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예배 대표 기도문

 

 

 

할렐루야 전능하신 하나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구주로 믿는 저희들이 이 거룩한 성전에 모여 할렐루야 찬송하며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 모두가 주님의 승리를 진정으로 기뻐합니다.

온 세계 만민들도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믿나이다.

이 시간 저희들 모두가 환희에 찬 감정을 가지고 소망에 찬 눈망울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부활의 주님!

돌이켜 보건대 저희들은 너무 겁쟁이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저희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어떤 모양으로

저희에게 다가올 것인지를 생각하면 잠시도 평안함을 얻지 못하고 괴로움에 시달릴 때가 많았습니다.

주님이 영생의 소망을 저희에게 주셨는데도 이 두려움을 아직도 없애버리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 바로 저희들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부활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제 저희 모두 일어나 의심과 괴로움을 떨쳐 버리고 부활의 증거자로 나설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 어떤 희생이 뒤 따른다 할지라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초지일관 믿음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자비로우신 주님!

주님의 부활의 터 위에 세우신 교회도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증거 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죽음과 질병과 공포와 절망으로 살아가는 심령들을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악한 세력들을 깨뜨려 주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고,

저들이 교회를 찾아왔을 때도 부활의 주님을 뵈옵고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넘쳐 나게 하시옵소서.


이 민족 이 백성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시옵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 백성이 부활의 신앙으로 바로 설 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신실한 일꾼들이 넘쳐 나고 정직이 강같이 흐르는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이 땅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교회에 세우신 각 기관과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산 신앙을 갖고 능력 있게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시며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 밖에 없음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부활의 복된 소식을 대언하시기 위하여 단위에 세우신 서윤석 목사님을 성령께서 친히 붙드시고,

권세 있는 말씀으로 저희 온 심령을 채울 수 있게 하시옵소서.

찬양으로 부활의 주님을 높이는 성가대와 예배를 위해 수종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의 크신 은혜와 복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 하오며 부활 하시어 저희들에게 산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chojien

,


[교회 절기 예배] 부활 주일 대표 기도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꽃꽂이 솜씨로 온 대지에 아름다운 꽃물결 치는 4월 하고도 이 좋은 계절에 우리를 건강으로 지켜주시고, 주의 날을 맞아 주의 전으로 불러주시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아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가운데 화창한 봄날 꽃들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더 충만케 하옵소서.

 

 

천년에 한번 우는 새의 눈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도록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바다가 마르도록 피와 물을 쏟으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남기신 핏자국마다 고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증오와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피 묻힌 우리의 손을 용서와 사랑의 손길로 변화시켜 주시고,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배품과 나눔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옵소서.

그리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드리어진 온갖 어두운 부분들을 부활의 빛으로 물리쳐 주시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이 꽃피게 하옵소서.

 

우리들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금 전도와 사역 훈련에 온 힘을 쏟는 우리들공동체 되고자 온 성도들과 모든 구역들이 힘을 모우고 있사오니, 이 지역사회에 복음의 진리가 힘을 얻고 섬김과 나눔의 손길마다 열매를 맺으며 성령의 능력이 증거 되어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임 받는 교회되길 원합니다.

사랑과 희망에 메말라 황무지 같은 이 땅에 생명의 꽃씨를 부지런히 뿌려서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소망의 꽃을 쉬지 않고 피어가는 교회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웃음을 잃고 메마른 언어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여 절망의 홍해를 갈라 주시고 불행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거두어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샘물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거운 삶에 지친 성도들을 눈물의 골짜기로부터 벗어나 축복의 평원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어두운 인생의 그늘에 밝은 햇살과 화창한 봄날을 내려 주시옵소서.

 

단위에 세우신 담임목사님을 위해 간구합니다.

초대교회 회복의 꿈을 꾸는 교회됨을 위해 1목회 비전을 세우고 온힘으로 목회를 하고 계시오니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하셔서 목회 현장마다 사역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꿈과 계획대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특별히 부활의 메세지를 전하실 때  전하는 말씀 말씀마다 성령께서 7배 역사하심으로 부활과 소망을 살리는 레마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축도하실 원로 목사님을 영육간에 강건케 하시고 남은 여생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세례 받는 이들을 영육 간에 축복하여 주시되 불세례 성령세례까지 허락하여 주시고 앞으로의 믿음 생활 잘 하도록 늘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시온성가대의 찬양을 흠양하여 주시고 이곳저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 헌신 봉사하는 손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블로그 이미지

chojien

,

  
♥ 절기예배 ♥ 

 

 

부활     


얼마 전 중앙일보에 "증인 사생활보호 허점"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검찰에 각종수사기록이 공판 과정에서 그대로 노출되어서 관련된 증인들의 신변과 사생활보호에 허점을 드러낸다고 하는 이런 문제를 크게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증인과 피해자는 보복이 두려워서 진술을 꺼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그 사실을 목격했다" 라고 당당하게 나서서 증명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사건을 확실하게 보았노라!" 이 한마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다 없어지면 사건은 그대로 미궁으로 묻히고 맙니다. 엄연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종종 증인이 없고 증거가 없어요. 그래서 아주 없던 일들처럼 덮어버려지고 마는 사건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어느 하나 똑바로 증거된 일이 있습니까? 왜요? 증인이 없어요. 증거가 없어요. 그 누구도 내가 증인이라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에 따르는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 불이익이냐 이익이냐의 문제가 아니요. 사실을 사실대로 목숨을 걸고 말할 수 있어야 되겠는데 증인들이 다 도망갔어요. 피해자들마저도 보복이 무서워서 다 숨어버렸어요. 진실을 은폐하고 있어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이것이 진실입니다. 사실이 사실대로 이해되면 이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사실이 사실대로 확증되면 거기에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진실도 없고 진리도 없고 정의도 표류되는 그런 세상에 살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암담한 것이올시다. 진리가 땅에 묻히고 정의가 표류하는데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겠습니까?


사실과 사실에 대한 믿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긴장관계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엄연한 사실이지마는 사실을 사실로 내가 믿지 않는다면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어도 내게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이러한 죽을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나는 죽을 병에 걸렸다하는 것을 나는 믿지 않아요. 내가 또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지금 현재는 죽을 병에 죽어가면서도 나는 죽어 가는 사람의 의식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 불신이 문제요. 또 병든 이성이 문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성을 굴립니다. 자기생각으로 자기 합리적 이해능력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사건은 사건이지, 내 마음에 들던 안 들던 사실은 사실대로 있는 거예요. 당신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와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자기 이성의 제한 속에서 만사를 이해하려고 들고 때로는 긍정하고 부정하고. 이게 얼마나 한심한 생각입니까.
또한 오판이 문제입니다. 판단이 빗나갈 때 사건 자체가 빗나가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기 집착과 자기 경험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 경험에 그런 일 없다. 들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다. 그런고로 없다.' 그래서 없는 일입니까. 내가 못가본 세상이 없고 내가 못 본 세상은 없고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없는 거냐고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경험과 지식에 집착해서 진리의 엄연한 것, 사건 자체의 놀라운 진리를 우리가 부정하며 미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됨과 진리 됨을 모독하면서 사는 우리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믿을 때만 사건이 됩니다. 특별히 사랑에 대해서 소중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내가 믿지 않으면 그 사랑은 나와 상관이 없구만요. 한평생을 기뻐하며 감사 찬송을 할만큼 엄청난 사랑을 내가 받는데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내가 믿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과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내 생활은 여전히 종말로 치닫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해와 논리, 그 대단히 중요한 거 같으나 사실 자체와는 거리가 멀답니다. 한번 불신의 노예가 되기 시작하면 진리와 그리고 의를 벗어나서 표류하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엄연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 당시에부터 지금까지 믿는 자가 있고 안 믿는 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믿는 자가 있고 안 믿는 자가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대한 기록들을 성경에서 자세히 보면은 이상하게도요 성경은 '그가 믿었다'고 하는 말보다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더라' '오히려 의심하더라' 그렇게 돼있어요. 당연하죠 나도 의심할텐데. 누군들 그걸 의심 안 하겠습니까? 의심했다고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엄청난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되면 가지는 순간에 그 부활 생명과 내 생명이 연합해서 내 자신이 부활하는 놀라운 기적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때는 이 엄연한 사실도 아무 상관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부활사건과 부활신앙, 그건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성경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구구절절이 우리에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뭐 인간적으로 예수님 앞에 참 못할 짓을 했죠.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만나 주십니다. 그 놀라운 얘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주셔요. 감사, 감격, 깜짝 놀라구요.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래서 그날부터 베드로는 새사람이 되어 살았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를 않아요. 그 사람, 예수님 몇 번 만나고 나서 '부활한 건 확실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것 같은데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갑니다. 이거 웬일입니까? 우린 그 점에 깊이 생각을 둬야 됩니다. 예수님 부활, 그 객관적 사실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거예요. 믿은들 그것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거예요. 여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절과 오순절은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객관적 사건, 객관적 진리로 남고, 자 이제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이라고 하면 이거는 덧없는 신비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올시다. 이런 사건과 그에 대한 신앙, 이것이 서로 연합해서 귀중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 받으므로 비로소 새사람이 됩니다. 그전에 그가 물고기 잡으러 갔을 때에 예수님 친히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합니다. 다정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꾸짖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용납해주시는 주님 앞에 감격했습니다만은 그 감격만 가지고는 별 도리가 없었어요. 문제는 성령 충만하게 될 때 그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고 부활신앙의 사람이 될 때 부활의 증인으로 새로운 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초대교회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생각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고향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일로 돌아가 보세요. 자,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를 한 번 보세요. 예수님 대제사장과 빌라도, 가야바, 뭐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 교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럴 때에 저들의 지식, 저들의 경건, 저들의 신앙적 상식으로는 이 예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거예요. 그래서 재판을 하고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고, 빌라도도 나름대로 '저는 죽어 마땅하다' 생각해서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예수는 죽었어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걸 부활시켰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를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의인으로 살렸어요. 우리는 그를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해서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다'하고 높여 의인으로 영화롭게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순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다 같이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의인을 죽였으니까요. 이제 제자들이 "예수 부활",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하는 순간에 그 속에 많은 뜻이 있어요. '예수는 죽어야 할 자가 아닙니다. 죽여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그를 죽인 사람들은 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는 메시지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완악한 무리들 앞에 "예수 부활!" 이렇게 말해놓고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줄줄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던 것이올시다. 그러니까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는 한마디로 말하면 죽을 각오를 해야되는 거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각오를 하고야 그 한마디를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예나 오늘이나 증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해요. 비상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요.
공교롭게도 이 증거라고 하는 말을 '증인' '증거'라고 하는 말을 헬라어로는 '마르투리아'라고 말합니다. '마르투리아'라고 하면 되요. 그런데 순교자를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 Martyr라고 합니다. 증거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로 발음하게 될 때 순교자가 됩니다. 그건 무슨 말인고 하니 증인이 순교자요 순교자가 증인이요. 부활의 증인은 순교자요. 자 보세요.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누가 죽이겠다 그러면 도망가면 되겠어요? 예수가 부활했고 예수를 믿는 나도 부활한다, 하는 것을 믿는다면 당당하게 죽어야지. 특별히 예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죠. 그래서 순교자만이 부활의 증인이란 말이요. 그 부활의 증인은 죽음을 넘어서는 거죠. 사망권세를 넘어서는 것이죠.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다" 그랬어요. 예수 부활에 대해서 부활 사건에 대하여 내가 증인이다. 아, 얼마나 놀라웁니까? 얼마나 큰 용기입니까? 얼마나 확실한 믿음입니까?
월리암 제임스라고 하는 교수님께서 "종교체험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그 책 속에서 성숙한 종교적 인격, 그걸 가르쳐서 '성자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Saintliness 성자성을 가졌다. 이걸 네 가지로 표현하는데요, '성자' 그 만이 아니고 '성도' 다같이 성숙한 성도라면 같은 이러한 철학적 이러한 삶의 자세로 살기 마련이에요. 첫째가 세상 일상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큰 삶을 비전으로 삼고 산다. 일상적인 이해관계, 조금 더 벌면 어떻고 못 벌면 어때. 잃으면 어떻고 얻으면 어때. 오래 살면 어떻고 적게 살면 어때. 그게 중요하질 않아요. 보다 넓고 크고 위대한 세상을 저 앞에 있는 비전을 바라보며 사는 거죠. 이것이 바로 성자성이요.
또 한가지는 절대자인 하나님과 자신의 생명사이에 친애의 연속성을 가지고 살아야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요.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어요.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어요. 내가 그 섭리 안에, 내가 있어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내가 고용되고 있어요. 그러한 가치관, 그러한 정체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죠.
또 하나는 이기적 폐쇄성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초월적 마음의 기상을 지니고 산다. 참 좋은 말씀이에요. 이기적인 폐쇄성. 여기에 노예가 될 때 사람은 비참합니다마는 이건 자유롭습니다. 나 중심한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삽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요.
넷째는 감정의 중심이 조화 있는 사람과 애정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율법적이고 도덕적 인격과는 달리 초월적 차원에서 산다는 것이죠.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이 율법이요 또 무서운 것이 죽음입니다. 율법과 그리고 사망권세를 다 이기고 초연하게 자유인으로 누구도 그를 심판할 수 없어요. 누구도 그를 비판할 수 없어요. 누구도 말리지 못해요. 그러한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속에 크게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돼 있고 부활사건 속에 우리는 의롭다하시는 증거가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부활의 약속을 믿고 십자가의 사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 내가 지는 십자가 속에도 더 많은 신비로운 의미가 있음을 순간순간 해석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 부활을 바라보았기에 십자가를 쉽게 편하게 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조금 있으면 나를 못보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가는 그 길에 십자가라고 하는 사건은 아무 별것이 아니었어요. 이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리는 신앙의 세가지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는 성서적 지식입니다. 성경적 지식이 없이는 신비주의에 빠진다. 또 하나는 경험입니다. 신앙적 체험이 없으면 신념과 관념주의에 빠져든다. 그리고 셋째는 봉사입니다. 봉사가 없으면 그 믿음은 자라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부활사건 앞에서 부활신앙을 가지고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갑니다. 부활신앙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용기 있게, 거침없이,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큰 표적이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벌떡 일으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깜짝 놀랄 때에 "놀랄 것 없네. 당신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하셔서 나와 함께 계셔서 여기서 이 표적을 주셨느니라"라고 겸손하게 증거합니다. 오직 부활의 능력, 오직 부활 증인, 부활신앙으로 살 때 비록 모순된 세상을 살면서도 밝은 세상을 바라보고, 절망으로 치닫는 속에서도 역사 저 건너편에 있는 밝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장 활기 있고 용기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증인의 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에게 부활을 통하야 확실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건만 우리는 때때로 믿음이 흔들려서 이 세상에 치우치고 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임을 용서하시고, 베드로가 흔들릴 때에 함께 하신 것처럼 사도 바울이 약해질 때에 힘을 도와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다시 확증해 주시사 이 거친 세상에서 자유인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사망권세를 넘어서 주의 약속을 바라보며 늘 승리 생활하는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chojien

,

[부활절예배설교] 부활은 우리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집필자 서문강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블로그 이미지

choj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