅 22:44에서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 갔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 본문 40절을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왜 제자들이 잠을 잤을까요? 그것은 유월절 만찬 때 양고기를 많이 먹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마음이 슬프고 피곤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대개 마음이 슬프고 피곤하면 잠을 많이 자게 됩니다. 물론 피곤하면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안타까운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4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 말씀은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주님께서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 없이는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참된 봉사를 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교회학교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남편을, 아내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고,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섬길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없고, 기도 없이는 복음을 전할 용기도 나지 않고, 기도 없이는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함께 생각하면서 다시금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을 여밀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39절)
본문 39절에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땅에 엎드렸다 ”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와 복종하는 마음 ”을 보여 줍니다. 또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자세 ”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심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힘들고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물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정도로 예수님께서 받아야 할 잔 곧 십자가의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성을 갖고 계신 분이셨기에 "만일 할 만하시거든" 라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십자가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 처절하게 번민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의 '그러나'는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이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킴으로써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뜻을 앞세우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여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순종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간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나의 소원은 좁고 편협하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크고 원대하고 완전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깨어서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특히 고난주간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나의 가정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나의 사업장과 나의 인생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려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내가 가진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른 기도는 그 결정에 대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원하는 바를 자신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나의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통계나 경험(經驗) 혹은 나타나는 현상만 가지고 될 것이고 생각하고, 사업에 투자하고 모든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사업은 이렇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모든 일들을 이렇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업이 내 쪽에서 보면 모두 잘될 것 같은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닐지도 모릅니다. "주님 이것을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착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여도 그 중심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내일을 알지 모릅니다. 내 직장의 내일도 모릅니다. 내 삶과 물질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내일 어떻게 변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아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부족하고 내 힘과 능력으로는 모자람이 많습니다. 어떤 측면으로도 알 길이 없으며 그것은 아는 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여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렇게 묻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지시를 받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2.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40-41절)
본문 40-41절에서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제자들이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를 향하여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신 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기도해야 할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는 것을 보시고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책망을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책망하심은 베드로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이런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때가 악한 시대입니다. 우리자 자다가 깰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3:11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지 못하고 깊은 잠을 잘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41절의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주시는 음성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사단의 시험을 받습니다. 사단은 강하고 또 간교합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달콤하고 힘이 있어 우리의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어 영적 분별력과 영적 힘을 상실하여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라는 이 말씀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강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게 되면 연약한 육신도 이길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건강한 육신을 가진 자도 자기 자신 하나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들은 육신적으로 약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도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시험을 받더라도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마귀의 간교한 계략을 아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큰 시험이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금 져야 하는가? 왜 지금 인가? 꼭 져야 하는가? 다른 길은 없을까?” 이 시험으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이 모든 시험을 다 이기시고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고,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어 초췌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 온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만 시험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옵니다. 예수님에게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사십일 금식기도하고 난후, 믿음이 좋을 때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시험을 당하거든, "집사님이 믿음이 약해지셔서 시험이 오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건강한 사람에게도 오고, 병든 사람에게도 옵니다. 부자에게도 오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옵니다.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면, 믿음생활이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바로 그때에 믿음의 시련이 닥칩니다. 가난하면 돈 버는 일 때문에 믿음생활에 힘들어 합니다. 사업이 너무 잘되어도 시험이 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여튼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시험은 옵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을 “시험에 빠진다, 시험이 떨어진다,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와도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넘어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깨어서기도하지 못하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결국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에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시험을 찬바람에 비유합니다. 찬바람이 불면, 어떤 사람들은 "아이 추워."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 시원하다"합니다. 찬바람이 분다고 다 감기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 감기 걸립니다. 강한 사람은 절대로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시험이 오더라도 믿음이 강한 사람은 절대로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이 와도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승리합니다. 아무리 큰 시험이 있을지라도 기도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통해서 시험을 이겨내신 것처럼 우리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건강한 성도입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교회는 어떤 시험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집안에만 늘 이런 어려움이 닥치나?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나? 왜 우리 교회에만 이런 일이 생기나? 아닙니다. 다른 집안에도 여러분이 모르는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이 모르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도 우리가 모르는 시련이 닥칩니다. 나만, 나만, 이런 생각은 버리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시험에 듭니다. 낙심합니다.

시험을 당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을 당한 후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은 항상 언제든지 우리들에게 옵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새벽에,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매일 낮에 등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습관을 들이십시오. 기도의 습관이 되어 있는 분들은 무슨 시험을 갑자기 만나면, '그래, 이것도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깨어서 기도하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을 통하여 더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2-4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시험을 이겨내면 우리의 인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됩니다. 계속 시험을 이겨냄으로 우리는 점점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됩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기도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담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46절)
본문 46절에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담대해지셨습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나면 담대해집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기에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약해집니다. 시험에 듭니다. 본문 69절 이후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왜 이처럼 약해졌습니까? 그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할 것을 거듭하여 당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당부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기도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없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서 결국 이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잡혀 갈 때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라고 호언장담하며 큰 소리를 쳤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본문 58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가되 “멀찍이”따라갔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처럼 자기도 잡힐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바깥뜰에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드로에게 한 비자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절)라고 말할 때에 두려운 나머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하면서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70절)라고 말하면서 앞문까지 나갔습니다. 이때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와 함게 있었도다.”(71절)라고 말할 때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모른다 ”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72절) 그리고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73절)라고 말하니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저주를 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닭이 울었습니다.(74절)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75절)

그렇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을 받을 때에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라는 말을 하면서 기도생활에 힘쓰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合理化)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더욱 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베드로처럼 영적 전쟁에서 두려워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나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무능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깨어서 기도할지라도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작정하는 영적 릴레마에 빠진 것처럼 우리들도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영적인 위기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삼상 12:23에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않겠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쉬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와도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기도로 준비한 무슨 일이 닥쳐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로 준비한 성도는 모든 준비를 다 갖춘 성도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해도 그의 준비는 조금 부족한 것입니다.

중한 병이 걸려도 살 수 있고 아무 것도 아닌 병으로도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은 일단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도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늘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는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로 이겨냅니다.

링컨도 늘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외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지혜 아니면 모든 사람의 지혜로도 어떤 일에 대하여 대처하는 능력이 불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참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해도 부족하고 어떤 것을 준비해도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못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내 부족한 그릇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고 구하지 않는 것도 주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가 승리합니다. 사업의 앞날을 하나님께 여쭤보고 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앞날도 하나님께 여쭤보고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승리자가 되게 하시고 결단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망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기도합니다. 끝까지 승리하고자 하는 성도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따라가면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깨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길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4:6-7에서“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에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매우 피곤해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외롭고 괴롭고 답답할 때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메마르고 딱딱해 져서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힘이 없고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매일 도전해 오는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고 적당히 타협해 버립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사명을 부담스럽게, 귀찮게 느끼게 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을 내고 불평하며 심령과 얼굴은 어두워집니다. 사단은 십자가 지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힘들지라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진정 나의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나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죄인인가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할 때 역사를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스피릿을 주시고 영적 싸움에서 큰 승리를 주십니다. 또 우리가 줄기차게 중보기도하면 우리교회와 가족, 특히 자녀들이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면 내가 바라는 개인적인 꿈과 소원이 얼마나 유치하고 근시안적인가, 이 세상의 영광과 권력이 얼마나 하잘 것 없고 덧없는 것인가 깨닫게 해주시고,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기도드리며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고도 비밀한 일들을 보여주십니다.(렘 33:3)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는 힘든 영적 투쟁입니다. 그러나 영적 투쟁 없이는 영적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또 악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영적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동역이 중요합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 주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뜻을 쳐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겟세마네 기도의 용사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되,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친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사단의 궤계를 파하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후에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회개하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연약함을 이기고 많은 십자가를 감당하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기만 우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벧전 4:7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라."고 권면하시고 있는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고난주간을 즈음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를 위한 겟세마네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정말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사순절을 기간을 보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함으로 금번의 고난주간은 정말 새롭게 거듭나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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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사53:4-6절. 403.404.408장.

고난 받은 종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
을 대신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소망 없는 죄인이었을 때 그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물론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짐을 그분이 져주셨어요.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며 대속의 은혜를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사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징계와 채찍에 맞아 우리를 치유하셨습니다. (치유라는 뜻은 우리의 병을 나을 수 있도록
치료하셨다는 뜻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우리를 치유하심은 그분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참으셨던 우리 주님의 징계와 채찍은 우리의 치료를 위한 것이었고,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어요. 우리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분의 뜻을 좇아 어떠한 핍박이 우리에게 주어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
하여 속죄 물로 삼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의 행동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의 자유는 주의
고난이 가져다준 선물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여러분이 밤잠을 자지 않고 아니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나요?

아니면 코피가 터지도록 복음을 외쳐보셨나요? 아니지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백성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성육신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 땅에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많은 이 방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아버지 앞에서 의롭다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 드림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셔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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