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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부합한 사람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1. 무엇이 참되고 실천적인 거룩인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거룩하다고 할까요?

 

1)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품는 습성이 거룩이다.

하나님의 판단과 합치하는-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 습관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판단하는 성향이다 하나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부합한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2) 거룩한 사람은 죄로 드러난 모든 것을 피하고, 알려진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분명히 돌아선 사람이고, 온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며, 세상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한 바울과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다(롬7:22).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고 말한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시119:128).

 

3) 거룩한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고자 분투한다.

날마다 그분을 믿어 평강과 능력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형상을 본받고”자 애쓰는 사람이다(롬8:29).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워 스스로 낮아지신 것처럼, 마음을 낮은 곳에 두고 겸손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가 항상 진리의 신실한 증인으로 사셨던 것을 기억한다.

 

성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음료와 양식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말도 안되는 거짓 고소 앞에서도 그분은 온유하고 오래 참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리스도가 죄인을 향한 긍휼과 사랑이 충만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죄를 거부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세속적인 사람과 구별되셨음을 기억한다.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로막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거룩한 사람은 이런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고 한 사도 요한의 말과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는 사도 베드로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긴다. 우리의 구원과 본이 되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은 사람은 복이 있다! 사람이 만약 “그리스도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하고 더 자주 물으면, 더 많은 세월을 아끼고, 더 많은 죄를 막게 될 것이다.

 

4) 거룩한 사람은 온유함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인내와 친절한 성품을 추구하고 혀를 다스리려고 애쓴다.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을 때 다윗이 보여주었던 태도가 좋은 예이다. 아론과 미리암의 비난 앞에 섰던 모세 역시 좋은 모범이다.

 

5) 거룩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한다.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애착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색욕을 억제하고, 정욕을 제한하기를 힘써서 언제든 그것들이 제멋대로 나대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얼마나 적절한가?(눅21:34)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또 어떤가!(고전9:27)

 

6) 거룩한 사람은 사랑과 형제 우애에 애쓴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말했으면 하는 대로 말하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황금률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형제 사랑에 힘쓴다. 곧 형제의 몸과 성품과 감정과 영혼과 그의 모든 소유를 소중히 여긴다. 사도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한다(롬13:8). 거룩한 사람은 모든 외적인 행실과 품위로 자기 신앙을 더 빛나게 하고, 주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변해 간다.

 

7) 거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비와 박애의 정신으로 대하려고 애쓴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빈둥거리거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고, 선을 베풀려고 한다. 할 수 있는 한 자기 세대에 유익한 사람이 되고, 주변의 영적 궁핍함과 비참함을 덜어 주려고 애쓴다. 이런 사람을 도르가처럼 행한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

 

8) 거룩한 사람은 순전한 마음을 추구한다. 자신의 마음은 조그만 불똥이 튀어도 금방 타오르는 부싯깃과 같음을 잘 알기 때문에, 유혹의 불꽃이 마음에 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9)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그것은 노예근성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아버지 목전에 있는 것처럼 행하는 아들로서의 두려움을 말한다. 이에 대한 좋은 모범으로는 느혜미야가 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5:15).

 

10) 거룩한 사람은 겸손하다. 마음을 낮은 데 두고 항상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긴다. 다른 사람의 마음보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더 많은 악을 발견한다. 인자함으로 유명했던 그림쇼가 만년에 죽음의 침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무익한 종은 이제 떠납니다”라는 것이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했던 바울의 마음에 공감한다.

 

11) 거룩한 사람은 삶의 모든 의무와 관계에 있어서 신실함을 추구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골3:23).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는 바울의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 거룩한 사람은 모든 일을 잘해야 한다. 그들은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 좋은 부모와 좋은 자녀, 좋은 상사와 좋은 부하, 선한 이웃, 좋은 친구, 착한 국민, 그리고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하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룩이라면, 이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다.

 

12) 거룩한 사람은 영적 사고방식을 갖기 위해 힘쓴다. 위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이 땅의 것은 느슨하게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과 생각의 우선순위를 장차 오는 삶에 둔다. 하늘에 보화를 둔 사람처럼 살려고 하고, 본향을 향해 길을 나선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이 세상을 살아간다. 기도와 성경과 하늘 백성의 모임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힘쓴다. 무슨 일이든, 어디에서든, 누구와 있든,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것일수록 더욱더 소중히 여긴다.

 

이상이 거룩의 특징들이다. “거룩하다” 일컫는 사람이 추구하는 성품이다. 그러나 이 거룩에 대한 설명 때문에 낙담하는 여린 양심이 없기를 바란다. 어떤 신자 앞에도 걸림돌을 놓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산다 해도, 남아 있는 죄의 가능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 가장 비참하게 여기는 것은, 항상 “사망의 몸”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다(롬7:24). 선한 일을 할 때도 그에게 “악이 함께 있”다(롬7:21). 옛 사람이 사사건건 그를 방해한다. 하지만 그는 남아 있는 죄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이 거룩한 사람이 갖는 탁월함이다. 오히려 이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고, 벗어 버리려고 한다. 거룩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성화의 사역은 예루살렘 성벽과 같다. “곤란한 동안에”도 성은 계속해서 중건되었듯이 말이다(단9:25).

 

저는 거룩이 무르익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화는 점진적인 사역이다. 가장 밝게 빛나는 태양일지라도 표면에는 흑점이 있다. 가장 거룩한 사람도 성령의 저울에 달아 보면 많은 흠과 결점이 드러난다. 그들의 삶은 죄와 세상과 마귀와의 끊임없는 전쟁이다. 때로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정복당할 때도 있다. 육체는 항상 성령을 대적하고, 성령은 육체를 대적한다(갈5:17). 우리는 모두 실수가 많다(약3:2).

 

그러나 부족하게나마 거룩의 특징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중심으로 바라는 바요, 간절한 기도 제목이다. 비록 다다르지 못한다 해도, 그들은 계속 전진한다. 얻지 못한다 해도, 그들은 항상 추구한다.

 

저는 참된 거룩이야말로 위대한 실재라고 담대하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거룩은 빛이다. 만약 거룩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낼 것이다. 거룩은 소금이다. 만약 거룩이 있다면, 그 맛이 느껴질 것이다. 거룩은 값비싼 향유이다. 만약 거룩이 있다면, 그 향기를 피해 숨을 수 없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뒤로 미끄러지고, 죽은 자와 같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불순물이 섞였다고 해서 금이 아닐 수는 없다. 희미하고 어둡다 해도 빛은 빛이다. 아직 어리고 연약한 은혜라고 해서 그것이 은혜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의로 자신을 죄에 방임하면서 겸비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을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웬은 말한다. “죄를 가장 무거운 짐, 슬픔,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참된 신자일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2. 실천적 거룩이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이유

 

거룩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탁월한 성도라 해도 전혀 “무익한 종”일 뿐이다. 우리가 가장 순전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빛 아래 놓이면 누더기와 같이 드러날 뿐이다. 예수께서 입혀 주신 세마포와 믿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의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다. 우리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간다.

 

우리가 거룩하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 어떤 아담의 후손도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1)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분명히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알렉산더 레이턴은 “이점에서 복음과 율법이 일치한다”고 했다.

 

2)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위대한 한 가지 이유와 목적이 거룩이기 때문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그는 에베소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는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택함받은 자가 된다(벧전1:2).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심을 받았다(롬8:29). 신자가 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이다.(엡1:4). 신자의 부르심 또한 “거룩한 부르심”이다(딤후1:9).

 

신자가 고난을 받는 이유도 “거룩하게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히12:10). 예수님은 완전한 구주이시다. 그분은 단순히 신자의 죄책만을 제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의 권세를 피하는 일도 하셨다.

 

3)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을 가졌다는 유일하게 바른 증거가 거룩이기 때문이다. 성공회 종교강령 제12조는 말한다. “선행이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맹렬함을 견디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일이고, 참되고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열매로 나무를 알듯이, 선행을 통해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이 분명히 증거된다.” 야고보 사도는 죽은 믿음- 입술의 고백만 있고, 성품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을 경고한다(약2:17).

 

참된 믿음은 항상 그 열매를 통해 드러난다. 참된 믿음은 거룩하게 한다. 사랑으로 역사하고, 세상을 이긴다. 마음을 청결하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유일하고도 안전한 증거는 거룩한 삶이다. 일반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죽을 때도 주님 안에서 숨을 거둔다. “자신의 마음과 삶을 정결하게 할 만한 영광스러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상태는 허망하고, 그의 믿음은 건전하지 못하다”(로버트 트레일).

 

4)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사랑하는 유일한 증거가 거룩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21). 예수님의 머리를 찌른 가시면류관은 우리 죄로 만든 것이다. 우리 주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찌른 것도 죄이다. 그분을 겟세마네와 갈보리 십자가로 데려가 무덤으로 이끌어 내린 것도 우리의 죄이다. 오른손을 잘라 버리고 오른 눈을 빼내어 버리기까지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또 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싸늘하게 식은 무정한 마음임에 틀림없다.

 

5)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된 유일하고 건전한 증거가 거룩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 부모를 닮는다. 하늘 아버지를 닮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 말해 봐야 헛된 것이다. 삶으로 자신이 어느 가문 사람인지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거룩한 삶으로 당신의 혈통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며 당신에게 왕족의 피가 흐른다고 말하지 말라”(윌리엄 거널).

 

6)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에게 해를 주거나 유익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의 설교이다. 신자의 거룩한 삶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로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실재가 거룩한 삶에 있다. 거룩한 삶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무게와 영향력이 있다. 거룩한 삶은 신앙을 아름답게 한다. 심판 날에는 “말로 말미암지 않고” 거룩한 행실로 인해 구원을 얻은 사람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벧전3:1). 칭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사랑은 이해할 수 있다.

 

거룩하지도 못하고 신실하지도 못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그런 사람들은 사탄의 가장 좋은 동역자이다. 이들은 목사가 입술로 쌓아 올린 건물을 삶으로 무너뜨린다.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무 자주 욕을 먹는다. 규모 없고 나태한 생활로 영혼들을 죽이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소서! 거룩해야 할 다른 명분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거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7)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누리는 위로가 거룩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와 슬픔, 거룩과 행복, 성화와 위로 사이가 얼마나 긴밀한지 자주 잊어버린다. 선한 일에 무관심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힘쓰지 않으면서, 자신의 칭의를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부르심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질없는 소리이다.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8)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거룩하지 않으면 천국을 준비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룩해지지 않고 죽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서 편하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죽음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각자가 숨을 거둘 때의 그 성품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다. 지금 여기서 거룩에 대해 외인이라면, 우리가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 지금 여러분은 경망스럽고, 부주의하고, 세상에만 집착하고, 탐욕스럽고, 방탕하고, 쾌락만 추구하고, 불경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천국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리스도를 죽게 한 죄와 짝하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멸시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만나 뵐 수 있을까? 거룩하지 못한 사람에게 천국은 가장 불행한 장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영광의 거룩한 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은혜의 학교에서 받는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해서 천국에 합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천국의 미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가오는 삶을 천국에서 누리지 못할 것이다.

 

적용이다.

 

1) 여러분은 거룩한가? 아니면 거룩하지 않은가?

 

이렇게 강하게 묻는 이유는, 성경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히12:14)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을 살피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한다. 지옥에 있는 저 가련한 영혼도 생각하는 정도는 다 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탁월한 성도나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렇게 까지 거룩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고, 이 땅에서는 우리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저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잘못 알고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면 못할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다. 다윗, 오바댜, 다니엘, 그리고 네로의 집에서 종으로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항상 주변의 세상과는 다른 사람, 곧 거룩한 나라요, 구별된 백성이었다. 당신도 구원받으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주 예수께서는 1,800년전에 이미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4). 구원받는 자가 적을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벧전1:4)을 등질지언정, 사람들은 잠시 동안도 죄의 즐거움과 자신의 길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의 말씀이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40).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에 있어서도 ”고통이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주님을 보기 원한다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하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성품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천국에서 성도로 발견되고자 한다면, 이 땅에서도 성도여야 한다. 하나님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실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교황의 달력은 이미 죽은 자들만을 성인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성도가 될 것을 요구한다”고 윌리엄 젠킨은 말한다.

 

오웬의 말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행위를 힘입어 구원에 이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다. 주님은 친히 이 땅에서 성화한 사람만을 천국으로 데려가신다. 살아 계신 머리께서는 죽은 지체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성경에서 주님이 “너희가 다시 태어냐야 한다”고 하실 때 의아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많은 사람에게 완전한 변화- 새 마음과 새 본성- 가 필요하다. 구원받고 싶다면 말이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이 없이는”, 그가 누구든지 간에,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2) “거룩의 중요성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느끼고 있는가?”

 

이 주제를 대하는 이 시대의 성향이 염려된다. 주님의 백성이 이 주제에 걸맞는 생각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교리를 간과한다.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거룩을 또 다른 우상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리스도를 그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거룩을 앉히고 싶지 않다. 그러나 성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이 시대가 더 많이 생각해야 할 주제라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칭의와 성화를 하나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모두 성화되고, 성화된 모든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여러분에게 성화의 표지가 없다면 여러분의 칭의에 대해 말하지 말라.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를 보여줄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이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 자랑하지 말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서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러더퍼드의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성화를 깎아 내리는 것은 은혜의 방편이 아니다. 믿음과 행함은 피로 맺어진 친구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설교하셨고, 에베소서는 네 장이 아니라 여섯 장으로 된 편지이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더 신령하고, 더 거룩하고, 더 단호하고, 하늘에 더 마음을 두고, 더 온전한 마음이 되기를 소원한다. 신자가 순례자의 마음을 더 많이 가져 단호하게 세상과 구별되고, 더 분명한 천국의 삶을 살아내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날 더 높은 표준의 개인적 거룩이 필요하지 않은가? 인내와 열정은 다 어디 갔는가?

사랑과 믿음의 역사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지난 시대에 도드라졌던 신앙의 능력은 어디 있는가? 그 옛날 세상을 뒤흔들고, 성도들을 세상과 구별하게 했던 분명한 품격은 어디로 갔는가? 확실히 우리가 가진 은은 찌꺼기가 되었다. 우리의 포도주는 물 탄 포도주가 되었다. 우리의 소금은 짠맛을 거의 잃었다. 모두가 반쯤 잠들어 몽롱하다.

 

밤이 다 가고, 여명이 가까워 온다. 잠들지 말고 모두 깨어 있자. 눈을 더 크게 뜨고,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자(히12:1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오웬은 말한다. “그리스도가 죽으셨는데 어찌 죄가 살아 있을 수 있으며, 그분이 이 세상에서 못 박히셨는데, 어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세상은 그에 대해 못 박힌 사람의 영혼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3) 거룩해지기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몇 가지 권면을 드린다.

 

거룩하고 싶은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은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하라. 자기 죄와 연약함을 절감하고 그리스도께 피하기까지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런 진보도 이룰 수 없다. 주님은 모든 거룩의 뿌리이다. 시작이다. 거룩해지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분께 나와 그분과 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지혜와 의로움이 되실 뿐 아니라, 성화도 되신다. 그 누구라도 바울이 놓은 “거룩”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

 

트레일은 말한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지혜는 정죄받을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의로움은 죄책과 정죄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성화는 죄와 더러움이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구속은 속박과 예속일 뿐이다.”

 

지체하지도 말라. 다 준비된 후에 가려고 하지 말라. 가서 그분께 이 아름다운 찬송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대신하라.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우리의 성화 사역에 벽돌 한 장, 돌 하나도 놓이지 않을 것이다.

 

거룩은 믿는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거룩은 백성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을 통해 마음에 행하시는 역사이다. 거룩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분과 이루는 생명의 연합의 결과이다.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에서 맺힌 열매이다. “주님, 나의 죄과로부터 저를 구하실 뿐 아니라,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사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해 주십시오”.

 

앞으로도 계속 거룩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15:4-5). 그리스도를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충만은 성도의 모든 필요를 채우고도 남는다.

 

그분은 위대한 의사이다. 한결같이 온전하기를 바란다면, 날마다 한결같이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그분은 여러분이 매일 먹을 만나이다. 여러분이 매일 마셔야 할 샘물이 나는 반석이다. 광야같은 이 세상을 이기고 다 지나가기 위해 날마다 붙들고 기대야 할 강한 팔이다. 그분께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을 기초로 지어져야 한다.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거룩한 사람,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이었다. 비결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었다(엡1:23). 항상 “예수를 바라” 보았다(히12: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다(빌4:13).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갈2:20).

 

여러분이 바울이 고백한 이런 일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여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우리가 느꼈던 것보다 더 절실하게 거룩의 중요성을 절감하기 바란다! 우리의 남은 해가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거룩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행복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가 흠과 점이 없는 평화 가운데 발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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