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력에 따른 대림절(대강절)이해하기

 

 

 

성탄절로 이어지는 교회력 절기
'대림절(대강절)'
성탄절 이전 4주간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

이미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억하는 시간
으로 보낸다면, 일회성 성탄 행사로만 끝내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을 신앙적으로
 교육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는 대림절(대강절) 기간
에 매주 초를 밝히며 시각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장식을 하였습니다.
첫 주에는 큰 초 하나에 불을 밝히고, 
둘째 주는 두개 셋째 주는 세개의 초를 켜는
방법인데, 주일학교에서도 매주 촛불을 밝히며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습니다.

 


매해 같은 행사와 설교로 너무 익숙해진
'성탄절'이 왕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시간,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대강절(待降節) ·대림절(待臨節)이라고도 한다. 이 절기는 서방교회에서는 4세기부터 지켜왔다. 부활절 이전에 준비기간으로서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이 성탄절 이전 네 주간 동안 지켜지는 절기이다. 성탄절 이전 네번째 주일이 첫 강림절이고 이날 강림절 화환에 준비된 네 개의 촛대 가운데 한 곳에 불이 붙여진다. 두번째 주일에 다시 촛불이 하나 더 켜진다. 이렇게 해서 네번째 주일은 모든 촛불에 불이 켜진다. 설교자는 그 주일에 해당하는 성서구절로 설교한다.

 

터툴리아누스의 글을 보면, 그 당시에 강림(Adventus)이라는 말은 이미 신이 예배 장소에 임재(臨在)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이 강림절은 갈리아 지방에서는 4세기에 에피파네스 절기(1월 6일) 앞에 금식하며 지켜졌다. 그리스 교회에서는 오늘까지 크리스마스 이전에 금식일로 지킨다. 그러다가 6세기경 처음으로 성탄절 이전의 절기로서 등장하였다. 8세기의 아말라리우스의 메츠의 글을 보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날’로 지켰음이 드러난다. 이 강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키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심판을 수행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오는 것을 기다리며 훈련하는 절기로서 그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출처 : 백과사전

대림시기란?
 대림으로 교회는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새로운 전례주년을 시작한다. 이 전례주년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행위를 통해 드러난 신비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는 멀리 떨어진 과거에 묻힌 사건들이 아니다. 주님께서 성취하신 사건의 은총과 가치는 아직 남아있다. 전례주년의 축제들을 거행하면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과정 안에 놓이게 된다.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 안에는 일몰과 쇠퇴가 존재할 수 없다. 교회의 전례주년 안에서 특히 주님 몸과 피의 성사 (성체성사)에서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대략 네 주간으로 되어있다. 대림은 예수 성탄으로 향해 있고, 영적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때이다. 대림 4주 동안 구세주의 오심을 전달했던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며 구약의 의인들의 기대와 희망을 발견하고 주님의 오심에 참여했던 인물들인 세례자 요한과 요셉 그리고 마리아의 신앙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 생명의 선물인 은총으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실 육신을 취해 당신 자신을 낮추심으로 베들레헴에 오신 주님은 날마다 우리와 대화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시기를 지금도 멈추지 않으신다. 당신의 잔칫상에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헛되게 지나가게 하지 않도록 대림 시기는 우리를 더욱 깨어 기다리게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림절은 기도 안에서 기다리는 때이다. 깨어 기다리는 사람은 예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주님은 심판자이시다. 마지막 때, 우리에게는 죽음으로 시간이 끝날 때, 역사가 모두 끝날 때, 교회의 순례가 끝나 교회의 희망이 상급을 받을 때 주님은 심판자로 오실 것이다. 이처럼 대림절 동안 우리 실존의 불안함을, 그리고 본향을 향한 여정 중에 있는 순례자로서의 우리 존재를, 그리고 헛된 사물에 얽매이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필요성을 더욱 날카롭게 자각하게 된다. 전례는 우리의 졸음을 흔들어 깨운다. 다시 말해서, 전례는 용기를 북돋아주고 또한 신뢰를 지지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등불을 켜고 마음 안에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렬한 의향을 가진 준비된 사람이 되게끔 한다.
 대림시기는 11월 27에서 12월 3일 사이에 오는 주일 제1저녁기도로 시작되고, 성탄 대축일의 제1저녁기도 전에 끝난다.
항상 대림시기의 주일들은 주님의 축일과 모든 대축일에 우선한다. 만일 대축일이 주일과 겹치는 경우에는 토요일에 미리 경축한다.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의 평일은 주님의 성탄을 직접적으로 준비하는데 목적을 둔다.
따라서 대림시기 첫째 부분인 대림 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미사에서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는 대림 감사송 1을 선택하고, 대림시기 둘째 부분인 12월 17일부터 12월 24일까지는 다가온 주님 성탄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대림 감사송 2를 선택한다.
대림시기의 주일과 평일 미사에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다.  (인 끌레멘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홈에서)
1. 대림 제 1주일:
'주님이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재림하신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재림은 언제 올지 모르기에 늘 깨어있으라는 경고와 경각심이 성서말씀의 중심입니다. 가해(마태 24,37-44), 나해(마르 13,33-37), 다해 (루가 21,25-28). 즉 오시는 주님과 기다리는 우리들의 자세가 묵상 주제가 되겠습니다.
2. 대림 제 2주일:
'약속과 경고와 기쁜 기다림'이 주제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회개를 강조하시고, 구세주가 오신다는 경고합니다. 가해 (마태 3,1-12), 나해(마르 1,1-8), 다해(루가 3,1-6). 본기도의 내용은 우리에게 중요한 묵상 주제를 줍니다.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려는 저희를 천상 지혜로 비추어 주시어, 성자를 닮게 하소서".
3. 대림 제 3주일:
'메시아의 현존에서 오는 기쁨' 주일이라 하겠습니다. '다'해의 제2독서(필립 4,4) 말씀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가해 (마르 11,2-11a), 나해(요한 1,6-8.19-28b), 다해(루가 3,10-18). 일반적인 세상에서 느끼는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러 오시는 메시아를 믿고 기다리는 기쁨의 차이가 무엇인지 묵상하는 좋은 시기입니다.
4. 대림 제 4주일:
'주님의 강생 신비와 마리아의 역할'를 들려주는 주일입니다. '가해의 복음'(마태 1,18-24)에서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나해(루가 1.26-38)는 주님 강생의 신비를 , 다해(루가 1.39-48)는 나해의 복음에 이어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복되신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찬가와 성모 마리아의 찬가가 나옵니다. . 구원사업의 협조자이며, 신앙인의 모델인 마리아가 어떻게 주님의 강생과 구원의 신비에 협조했는 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안문기 저, 계절과 축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1-20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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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 대강절 )그 날을 바라보며


 

 


말씀:이사야 35:1-10

제목:그날을 바라보며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켓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으로 1969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라고 하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들은 고도가 나타나면 그들을 구원하여 무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떠들어대기도 하고, 혹은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는 등의 별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희낙낙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하면서 그저 무한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아주 허무하게 종결을 짓고 있습니다.

무슨 결론도 없고 마치 쓰다가 만 책처럼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참된 인생의 목표나 기다림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길인 것처럼, 그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영원한 고향을 망각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면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인생의 의미요, 인생의 가치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도 될 수 없고, 참된 만족과 가치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고, 기다려야할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허무와 좌절과 고독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은혜를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정녕 우리가 기다려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정녕 우리 인류가 소망을 걸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며 소망이며 기다려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1.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두 개의 세상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설령 산다고 해도 온갖 고초속에 살아가야 할 그런 험하고 거친 세상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와 저는 자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나운 세상이요, 소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정 반대의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세상입니다. 광야와 사막 위에 샘물이 솟아나서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나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들이 만발한 샤론평원처럼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저는 자는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의 눈이 열려서 누구하나 소외당하거나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이 함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다만 우리의 상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갓 이상향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된 세상이며,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누리고 있든 누리고 있지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이 두 개의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두 개의 세상중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험하고 절망적이고 영원한 고통의 삶을 살아 갈것이냐 아니면 낙원과 같은 세상속에서 영원한 영광과 은혜의 삶을 누릴 것이냐 우리는 이 두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광야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낙원의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행복과 은혜의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광야의 삶에서 해방되어, 이 절망과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은혜의 삶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먼저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실 그때에만 진정한 은혜와 행복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세상속에서 좌절과 두려움과 참된 평강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고 고통스럽고 근심걱정하게 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열리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저는 자는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모든 것이 물러가고 우리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인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생명과 평강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잊지 말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대강절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제 성찬식과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먼저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은혜를 주시려고 기쁨을 주시려고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은혜의 길이 열리고,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주님을 영접해야 할 인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한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영접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다리를 만들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그 다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풍성한 진수성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다. 8절 말씀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 대로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나라에서, 그 낙원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누가 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깨끗지 못한자는 지나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만이 그 길을 통과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서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하게 되어 질때에 우리는 그 거룩한 길을 건너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동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을 진실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 거룩한 길이,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지로 말미암아, 어둠으로 말미암아, 완고함과 강퍅함과 고집스러움과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르는채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를 맛보며 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수 있으며, 이 어찌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속에 가정속에 교회속에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기쁨과 은혜와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아직은 영광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힘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우리를 괴롭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안식만이 영원한 영광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 같은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건지시어 참된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맛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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