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예배 설교   

 

   

          
 

Passion Week Worship preaching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 중 열심있는 수제자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실 때도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통해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롬 5:6) -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과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승리의 주님,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②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넘어집니다(롬 8:24,25) -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받지만 기쁭으로 인내하여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도안 겪게 될 수많은 고난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고후 12:9,10)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이 사실을 더 절 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함으로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시 회개하고 일어나 사도직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을 향해 가다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넘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승리의 주님이 연약한 당신을 이끌어 승리하는 삶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실패자 가룟 유다(마 27:3-8)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① 육신이 비참하게 주었습니다(5절) -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한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은 삼십은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를 사는데 쓰여졌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세상적인 욕심의 결국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② 명예가 죽었습니다(6-8절)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된 이름은 그의 명예를 죽일 뿐입니다. 기룟 유다의 이름은 그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영원히 저주의 대명사로 불려질 것입니다.

  ③ 영혼이 죽었습니다(약 1:15) -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는 진정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그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다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에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잠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가다 돌이키지도 못할 인생의 영원한 실패자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잘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갑시다. 혹 세상적인 유혹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노선에서 잠시 빗나갔을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시다. 승리의 삶을 주시는 주님께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사 53:4-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고난 주간을 맞이해 이땅에 오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① 고난 받은 예수님(4절) -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② 버림 받은 예수님(5절) -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오히려 욕하며 배척했습니다. 똫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처절한 배반을 경험하셨습니다.

  ③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6절) - 죽음은 범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아무 흠도, 죄도 없는 깨끗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의 사역을 믿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전화 위복(행 9:4; 고후 12:7; 빌 1:13)  

 

  예수님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신 후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했던 바울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소경됨을 인해 영적 눈을 떳습니다(행 9:4) -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잠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울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육체의 한 지체를 잃음으로 그는 영혼을 얻었습니다.

  ② 육체의 가시로 겸손을 배웠습니다(고후 12:7) -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③ 감옥에 갇힘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빌 1:13) -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복음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는 또다른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혼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감추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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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최대 작전!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

 

 

 

 

◈ 당신은 거룩한 습관을 가지도록 자신의 몸을 훈련합니까?

운동은 몸을 강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영적인 습관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성경을 읽습니까?

매일 성경만 읽어도 영적으로 병들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기도합니까?

아침마다 기도할 때 얻는 영적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 마귀의 최대 작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나쁜 습관에 계속 빠져있게 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마귀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는 조카의 보고를 받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네 환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성인이 되어 회심한 사람 중에는 잠시 원수의 진영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지내는 사람이 수백 명도 넘으니까.

네가 할 일은 그로 하여금 원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아직 몸에 배어 있는 나쁜 습관들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는 아직도 우리 편이다.

이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

 

육체를 훈련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좋은 습관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 습관은 많은 행동의 반복과 훈련의 결과로 옵니다.

습관은 옳다고 믿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전거 타기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넘어져도 계속 타다보면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가 진리의 길을 택하고

주의 법을 내 앞에 두었습니다(시 119:30).

 

습관은 성경에 기초하여 옳은 것을 택하고

그것을 내 앞에 두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자기 자신을 연단하는(딤전 4:7) 것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 4:6)

 

우리를 좋은 습관으로 훈련시키는 방법은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입니다.

 

◈ 자유를 얻으려면 거룩한 습관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습관으로

우리 육체가 하나님 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헨리 트루먼 대통령은

“독수리처럼 날개 쳐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칠면조와 같이 다녀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육체 안에서 주님을 모시고 살려면

우리의 육체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아침마다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교훈으로 양육을 받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달라질수 있을까요?

 

거룩한 영적 습관으로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죄악성을 극복하고 우리 육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이윤재

 

† 말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디모데전서 4장 7,8절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 잠언 13장18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고린도전서 3장16,17절

 

† 기도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날마다 그 십자가에 저를 못 박고

오직 주 예수님이 주신 은혜와 능력으로 살길 원합니다.

나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행하는 하루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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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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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 기독교 영성 재조명하기 
 

 


은사주의, 신비주의, 방언기도에 대해 내가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다. 성경에 이미 언급된 방언의 존재 자체를 마치 부정하는 신학자나 목회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물론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랄랄라...식으로 도리어 옆에 기도하는 사람을 어지럽게 만드는 영적 훼방이나 끼치는 기도지만 다른 나라의 말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말하는 기도마저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신사도운동이라고 해서 열리는 예언집회와 치유집회와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십자가 복음이 없다면 거의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안 되는 무당푸닥거리와 비슷한 일이라고 보면 된다. 장삿속이 가득한 삯꾼들이 은사를 주장하여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고,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의 체험을 더 믿고, 하나님의 내게 말하였다거나 지금 성령이 당신에게 그러한 말을 하고 계신다고 약을 팔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싶지 않다.  은사를 강조하고, 체험을 강조하고, 강하게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단 호기심을 갖고 열린 태도를 취한다. 물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부인을 한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뭐든 잘 된다는 말만 하는 자들을 보면 경계하지만 그러한 목회자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알아가고 배워가고 있다고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옆에서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하는 자들을 시대의 필요에 의해 나타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신대 출신 목사님과 철학대학원 시절에 바르트 책으로 스터디를 하며 친하게 지냈다. 대부분 운동권 출신으로 감방에 갔다왔다가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목회의 길을 가는 목사님과 신학박사인 교수가 멤버였다. 역사적으로 군부독재시절 조찬기도회를 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을 향한 그들의 분노와 정권의 꼭두각시가 되어 아무런 말도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실망하여 불의에 저항하고, 복음이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한 부류다. 토요일 결혼식 주례를 서고 나오는 목회자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젊은이들이 맞아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된 사람들. 김재준이나 안병무나 이러한 분들을 통해 우리나라 기독교는 잃어버린 사회참여에 대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곧 자유시장주의를 마치 최고의 사회체제로 규정하고 그 속에서 기복주의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공만 추구하고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자들을 지지할 수 없다는 민중신학의 행동을 이해하지만 동반자로 같이 따라 갈 수는 없다. 예수님이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였다. 사회구조를 바꾸기 전에 우리는 솔선수범하여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 보냄받은 자리에서 한 알 밀알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십자가의 길로 순교자의 각오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배신당할 줄 알아도 그러한 길로 가는 것일 뿐이다. 심각한 독재사회에서는 본회퍼처럼 살면 된다. 그의 신학보다는 그의 실천적 기독교 윤리가 필요하고 그것이 실종되면 말뿐인 기독교가 된다. 

 

그리고 지나친 율법주의,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언제든지 교리로 무장해서 자신들의 틀에 신앙을 가두고 교리를 사수하여 교회를 지킨다고 교리논쟁으로 이단심사와 마녀사냥을 하고 다니는 그러한 꼴볼견을 보고 싶지 않다. 이들의 신앙은 머리만 큰 관념적인 신앙이 되어 비판은 격력하게 하지만 아무런 실천과 대안은 없고, 기도 후 행함은 아무리 기다려도 없고, 상대방만 무시하는 비난과 방관만 하는 관찰자일 뿐이다. 교회에서 자신들만 제대로 된 신학적 지식을 독점하여 뭔가 다르다는 구별의식을 가진 목회자들은 사두개인이고, 그러한 신학적 지식에 능통한 일반 장로들은 바리새인이고, 그러한 목회자들을 양성한 신학교수들은 율법학자라고 보면 된다. 모든 것을 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행하던 일을 그대로 행하는 자들의 상당수가 교회 내에서 그러하다고 보면 된다. 이들이 교단신학을 사수하고, 전통을 지키고,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며 칼빈 선생의 말을 예수님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더이상 개혁에 대한 의지를 거부하고 보수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율법주의적인 입장에 반대하셨다.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지금의 교회는 엄청난 진입장벽을 가진 가진 자들의 사교모임일 뿐이다. 예수님이 만나신 창녀와 세리와 문둥병자와 장애자와 귀신들린 자가 교회에 오면 그들은 기겁하고 쫓아낼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먼저 그들과 같이 하셨고, 먹고 마시고, 그들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줄곧 이야기 하셨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기독교인의 영성은 율법주의, 기복주의, 성공주의로 물든 부자들의 기독교에 반대한 십자가 신학을 부르짖은 루터나 키에르케고르의 신학, 로이드 존스나 부흥과 개혁사의 책이 필요하다.  지나친 정치참여로 복음의 본질적 사명인 영혼 구원을 잊어버리고 사회구조를 바꾸려고 한 민중신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가 찾는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고, 우리 심령에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고자 하는 순전한 복음주의로 먼저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실천력이 없고 윤리가 없으면 머리만 큰 영지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와 신비와 방언 등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여 오늘날 사도행전을 다시 써야 한다고 하며 예언집회와 금이빨 집회 등 성령의 능력을 기적과 체험 위주로 국한 시키는 신사도 운동같은 입장에 대해서도 분명히 경계를 해야 한다. 내 주변에도 스웨덴보리의 책을 읽는 목사님이 있다. 잠시 손기철 장로의 책과 동영상을 읽고 보다가 버렸다.

 

그리고 쓰레기류도 많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같은 책은 진짜 기복주의, 성공주의가 기독교 흉내를 내는 유사종교다. 하이퍼 칼뱅주의자들의 책도 문제다. 그러한 책을 대장간에서 자주 보는데 물론 거시적 한국교회의 설교 비판은 적절하지만 실제로 그 저자가 목회하는 교회 내에서 같이 생활해보니 여전히 그러한 복음의 진리를 알고 지적장난 속에서 남을 비판하는 일에 온통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또다른 영지주의자들이 되어 자신들은 영적 진리인 그노시스를 알고 있는 구별된 자로서 사람을 판단하지 아직도 부족한 형제를 돌볼 줄도 모르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을 이루었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하면 그 소리에 위로받고자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 교회로 와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상한 흐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을 말하는 목회자들이 뒤로 돈의 유혹에 넘어가서 전국을 돌면서 모임을 이끌어 받은 교회에 내라고 부탁한 헌금을 사례비로 챙기고 교회에 일절 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수입으로 여기는 것을 것을 보았다.

 

자연적교회성장을 운동한 NCD나 거기서 나온 두 날개 교회를 경험하였는데 나는 반대한다. 그들이 얼마나 영업적인 마인드인지 교회 컨설팅을 잘 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주고, 전도부흥하는 교회로 세워주겠다고 다양한 교육을 하지만 결국 말씀이 일하지 않게 되었고, 프로그램으로 일하게 되었고, 돈을 많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전형적인 다양한 심리검사와 기질에 따른 사역자 세우기 등은 심리학적이고, 경영자적인 마인드까지 받아서 음향과 조명으로 감동을 연출하고, 음악과 각종 연주로 감정을 만들고, 마케팅으로 홍보를 하고, 상담심리학으로 그들을 마음을 해부하고 진단하는 다양한 성공노하우를 갖고 '목적이 이끄는 교회' 같이 상당히 부흥한 예를 들고 나오지만 결국 말씀을 약화시키고 나니 남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였고, 부흥이었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이었다.  또 뭐든 귀신을 갖다 붙이고, 사단의 역사라고 하면서 이 지역에 귀신이 많아서 선포해야 한다고 말하고, 병에 걸려도 귀신이고, 보이지 않는 귀신이 자기 눈에 보인다고 말하며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고 다니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신학실종은 위험하다. 이미 천국을 갔다와서 보고나서 말하는 자들의 책은 내가 볼 때 쓰레기다.


과유불급이다. 뭐든 지나치면 항상 이단화되거나 비정상적인 흐름 속에서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한할 수 없이 큰 분이다. 그의 생각은 크고, 그의 방법은 많다.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 앞에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금만 미혹된다면 우리는 극단적인 주장에 빠져서 율법주의자들이 되거나, 그들을 비판하는 개혁주의 맹신자가 되거나, 혹은 신사도운동같은 은사주의,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귀신론에 빠지거나, 사회적 불의를 보고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에 빠지거나 하게 된다. 그들은 극단을 갔기에 잘못된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항상 지금 살아 계시고,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통해 진리로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지금 내게 주어진 길을 그분과 동행하면 된다. 어떤 주의도 -ism도 반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진리 안에서, 기도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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