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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부활의 새생명으로

 

 


제목 : 부활의 새생명으로

말씀 : 눅24:30-35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날입니다. 진정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이상 어찌 할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처절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러나 그 어둡고 절망적인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그 어떤 날보다도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이고 은혜의 날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탄생한 날과도,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더 얻은 날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은혜의 날이요, 큰 축복의 날입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다시한번 깊이 되새기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시고 살아갈때에 더욱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삶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인간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러킁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끊어졌던 생명이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어떻게 죽어서 썩어 흙이 된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살이 찢기시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창으로 찌름으로 온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에 장사지내었습니다.

그러나 3일후에 가보니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와 살로메에게 천사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노라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500여 문도에게 여러번 나타나셔서 함께 말씀도 하시고 함께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당신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처럼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팔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못박혀 있었는데, 더구나 군병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가 다 쏟아져 내렸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I.Q.가 두자리 숫자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11명 모두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자의 밥이 되어,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어떤 이는 돌에 맞아,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놓고 부활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바보가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습니까?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온갖 모욕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기에, 그들의 귀로 들었고, 눈으로는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기에 그래서 그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속된 말로 때려죽인다해도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런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 없으면 말짱 헛일입니다. 사랑도 좋고, 선고 좋고, 거룩도 좋지만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그거 다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랑이니 선이니 의니 거룩이니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 윤리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사망권세 억눌려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혼돈되고 말세가 가까워오면 올수록 진리는 비진리에 의하여 더 많은 도전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앞으로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 질 것입니다.

요즈음 무슨 다빈치 코든지 뭔지 때문에 교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는 법원에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가 결혼을 했고 그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다느니 뭐 이따위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그림 속에 암호처럼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수도회에서 그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지만 아직 그들중 일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소설과 영화 속에 무슨 역사를 들먹이며 교묘하게 역사성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말하고 있으나 다 허구입니다. 교묘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역사에 대입시켜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인 것입니다.

또 며칠전에 뉴스에 보니까 유다복음서가 공개되었는데 이 복음서는 성경에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다르게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하여 그렇게 했다고 해서 교계에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허튼소리입니다. 정통 신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쓴 책입니다. 영지주의란 신비한 영적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물론 당연히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절대자의 신령한 영으로 오신 분으로 그 예수님과의 신비한 영적인 교통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이단사설에 불과합니다. 그저 인간의 철학일뿐이지요.

여러분, 복음서가 성경에 있는 사복음서만 있는게 아닙니다.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요셉복음등 등 성경외의 많은 복음서와 많은 서신서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구약성경외에 많은 성경과 비슷한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은 가짜이고, 어떤 것은 이단자들이 쓴 것이고, 어떤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읽어도 별 문제는 없으나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는 문서들입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거의 성경과 동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진리와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소리에도 현혹되지 마세요. 세상의 다른 어떤 소리에도 귀 기울지말 고,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도 맡기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누가 뭐라고 현혹한다해도 오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정녕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다시한번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낙심중에 낙향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새로운 희망과 소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된 두사람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 즉 글로바라는 사람과 이름을 알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제자가 예수님을 참혹한 죽음속으로 보낸 뒤에 좌절과 실의속에서 터덜터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아주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능력 많으신 스승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다른 모든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까지도 살리는 이분이라면 능히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의 기대는 십자가 앞에서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권능 있으셨던 주님이 그만 로마 병정들에게 온갖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면서도 저항한번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아도, 채찍으로 내리쳐도, 가시면류관을 씌워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참을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희롱과 조롱을 퍼부어대도 주님은 그저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엇습니다. “어이, 자네가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면서. 한번 지금 그 힘을 발휘해 보시지. 아니, 자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한번 너 자신을 먼저 구원해 보시지 그래. 자기도 못 구하는 주제에 남을 구하겠다고. 정말 웃기는구먼.”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이봐, 남은 구원해 주었다며 자네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뭐,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럼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래. 그럼 좋아, 지금이라도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어주지.”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그냥 매달려 계셨고, 끝내는 그 십자가위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야라고 여겼던 예수,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여겼던 예수, 이 가난과 압제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믿었던 예수,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실망과 좌절속에서 힘없이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망과 좌절 속에서 낙향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찾아가셔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러자 글로바는 기가 막혀서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근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모른단 말이요?」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느냐?」

글로바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일이오. 그는 권세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고, 엄청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병과 죽음에서 구해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엊그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소.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 줄 너희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에 관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불신으로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마음속에 어디선가 한줄이 빛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의심의 안개도 걷혔습니다. 내가 너희위하여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났습니다. 결국 바로 자신들과 이야기하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단 말이오, 우리가 엠마오로 가다가 그분을 보았소,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소.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소.」 그리하여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때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감당해 나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형벌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와 고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그 저주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과 실의와 좌절과 불안과 공포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과 절망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날,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심으로써 모든 죄의 권세를 벗어던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현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보혈로 온전히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사망 권세를 보기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그 부활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좌절하게 하던 모든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영원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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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부활은 우리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집필자 서문강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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