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사순절의 묵상과 기도  
 
 

 

 
사 53:3~6, 골 1:24

기독교의 전통적 절기 가운데 하나인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사순절(四旬節, Lent)은 주후 325년 니케아종교회의 때 제정되었는데, 대체로 부활절 이전의 주일(6일)을 제외한 40일을 가리키며, 금년에는 2월22일 ‘재(Ash)의 수요일’부터 4월8일 부활절 직전까지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자신의 죄악을 애통하며 회개한다는 뜻으로 이마에 재를 바르는 것만 보아도 이 절기가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과는 확연히 다른, 근신과 절제, 은둔과 묵상, 금식과 구제를 통한 자기 성찰에 집중하는 기간임을 알게 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요 장로교 창시자인 칼뱅이 한때 이 절기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 이유인즉 사순절에 교인들이 금식과 고행을 통한 자기 공로를 과시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의 핵심진리인 ‘이신득의’(인간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의로워져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위협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3장 1절에서처럼 이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생각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골 1:24) 금식과 절제 가운데 그리고 복음전도 와중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다면, 칼뱅이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우리 자신의 부족한 영성을 크게 고양시킬 수 있는 복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절기를 지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순절에 성도들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할 주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화되는 요소는 ‘생각 한다’는 것이고, 생각에 따라 인간의 모든 성품과 행동이 결정됩니다. 음란한 생각에서 음란한 인간이 나오고, 고귀한 생각에서 고귀한 인간이 탄생됩니다. 아무 죄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스스로 그토록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주전 8세기의 이사야 예언처럼, 예수의 죽음이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죄와 죽음을 대신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감사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19세기의 부흥사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고서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메마른 가슴을 한탄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런 생각과 감동과 결단 없이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들 자신의 자화상이 아닌지요?

예수님의 수난 장면은 마치 붙잡힌 생쥐와 개구리를 시골 아이들이 놀려대며 발로 차고 길바닥에 메어치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강제로 북송된 탈북자의 눈을 가린 채 북한 인민군이 짓밟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만약 북한 감옥에서 살해당한 그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 내 대신 끌려간 우리 형님이나 누님이나 아버지 또는 어머니셨다면 그분의 고난과 죽음 때문에 무사히 대한민국에 이주한 새터민으로서 어찌 한시인들 그 은혜를 잊겠으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기리는 기간 동안 푹신한 침대에 누워 오락을 즐기며 호의호식할 수 있겠습니까?

사순절 40여일만이라도 묵상과 기도, 그리고 금식과 절제와 선행 가운데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도 고백하고, 기독교를 폄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잠재울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승리의 부활절을 우리 모두 함께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샬롬!

장영일 목사(장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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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부활절 예배 설교

 



제목 :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말씀 : 마28:1-6

 


1.놀라운 축복의 사건,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날입니다. 오늘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날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크게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입니다. 육체가 병들어 죽다가 살아난 것보다도, 금덩어리를 산더미처럼 얻게 된 것과도, 세상의 가장 큰 권세를 얻게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요 축복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리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을 열저 젖히고 나오심으로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은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건강이나 권세나 모든 부귀영화는 며칠 후면 다 사라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6:5에서는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고 그 분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자는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모든 죄와 사망과 어둠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는 진실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의 모든 어둡고 추하고 칙칙하고 절망적인 것들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전인적 생명을 부활시키신 사건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덤권세,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 다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혼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생명을 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늘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 계시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무덤입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으스스하고 캄캄하고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만이 있는 곳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덤속에서 당할 그 고통과 절망과 캄캄함과 두려움과 공포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잠시 무덤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언제까지 거기 계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하셔서 잠시 맛보아야 할 과정일 뿐이요, 예수님께서는 그 더럽고 냄새나고 절망적인 무덤의 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가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고, 그 부활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라 죄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죽음과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영과 혼과 육신이 다시 살아 전인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서 승리의 주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이 우리 가운데 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 이상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절망과 더러운 것들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승리의 주님이 그런 것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상황과 어둠의 세력과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등의 마귀사탄의 권세에 억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인도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과 고통과 연약한 것과 절망적인 것들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믿음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온갖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을 친히 보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목격하기 전에는 형편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앞에서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끝났다고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을 때,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셨을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나 절망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혹은 십자가위에서, 혹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혹은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심을 명백히 보여 준 사건입니다.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20:28절에서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고백했지 않았습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인도에 가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믿음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 잘난 지성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를 접어두고 천지의 창조주로써 생명의 주관자로서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져본 사건입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만져 본 것을 기록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오직 그들 자신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는 완전한 부활의 능력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분명한 부활 신앙을 살아가실때에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기쁨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사랑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이간질로 시작된 인간사이의 갈등과 미움과 고통을 깨트리시고 사랑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화와 미움과 저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마귀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사탄은 먼저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합니다. 그리고 더 부추겨서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먹게 함으로써 결국 아담을 공범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담은 사랑하는 아내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갈등과 미움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과 미움은 집안 전체에 누룩처럼 퍼집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와 질투로 죽이게 됩니다. 가족관계가 깨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왜곡된 관계는 더 나아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불신과 미움과 갈등을 유발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 그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투쟁과 갈등과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시기와 미움과 갈등이 편만해 있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몹쓸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에게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온갖 희롱을 다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상)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국 사랑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움과 증오와 멸시천대까지도 가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떨쳐 버리고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을 부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점도 깊이 묵상하여 모든 미움과 저주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주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에게 혹시 미움이나 시기나 저주나 질투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남아 있다면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생명과 사랑과 은혜를 부활시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의 심령속에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부활의 기쁨이 더욱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소망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한마디로 하늘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고, 죽었던 자를 살려 주심으로써 천국의 모형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늘나라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맛보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실 새로운 세계에서나 완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는 인생이 받게 될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만으로는 천국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물리쳤으면 이제는 새생명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그 깨끗하게 씻어진 공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생명으로 거듭나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하고 낙향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님을 알고,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과 소망 속에 다시 모였습니다. 주님의 분부대로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꿈과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4:33절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비겁하게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진정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원수는 패한 것입니다. 죄도 패하고, 마귀사탄도 패했습니다. 죽음도 패하고,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원수도 절망도 다 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는 예수님의 것만이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을 보내며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찾아 오셔서 우리를 모든 죄의 짐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사랑과 믿음을 회복시키고 천국의 소망을 주시는 주님과 더욱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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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성령강림절 : 성령을 따라 행하라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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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즐거운 헌신

 

 

 


제목 : 즐거운 헌신

말씀 : 삿5:1~9

1.기쁨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즐거우신가요?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행복하고, 주님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이 행복하신가요?

여러분, 우리는 그래야 합니다. 왜요? 주님을 사랑하니까요. 안 그래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행복해야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선물을 주며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기꺼이 수고하고 헌신하지 않습니까?

가수 박상철씨의 무조건 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의 내용이 믿음의 사람들이 한번 깊이 음미해 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언제든지 달려갈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면 한참을 생각해 보겠지만

당신이 나를 불러준다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랑이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달려갈 거야.

이 노래의 당신을 주님으로 바꾸어 이렇게 찬송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찾으면 한참을 생각해 보겠지만

주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무조건 달려가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랑입니다.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주님이 부르시며 무조건 달려가겠습니다.

여러분, 안 그렇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임이 나를 불러준다면 너무너무 기뻐서 열일 젖혀놓고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임에게 선물을 줄 때 얼마나 기쁘고,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 줄때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했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빌2:17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정말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여기서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라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으로 행한 모든 섬김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었는데 그 믿음의 제물 위에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관제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로 여기서 자신을 관제로 드리겠다는 것은 자신의 피를 쏟아 붓겠다는 것입니다. 즉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제물에 자신의 피를 쏟아 붓고 다 태워져서 주님 앞에 몽땅 드릴지라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주님이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의 죽음을 통하여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죽도록 사랑할 수 밖에 없었기에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즐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죽어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남선교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들 모두는 정말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주님께서 주신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기억하며 주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리할 때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의 은총도 더욱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왜 우리는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을 섬기고 헌신해야 하겠습니까? 아니 왜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까?

2.구원의 은총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헌신하고 충성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구원의 은총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누군가가 내 목숨을 살려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사랑하고 은혜에 보답해야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 육체의 생명의 은인도 그와 같을 진대 하물며 육신의 생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107:1, 2(상)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호와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함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속량 즉 여호와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와 같이 고백하며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여호와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구원해 주신 그 은총을 결코 잊지 말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면 그냥 입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입으로 노래만 부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고 감사한다면 기쁨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감사하고 은혜를 안다면 무언가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면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녕 감사와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그 놀랍고 위대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그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요 감사요 기쁨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발 하지 말라고해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휘파람을 불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면서 신이 나고 감사가 넘쳐흐르고 보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4:13절에서는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구원받은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물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 주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로써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세상의 그 무엇에 헌신함보다도 주님을 위하여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헌신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가운데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것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이 엄청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나라를 구하고 경제를 일으키고 정치를 안정시키고 학문적 업적을 남겨도 귀하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누군가 남북통일의 과업을 이룬다면 그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가정을 통일시키고, 믿음으로 지역을 통일시키고, 믿음으로 나라를 통일시키는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은 얼마나 더 큰 일이겠습니까? 얼마나 크고 아름답고 보람있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이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그런 말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으로 여사사 드보라가 군대장관 바락과 함께 가나안의 야빈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당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고 있던 때로 그냥 인간적으로 싸우면 이스라엘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기손강가로 유인하여 거기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기손강 상류에 엄청난 폭우를 퍼부어 기손강가에 있던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를 표류시켜 많은 말들과 군사가 죽고 결국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승을 거둔 것을 감사해서 드보라와 바락이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에서 오늘 우리가 헌신과 관련해서 눈여겨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2절과 9절인데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 2절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9절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보십시오, 드보라와 바락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면서 아울러 이스라엘을 위하여 헌신한 백성들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드보라는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비록 이 전쟁이 하나님이 기손강을 범람시켜 시스라의 군대를 치심으로 승리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 혼자서 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 혼자서 하실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상황이고 오늘 드보라의 기손강 전투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백성들은 백성들의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백성들의 일을 하되 그것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같이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감히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영광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세상에 이보다 더 영광스러울 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대통령과 함께 일해도 영광일진대, 대통령에게 쓰임 받아도 영광일 진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세상의 나라를 튼튼하게 아름답게 세우는데 공헌해도 명예로운 일일진대 하물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 받는다면 얼마나 엄청난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위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참여하되 특별히 지금 우리는 춘계(사순절)집중전도를 실시하고 있는데 여러분, 이 일에도 기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말그대로 복음 즉 복스러운 소식, 생명의 소식, 천국의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어떻게 소홀하겠습니까? 어떻게 감사와 기쁨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특별히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가 봄과 늦가을에 집중전도를 실시하는데 이 때는 사순절과 대강절 기간입니다. 사순절과 대강절을 보내며 우리가 해야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전도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심과 죽으심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사순절과 대강절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왜 죽으셨습니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세워갈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굉장한 것인지를 기억하면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기억하면서 이 귀한 역사에 참여케 해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쁘고 즐겁게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가고 주님의 영광에도 참여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4.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한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결코 상급을 목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일이 이렇게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너무나 굉장한 일이라면 어찌 그 일에 상급이 없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도 귀한 일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또 가치도 인정받아 보수도 더 많이 받지 않습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공로를 세워도, 하다못해 마음과 직장에 공로를 세워도 상이 있는데 그런데 하물며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이 엄청난 일을 하는데 어찌 보상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고전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딤후4:8절에서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러분, 얼마나 좋습니까? 너무나 귀한 일도 하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상급받고...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얼마나 행복한 인생입니까? 여러분, 무슨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타고 트로피를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에게 상을 탔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상장을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트로피를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를 해놓고 그럽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금메달을 따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상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주님께 받은 상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명예롭고 대단한 자랑거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일이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세상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로 우리가 하는 일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남선교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주님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봉사하고 섬김으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여러분 자신도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주님이 주시는 상급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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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j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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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절예배설교] 성령을 따라 행하라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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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설교]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본 문 : 여호수아 3:14 - 17

제 목 :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미각지당춘추몽(未覺池塘春草夢)인데 계전오엽기추성(階前梧葉己秋聲)이라」 연못가의 봄풀이 꿈에서 미쳐 깨어나기도 전에 뜰앞의 오동나무 잎새가 가을을 알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막 2005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2005년도 뒤돌아보면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은 한해였는지 모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랬고, 정치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러나 늘 들려오는 소리는 거짓과 사기와 부정과 부패와 폭력과 강도라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정말 책임있고 깨끗한,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런 정치다운 정치를 기대해봤지만 정치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권모술수와 싸움과 욕설과 권력욕에만 급급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새로 찾아온 이 한해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회의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자화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의 부정적인 자화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은혜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 스스로는 희망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위로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금 밝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희망을 찾고 거기서 은혜와 기쁨과 생명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족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미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기쁨 가운데 이 새롭게 밝아온 한해를 살아가는 비결이겠습니까?

1.말씀을 앞세우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렇게도 손꼽아 기다려왔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제 이 요단강만 건너면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는 하필이면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우기였습니다. 그래서 요단강물은 홍수로 인하여 금방이라도 둑을 넘을 기세로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심도 되었고, 좌절과 실의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다만 내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하면서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무조건 요단강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넘칠 듯이 흐르던 요단강이 멈추어 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이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적 논리로는 당치도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의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리고는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듯이 넘실대던 요단강물이 신기하게 멈추어 서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댐을 쌓은 것처럼 물이 멈추어 위쪽으로 쌓이고 그들이 서있는 곳은 마른땅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차례로 물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놀라움과 감격과 기쁨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삼키려고 넘실대던 요단강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중의 하나였던 요단강이 도리어 그들에게 감격과 기쁨을 주며 이스라엘의 가나안으로의 행진을 축하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언약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상징하는 상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먼저 강에 들어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건너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중앙에 서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의지하며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세력이라해도 너를 삼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것도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는 너의 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언약궤를 바라보며,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그것을 바라보며 강을 건넜고, 그럴 때 가나안을 건너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요단강물도 결코 그들의 발목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달려가는 순례객들입니다. 여러분의 그 순례길의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세상의 물결이 여러분을 삼키려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여러분을 실망케 하고, 좌절케하고,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망이나 불평일랑 더더욱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다만 그것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모든 장애물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말씀앞에서 모든 대적자들은 쫓겨 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새롭게 다가온 이 새해에는 오직 말씀을 바라보며 신뢰하며 의지하며 말씀안에서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여러분을 힘들고 지치고 낙심케 했던 모든 어두운 것들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진정한 가나안복지의 은혜를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도전 세력과의 전쟁에 동참해야 합니다.

가나안 복지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또 한가지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요단강을 건넘으로 그들이 할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요단강을 건너긴 했지만 아직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가까스로 가나안땅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러나 그 땅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블레셋 족속을 비롯한 가나안 일곱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견고한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만 그땅을 차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난관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던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이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무너뜨려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그들은 가나안복지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작전에 참여합니다. 어쩌면 정말 무모한 싸움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을 앞세우고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르며 그 성을 일주일 동안이나 돌았습니다. 그 견고한 성 주위를 그저 돌고 또 도는 것이었습니다. 위에는 여리고성의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위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다면 그들은 여지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무모한 방법에 회의가 따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저 묵묵히 돌고 또 돌았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그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했을 때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그러자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그냥 거저로 가만히 앉아서 들어가야 할 땅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렬에 같이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땅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세력들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길을 막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지를 동원합니다. 때로는 완고함을, 때로는 문화를, 때로는 과학을, 때로는 돈을, 때로는 향락을, 때로는 무사안일함을, 때로는 권력을, 때로는 지식을, 때로는 환난과 시험을, 심지어는 가족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그것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쩌면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내 힘만으로는 확실히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는 길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새로운 2006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힘든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어둡게 찾아온 새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세상의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더 든든한 빽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 분을 믿고 신뢰하며 따르기만 하면 그것들은 모두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찾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주님을 바라보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방해꾼들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나안복지를 향할 발걸음을 방해하는 것이 환경이든 상황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나 자신이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이 새해가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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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결혼예배] 기억에 남는 결혼식 준비

 

    


기억에 남는 주례를 위한 아이디어

 

1.혼인서약문을 신랑 신부가 직접 작성하도록 해보십시오.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혼인서약의 내용을 잊고 살게 마련입니다. 고작 “아멘”이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도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혼인서약문을 주례자가 낭독하고

서약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그저 대답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신랑과 신부가 스스로 혼인서약문을 작성하고 주례자가 미리 그 문구를 수정해주는 방법을 사용해보십시오.

서약의 내용을 만드는 일 자체가 신랑 신부에게 소중한 공부가 될 것이고 서약의 내용에 본인들 스스로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을 것입니다.
물론 주례를 맡은 목회자가 그 내용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세밀하게 조언을 해주어야만 내용이 충실한 서약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가능하면 결혼식장에서 이 서약문에 신랑과 신부가 직접 서명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2.주례설교 원고를 신랑 신부에게 나눠주십시오.

일생에 한번 뿐인 결혼식을 위해 단 위에 서 있는 신랑과 신부는 대체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하객들 앞에서 잔뜩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압박감에서 오는 부담감도 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례자가 아무리 좋은 권면을 한들 그 내용이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건 분명 지나친 기대일 것입니다.
차라리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지에서 안정감을 되찾고 결혼에 관한 생각을 되짚어 보며 다시 한번 읽어볼 수 있도록 원고를 선물해 보십시오.

실제로 이렇게 하는 목사님들이 몇 분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또 결혼주례가 담긴 비디오 테잎을 신랑 신부에게 선물하기도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부부가 함께 틀어보며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락교회의 한 장로님은 45년전에 받은 주례설교를 녹음해 해마다 결혼기념일맞아 듣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단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랑 신부의 결혼생활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3.신랑 신부에게 제대로 된 결혼준비를 시키십시오.

하다못해 차를 운전을 하는데도 면허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인 결혼을 하는데는 1시간도 안되는 결혼식을 치르는 것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 고작입니다.
제대로 된 결혼준비란 단순히 혼수품을 저렴하게 마련하거나 신혼여행을 의미있게 보내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생활을 통해 부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행여나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어떤 요령이 있는지, 가사분담든 어떻게 하고, 가정경제는 누가 어떻게 담당할건지,

자녀에 대한 계획은 어떠한지, 부부간의 신앙성장을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등등.
숱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서로 솔직하게 대화하고 해결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혼수감입니다.
주례에 앞서 신랑과 신부를 만나 이러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들려주십시오.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를 비롯한 전문연구기관에서

실시하는 결혼예비학교에 참가하도록 권유해 보십시오.
결혼예비학교를 거친 커플과 그렇지 않은 커플 사이엔 삶의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4.실제적인 가르침을 주십시오.

한 목사님은 주례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곤 합니다.
“남편되는 신랑에게 권면합니다
- 결혼기념일과 아내의 생일을 잊지 마십시오.
- 나무를 가꾸는 정원사의 심정으로 아내를 대하십시오.
- 모든 일을 아내와 의논하고 결정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 진정한 행복은 사랑의 대화입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가족의 이야기를 삼가십시오.
- 남편의 매력은 너그러움입니다. 한 걸음 양보하십시오.
- 가정의 경제를 아내에게 일임하여 보람을 갖고 살림에 임하도록 하십시오.

또 아내되는 신부에게 권면합니다.
- 아름다움과 재치와 근면성이 있는 현숙한 아내가 될 것을 꿈꾸십시오.
-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식탁을 친교와 화목의 장으로 가꾸십시오.
- 웃으며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결코 혼자 중얼거리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 남편에게 혼자만 지낼 수 있는 정신적인 휴식시간을 주십시오.
- 중요한 일은 꼭 남편의 결정을 따르십시오.
- 남편의 수입에 맞추어 규모있는 살림을 꾸리십시오.
- 가정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도록 하십시오.“
왜 그렇게 사소한 일까지 시시콜콜하게 잔소리를 하느냐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젊은이들이 결혼주레에서 바라는 것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5.신랑 신부의 기억에 남는 결혼예식을 고안하십시오.

주례설교 중간에 신랑 신부가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십시오.

미리 신랑 신부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오도록 주문하면 됩니다.

편지를 낭독한 후엔 새가정을 이루는 신혼부부와 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님들을 위해 주례자가 기도해 주십시오.

 당사자들은 물론 생각없이 들린 하객들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 특별한 선물도 생각해 보십시오. 한 목사님은 주례를 설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커다란 양초를 하나씩 선물한다고 합니다.

부부가 오붓하게 마주앉아 대화할 때마다 그 양초를 키도록 하고 양초가 다 달았을 즈음엔 다시 한번 주례자를 찾아와

그동안 지내온 시간들에 대해 들려달라는 것입니다. 점차 사라져가는 부부간의 대화를 회복하고 부부간의 친밀감을 높일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랑 신부가 부부 십계명을 스스로 만들어 서로에게 약속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결혼예식 순서지나 청첩장에 소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6.주례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한 목사님은 딱딱한 권면보다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얽힌 경험담들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주례를 대신하곤 합니다.
결혼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나 감동적인 순간도 이야기 하지만 그것보다는 가장 위험하고 위태로웠던 경험을 들려주는데

주안점을 두는 겁니다. 심지어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생각하고 홀로 눈물을 곱씹던 아픔들까지 고스란히 들려주는 겁니다.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쏟아놓는 모습을 보면 사회적으로 덕망도 있고 성공한 목회자로서 존경을 받아온

그 목사님이 정말 그러한 아픔을 겪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러한 주례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흡인력으로 결혼예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영혼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습니다. 또 부디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결혼을

경솔하게 여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권면하는 힘도 갖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도덕률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경험담이 감동적이게 마련입니다.


7.참석자들을 고려하십시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 두 사람만이 아닙니다. 신랑 신부의 부모님을 비롯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주체입니다. 그

런 점에서 주례자는 결혼식 하객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기억에 남는 주례사를 남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객들 가운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불교 신자이지만 어쩔 수 없이 평소의 친분 때문에 교회에서의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한번 총동원주일 행사를 마련하려면 숱한 노력과 비용이 소모되지만

결혼식에는 제 발로 찾아온 전도대상자들이 수두룩하게 마련입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할 때도 보다 보편적인 언어와 표현법을 사용하십시오.

일평생에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해 차근차근 기독교의 사랑에 관해 설명한다면

신랑 신부뿐만 아니라 하객들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례를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8.과감하게 특별한 순서를 도입해 보십시오.

미국에서는 결혼식에서 당사자들만이 서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까지 서약을 하는 이색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부모서약’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오늘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우리 부부 두 사람은 늘 사랑과 기도로 신랑 신부를 후원하고 서로를 섬기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녀들에게 가정생활의 참된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 친지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또 한번 떠나보낸 자녀들을 우리의 뜻대로 먼 거리에서 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도록 힘써 기도하는 후견인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또 자녀 가운데 한 사람이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편지를 낭독하고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이에 대한 답례로

몇가지 권면을 들려주는 편지를 낭독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울러 하객들이 신랑 신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축복의 말들을 써넣을 수 있는 사인 보드(sign board)를 마련해 두었다가

신혼부부에게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9.신랑 신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십시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 가운데는 신랑 신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찾아온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나 이웃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더구나 신랑측 하객들은 신부에 대해 아는 부분이

거의 없을 것이고 신부측 하객들도 신랑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에 대해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반대로 산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주례자는 신랑 신부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 당사자들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에 얽힌 에피소드, 신랑 신부의 버릇이나 특징 등을 소개해보십시오. 또 신랑 신부의 경력이나 앞으로의 소망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하객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랑 신부의 장점과 단점,

취미나 공통점, 별명이나 신앙생활 경력 등을 들려주셔도 됩니다.
이를 통해 목회자가 예비 부부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도 있고 보다 친밀한 피드백을 주고 받으면서

결혼식을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선 결혼식 전에 신랑과 신부를 만나 부담없이 대화를 나눠보아야만 합니다.


10.결혼주례의 ‘아프터 서비스’를 시도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주례가 결혼식장에서 단 한번의 행사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보다 의미있는 주례는 결혼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랑과 신부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랑 신부를 만나 보십시오. 그동안 귀로 듣고 속으로 예상했던 것과 신혼부부들이 실제 결혼생활에서

겪는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엔 예상하지 못한 갈등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고 배우자에게서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 커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잠시라도 함께 생활해 본 신혼부부들을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집으로 직접 초청해 선배의 입장에서 신혼부부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들려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주례의 ‘아프터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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